민선 6기 제주도정 출범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원맨 정치' 지향 발언, 왜 반복되나 “내가 모든 걸 직접 챙기겠다” 참 익숙한 말이다. 정치를 희화화하는 언어이다. 공자는 “정치인이 올바르게 행동하면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은 스스로 행할 것이요, 정치인의 행동이 부정하면 백성들은 호령을 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다수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독선독주를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가 이를 거부하고 ‘원맨 정치’의 자만에 빠지는 순간 낭떠러지에 직면하게 된다. ‘원맨 정치’ 발언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민선 6기 제주도정 출범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제주 관료사회의 적폐를 어떻게 극복하나 제주 사회에 만연돼 있는 관료주의의 적폐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첫째, 다양성을 구축해야 한다. 세계 경제는 갈수록 빨리 변하고, 예측은 어려워지고 있고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제주는 건전한 생태계의 구축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면서 위험에 대비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개척해야 한다. 특히 제주사회가 도서지역의 폐쇄적 특성에서 형성된 특유의 강한 배타적 자주문화를 지니고 있어 더욱 더 그렇다. 최근 한 조사에서 동아시아 한·중·일은 서구 국가에 비해 혁신은 잘해도 창조성은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국가가
본지 강민수 논설위원이 그동안 연재해온 ‘강민수의 영어진단’을 당분간 쉰다. 새로운 연재에 천착하기 위해서다. 20여회 예정으로 원도심 활성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법을 모색한다. 애독을 권한다./ 편집자 주 ▲ 탐라문화광장 조감도 1일 국토교통부에서 조례 표준안이 하나 나왔다. 이른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원 도정이 원도심 활성화 정책을 펼 때 참고하라는 것이다. 내용을 훑어보면 우선 주민 참여를 강조한다. 사업 대상지역에는 주민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마땅한 일이다. 원도정은 또 관련된 주요 정책을 심의하기 위한 지방도시재생위원회, 전담 행정부서, 그리고 지원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도시재생위원회는 기존의 도시계획위원회가 대체할 수 있도록 하고, 민관 협업 중간지원조직인 지원센터는 민간법인이나 단체 등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여 지자체의 부담을 덜어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제주도의 도시계획위원회는 소위 관피아의 오명을 쓰고 있는 조직이다. 이들을 원도심 살리기에 개입시킬 경우 촌스러운(?) 지역은 싹 쓸어 재개발하고 재건축하자는 방향으로 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 덕수 이씨 정려 영화 ‘명량’ 때문에 아산 현충사에 때아닌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 생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에 덕수 이씨 정려(충신·효자·열녀에게 내리는 문)를 모아 놓은 곳이 있다.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곳이다. 충무공 정려 외에 세 개의 정려가 더 있다. 이완은 충무공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참가한 그의 조카다. 무과 급제 후 의주부윤을 지내고 정묘호란(1627년) 때 청군에 패하자 불 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5세손 이봉상. 이인좌의 난(1728년) 때 충청병사로서 숙부 이홍무와 함께 잡혔다. 적도들이 항복을 권유하자 “네놈들은 충무공 집안에 대대로 충의정신이 전해지는 걸 모르느냐”고 질타한 뒤 죽음을 택했다. 이들 세 명이 정려 주인공. ▲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영화 <명량>의 한 장면 5년 전 충무공 후손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취재 동행한 후손 이종흔씨(당시 73세·서울대 명예교수)은 어릴 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왜적에게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너의 조상”이란 말을
민선 6기 제주도정 출범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그리스 국가부도 배경에 관폐가 자리잡아 그리스 아테네 북서쪽에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는 '코파이스'라는 유서 깊은 호수가 있었다. 1957년 그리스 정부는 이 호수의 물을 바다로 모두 빼내고 도로를 내면서 이 호수는 사라졌다. 그런데 당시의 공사 감독 기구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현재 30여명의 공무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헌법 개정으로 공무원의 평생고용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 일자리를 늘리는 방법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펴면서 공무원과 정
▲ 조한필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이순신 장군에게 1597년은 어떤 해였는가. 참담했다. 음력 2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돼 서울로 압송됐다. 4월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 아산 고향집에서 어머니상(喪)을 당했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모두 잃었다. 10월엔 겉봉에 ‘통곡’이라고 쓰인 편지를 받는다. 갓 20살이 된 막내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불붙은 왜란은 이순신의 삶을 휘저었다. 왜적 속임수에 속은 선조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부산 앞바다에서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진 앞 넓은 바다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적을 기다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왕과 조정이 발끈했다. 유성룡까지 이순신을 비난했다. 선조는 1월 27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며 통제사 교체를 결심했다. 이순신도 왕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순 없었다. ▲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량해전도 난중일기는 몇 개월 중단됐다가 옥문을 나
