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장면1> 꼭 1년 전의 일이다. 지난해 3월7일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이 주무대. ‘구럼비’가 이날의 뉴스 키워드다. 구럼비바위는 길이 1.2km에 너비가 150m나 되는 거대한 바위였다. 검은색의 용암너럭바위는 한 덩어리로 강정마을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희귀지형이다. 게다가 그 바위의 한 켠에선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습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붉은발말똥게·맹꽁이·층층고랭이 같은 멸종 위기종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특별자치도법에 따라 절대보전지구로 지정됐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구럼비바위 한 켠에서 나오던 용천수를 ‘할망(할머니)물’이라 불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마시면 아이가 생기고, 아픈 아이가 마시면 낫는다고 여겨지던 신성한 물이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정한수이기도 했다. ▲ 지난해 3월 7일 구럼비 바위 발파가 진행되는 모습. 그 구럼비바위는 그날 눈앞에서 뭉개졌다. 산산히 부서졌다. 제주 해군기지 공사부지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부터 시험발파와 본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아라비아에서 전해졌다고도 하고,남부 아시아에서 전파됐다고도 하는 감귤-. 멀리 삼국시대 이전까지 유래가 거슬러 올라가는 감귤은 이제 제주도·제주도민의 생존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과수작목이란 건 제주도민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그 감귤은 한 겨울인 설 차례상에 어김 없이 올라가는, 한때는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잠시 옛 기록을 본다. 조선실록(朝鮮實錄)은 "태조(太祖)원년인 1392년 10월 고려시대로부터 내려오던 공부제도(貢賦制度)를 채택,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신설해 귤․유자 등은 별공(別貢)으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전회통(大典會統) 6권은 "제주3읍에 감귤나무를 심고 장려하며, 그 관리상태에 따라 상벌을 받도록"하였다. 모두 제주감귤의 가치를 인정했고,관료들의 독려에 의해 재배돼 조정으로 진상된 과일이었다는 소리다.사실 도민들의 소득증대와는 무관했던 과일인 셈이다. 재래종이 아닌, 소득작목으로 지금 제주도내 농가 대다수가 재배하고 있는 온주감귤은 엄탁가(Esmile J. Taquet)신부에 의해 일본에
▲ 임성준 뉴스콘텐츠국장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제주 출신은 없다. 이는 제주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새 정부와의 소통 창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 대한민국을 추구하는 당선인에게 제주는 또 그 중 1%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차기 정부의 국정기조와 세부 공약실천 계획을 마련한다. 하지만 인수위원회 9개 분과의 간사와 위원에 제주출신 인사는 단 1명도 없었다. 정부부처에서 인수위에 파견된 전문위원과 실무위원 명단에도 제주 인맥은 찾아 볼 수 없다. 총 53명으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인수위 파견규모(78명)보다 대폭 줄었다. 그래서 이번에 인수위에 들어간 공무원들은 ‘바늘구멍을 뚫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수위 한 관계자는 “이번에 낙점된 공무원들은 각 부처가 1순위로 추천한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정치권과의 친소 관계는 거의 따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과거 인수위에선 전문위원·실무위원 선발을 앞두고 공무원 사회에서 인맥·학맥 등을 앞세워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번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인수위가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정치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정치학도들이 코흘리개 신입생 시절 <정치학개론>을 수강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란 개념규정이다. ‘정치’에 대한 다양한 개념정의가 있지만 정치학계에서 다수로부터 설득력과 타당성을 인정받는 진술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설파한 '정치'에 대한 개념정의다. 그냥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간단한 수사(修辭)로 보이지만 그 개념정의엔 어마어마한 가치와 철학이 내재돼 있다. 정치-.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만큼이나 부정적 요소를 내포한 게 있을까? 부정·부패·담합·패거리·철새·편가르기·지역주의···. 순간 떠오르는 부정적 단어만 놓고 봐도 우리의 정치에서 풍기는 인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흡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지나 11년을 더 보탠 111년 전의 일이다. 1901년 가을 독일 쾰른신문의 아시아특파원이자 지리학자인 지그프리트 겐테(Siegfroied Genthe·1870~1904)는 당시 조선 황실고문이었던 미국인 샌즈(William F. Sands)의 소개로 제주에 도착했다. 그의 손엔 일종의 ‘출입허가증’ 격인 고종황제의 칙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제주목사(牧使) 이재호(李在頀)에게 매달리듯 졸랐다. 결국 그는 한 무리의 조선인들과 백록담이 있는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서양인으로선 첫 등반자였다. “이렇게 방대하고 감동적인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이 지구상에 있을까? 바다 한 가운데에 있고, 모든 대륙으로부터 100km이상 떨어져 있으며, 끝없는 해수면 위로 높이 치솟아 오른 한라산은···그 정상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도대체 그 누가 이 산 위 공중에서 바다를 품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이 산 위에서 보이는 그 모든 기이한 것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으로, 마치 대양이 하늘로 올라오기라도 한 듯, 마치 평지 전부가 우당탕 열려서 해수면으로부터 거의 2000m 위에 서 있는 이곳에서도 또다시 우리를 우리의