‘명량’이 대한민국 국민이면 꼭 봐야 할 영화가 돼 버렸다. 5000만명 중 1500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초고령층과 영유아를 빼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본 꼴이다. 이 영화 한 편이 온 국민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도록 했다. 명량해전은 충무공에게도 벅찬 전투였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이 날의 승리를 “이는 진실로 천행(此實天幸)”이라고 결론지었다. 13척으로 왜선 133척과 대적했다. 좁은 물목이라 가능했다. 임진왜란 발발이후 연전연승을 거뒀던 충무공이지만 명량해전은 두려웠다. 전력상 너무 열세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전투였다.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그쳤다. 거제현령 안위가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왜선에 머뭇거렸다. 이순신이 다가가 소리쳤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다고 살 것 같으냐.” 중군장 김응함에겐 “네가 중군장으로 대장(통제사)을 구하려 하지 않으니 그 죄를 면할 듯싶으냐. 당장 처형해야 하지만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마”라고 질타했다. 이 말을 듣자 두 사람은 적진으로 돌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옛날 나라의 지도자인 임금들은 세상이 흉흉해지고 백성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면 임금은 이를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려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에 석고대죄 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당시 지도자로서의 임금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원 도정은 제주 경제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도민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경제비전과 새롭고 과감한 성장전략을 마련해 강력한 추진력으로 제주 경제를 이끌고 가야 한다. 혁신적인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이전 세대로부터 넘겨받은 유산의 탕진과 더불어 빚더미를 우리의 자손 세대에 떠넘기게 될 뿐이다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제주 혁신, 도지사 본인과 주변 인물부터 먼저 해내야 ‘사회 지도층부터 바꿔달라는 국민 염원 들리는가’ 한 언론이 ‘국가 대혁신’에 대한 여론조사 후 내건 헤드라인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예상대로 사회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국민은 사회 지도층이 보통사람들보다 무능하고 부도덕하며 전문성도 민간 부문보다 낮고 준법정신도 일반인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여기에서도 정치인과 공무원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서 어김없이 가장 꼴찌였다. 우리 사회의 공공성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다. 특히
▲ 조한필/ 제이누리 객원논설위원, 충청타임스 부국장 충남도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충남을 방문하면 기념품으로 ‘철화분청사기 어문병’을 선물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교황의 검소한 이미지에 들어 맞고 충남을 홍보할 수 있는 대표적 기념품”이고 “물고기 문양은 풍요를 상징하며, 종교적으로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병이어는 예수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기적적 사건을 뜻한다. 그렇지만 교황 선물에 종교적 의미를 붙인다면 분청사기보다 옹기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더 소박·검소한 그릇인데다 특히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 역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주로 생업으로 삼았던 것이 옹기(질그릇) 굽는 일이었다. 교우들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며 생계와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택한 것이 서민들 그릇인 옹기 제작과 판매였다. 신자들은 파난처로 낯선 이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관군 습격이 있을 때 도주가 쉬운 곳을 골랐다. 여러 갈래로 도주
민선 6기 제주도정이 출범한 지 이제 한달입니다. 이에 맞춰 고운호 전 한국은행 제주본부장이 “제주 경제와 사회의 내일을 위한 설계”를 화두로 던집니다. 제주 혁신을 위한 전략을 제시합니다. 기고는 “제주 혁신하여 재창조의 길을 가자”를 시작으로 “제주 혁신하려면 지사부터 변해야” “관료 개혁” “제주 경제의 선진화 전략“ 등 40 여개의 주제로 제주가 가야 할 길을 담론의 소재로 삼습니다. / 편집자 주 세월호 참사가 국가 혁신의 단초 제공해 원칙과 기본을 무시하고 변칙과 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평가받는 한국사회의 민낯이 송두리째 실체를 드러냈다. 대한민국 시스템의 총체적 파산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쌓이고 쌓여 누르고 눌려 있었던 비리와 부패와 허위와 관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돌진형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절차와 과정은 무시한 채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성장 지상주의의 사회구조가 고착되면서 대형 참사는 예정되어 있었다. 성장 지상주의는 그 적폐를 은폐하는 가림막이었다. 그 여진이 아직도 깊게 이어지며
▲ 미국의 기록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National Archives]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대치했다. 하지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북한군은 병력뿐 아니라 각종 탄약이나 보급품 지원에 애로를 겪기 시작했다. 때문에 북한군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정면공격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 6·25전쟁에서 유엔군이 북한군에 공격을 먼저 시도한 첫 전투가 바로 ‘킨 전투’다. 이때 미 제 25사단은 병력 2만 4000여 명과 전차 101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사단장의 이름을 따 ‘킨 특수임무부대(Kean TF)’로 명명했다. 이에 대적하는 북한군 제6사단은 병력 7500명 정도에 전차는 없는 것으로 추정됐다. 객관적인 전투력에서는 미군에 비해 상당한 열세였지만 그들은 산악 능선의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있다는 유리함이 있었다. 미군의 공격은 8월 7일 오전 6시 30분에 시작됐다. 그러나 산악 능선의 이점을 이용해 주요 목을 차단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도로를 따라 공격하는 미군은 좋은 표적이 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