▲ 양성철/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제이누리 독자 여러분! 관심과 후원, 격려 덕에 이제 제이누리가 창간 첫돌을 맞습니다. 지난 1년을 회상하다 보니 쏜살같다는 표현은 이런데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조금 길게 얘길 드리려 합니다. 자랑이 섞일 것 같아 쑥스럽지만 보고라고 생각하고 양해바랍니다. 제주를 여는 창! 제이누리는 지난해 11월 2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8개월여에 걸친 기획과 벤치마킹, 미디어법인 설립 등의 준비과정을 거친 결과입니다. 8월30일 미디어법인 JNN(주)설립, 9월1일 사업자등록 완료, 그리고 9월16일 인터넷신문 등록이 창간에 앞선 설립과정입니다. 출범준비 체제가 갖춰지자 드디어 지난해 11월 2일 제이누리는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창간을 알리는 기념식장엔 50여년 외곬 인생을 보내오신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직접 참석, 축사로 거들었고 그 외 도내외 각계인사 등 1천여명이 오셔서 저희들의 앞날을 축원해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창간과 동시에 제이누리는 새로운 시도에 나섭니다.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을 도내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서비스하기 시작한 제이누리는 세계를 향한 비전을 선보입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여행이었다. 행선지를 고민하다 어릴 적 즐겨보던 소년잡지를 떠올리곤 그곳으로 정했다.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릴 적부터 꼭 한번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에 아이들에게도 교육적 효과가 높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돈을 털었다. “물건을 사 주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세계의 문화현장을 보여주는 게 더 교육적”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그렇게 앙코르와트의 본고장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만 4일을 보냈다. 물론 대단했다. 솔직히 상상하기 힘든, 믿기 어려운 고대의 유적을 만났다. 앙코르 와트란 석조 건축물 사원이 12세기 시절에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앙코르와트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 시절 영국 런던이 7만명,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고려 개경이 10만명이 사는 도시였다면 앙코르와트를 둔 도시 ‘앙코르톰&rsqu
▲ 양성철/ 발행.편집인 제주엔 2개의 물공장이 있다. 한 곳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있고, 또 한 곳은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다.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공장은 제주도 산하 지방공기업인 제주지방개발공사가 가동하는 공장이다. 또 한 곳은 한진그룹 계열사인 민간기업 (주)한국공항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 곳에선 ‘제주삼다수’란 브랜드의 생수를 만들고, 또 다른 곳에선 과거 ‘제주광천수’란 이름에서 지금 ‘한진제주퓨어워터’로 이름을 바꾼 생수를 만든다. 교래리 공장은 1996년 문을 열었고, 가시리 공장은 그보다 앞서 12년 전인 1984년 문을 열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란 주소만 놓고 보면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생각되지만 현장에 가 보면 바로 이웃이다. 교래리 공장이 해발 420m고, 가시리가 해발 320m로 100m 차이가 날 뿐 두 공장 간 평면거리는 사실 1km 남짓이다.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지하에서 끌어올리는 물 자체도 같은 수맥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두 곳의 물공장은 운명적으로 신분이 다르게 태어났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좌)와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가시리 물공장
▲ 양성철/ 발행.편집인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는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제 만 72세다.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주요저작을 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이론가로 꼽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최 교수의 미국 유학시절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이가 바로 그다. 그는 2010년 말 아프리카의 5개 신문과 인터넷 미디어 아프로온라인(Afronline)과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코트디부아르·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중의 정치적 열망이 번지면서 정치적 위기와 대중혁명으로 나라마다 체제가 흔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선거’(election)와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현직에 재임 중인 자가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고, 패배하면 사무실을 떠나는 것이 민주주의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 양성철 발행.편집인 2003년 10월의 마지막 날 정오. 제주시내 한 호텔에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연단에 오른 이는 현직 대통령 노무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나갔다.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중략)···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기대했던 일이지만 일순간 장내는 얼어붙었다. 이어진
▲ 양성철/ 발행.편집인 까마귀쪽나무란 식물이 있다. 녹나무과의 상록 소교목이다. 키가 7m까지 자라는 식물이다. 노란 빛이 도는 흰색 꽃을 피운다. 관상용으로 심기도 하고 열매도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울릉도·제주도에 서식하는 식물이다. 물론 제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이 까마귀쪽나무나 그 열매를 제주에선 ‘구럼비’라고 부른다. 구룸비·구름비라고도 한다. 구럼비! 그 구럼비는 지금 제주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서귀포시 강정마을이 현장이다. 강정마을 해안에 떡하니 자리한 용암바위의 이름이 바로 ‘구럼비바위’다. 구럼비(까마귀쪽나무)가 주변에 많아 구럼비 바위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사실 이 구럼비 바위는 구럼비에 비견할 ‘급’을 넘어선다. 길이 1.2km에 너비가 150m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바로 구럼비바위다. 검은색의 용암너럭바위는 한 덩어리로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희귀지형이다. 게다가 그 바위의 한 켠에선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붉은발말똥게·맹꽁이·층층고랭이 같은 멸종 위기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인민재판이란 말이 있다. 6·25동란을 거친 우리 어르신 세대들에겐 흔한 말이다. 지주나 관리를 군중 앞에 내세우고 죄목을 나열한 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방식이다. 이미 군중 곳곳엔 앞잡이·모리배들이 포진하고 있다. ‘죽여라’ 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그게 전체 군중의 목소리로 뒤바뀌면 인민재판대에 오른 이는 총살형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무서운 현실이었고, 공포였다.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공포 그 자체였고, 아무 힘 없는 민중들은 그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걸려들지 않는 게 최선이고, 잘 보여야 살 수 있었다. 춤추라면 춤추는 시늉을 해야 했고, 선동하는 소리엔 동조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반대쪽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빨갱이’로 낙인 찍었는데 ‘아니다’란 헛소리를 하면 여지없이 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좌익분자 색출이 명분이었지만 평소 밉보였던 지식인이나 비판적 인사들은 ‘세트’로 청소됐다. 6·25 전란의 상처가 없는 듯 한 제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