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갓과 망건, 탕건 등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인 '관모'(冠帽)를 만들던 주산지였다. '모자의 나라'로 불렸던 우리나라에서 신분 높은 양반들만 모자를 쓰진 않았다. 관모의 주산지 제주에선 백성들을 위해 어떤 모자를 만들었을까. 제주 사람들이 일을 하며 즐겨 썼던 모자인 '정동벌립'을 만들어 최근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에 지정되며 장인(匠人)의 반열에 오른 홍양숙(63) 정동벌립장 보유자를 만났다. ◇ 기적·운명과도 같은 만남 '정동벌립' "정동벌립과의 만남은 정말 저를 살린 '기적',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홍양숙 장인과 정동벌립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7년 가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에 살던 17살 홍 장인은 어렸을 적 걸린 결핵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장기간 집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밭일하러 나간 텅 빈 마을에서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홍 장인과 인근에 살던 큰아버지뿐이었다. 홍 장인의 큰아버지는 1986년 제1대 제주도 무형유산 정동벌립장으로 인정받았던 고(故) 홍만년(1910∼1998) 선생이었다. 정동벌립은 테우리('목동'을 뜻하는 제주어) 또는
소설가 한강(53)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새 역사를 썼다.아시아 여성이 123년 역사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또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은 지난 2000년 평화상을 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24년 만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생중계에서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림원은 이어 "한강은 자기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며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부연했다. [연합뉴스]
제주인이 문화로 하나 되는 축제 '제63회 탐라문화제' 막이 올랐다. 제주예술제(1962∼1964년)와 한라문화제(1965∼2001년)를 거쳐 제주 전통문화축제로 자리잡은 탐라문화제는 60여년의 긴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탐라문화제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진단해본다. ◇ 제주예술제·한라문화제 거쳐 탐라문화제로 1962년 5월 17일 제주시 중앙극장. 탐라문화제의 시발점인 제1회 제주예술제가 열렸다. 1년 전 5·16 군사정변(쿠데타) 당시 내려진 포고령으로 전국의 모든 문화단체가 강제 해산된 이후 이듬해 4월 한국예총 제주도지부가 창립하면서 개최한 제주의 순수 예술 행사였다. 하지만 제주예술제는 개최 시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5·16 군사정변 1주년을 기념한 행사였다. 이 때문에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됐다는 한계와 함께 단절됐던 예술활동의 명맥을 이어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는 엇갈린 평가가 상존했다. 제주예술제는 1964년 제3회 행사까지 그대로 치러지다 1965년 제4회부터는 '한라문화제'로 이름이 바뀌었다. 민속행사를 보강해 지역 예술인만이 아닌 전 도민이 참여하는 향토문화축제로 거듭난 것이다. 명칭과 축제 성격이 달라진 후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이 방송됐을 때 외국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좀비'가 아니었다. 바로 한국의 전통 모자 '갓'이었다. 해외 시청자들은 당시 드라마 킹덤에 대해 "좀비와 멋진 모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갓'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과거에도 개항 후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다채로운 갓에 매료돼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갓'을 비롯한 '망건', '탕건' 등 다양한 관모(冠帽,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를 만들었던 주산지가 '제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관모 공예의 명맥이 유일하게 제주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 잊혀가는 관모 전통 잇는 사람들 순우리말인 '갓'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모자다. 선비들은 상투를 틀고 이마에 망건(網巾)을 두른 뒤 그 위에 탕건(宕巾)을 쓰고, 다시 그 위에 갓을 썼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완벽하게 두를 때까지 수차례 풀었다 둘렀다를 반복할 정도로 의관을 정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이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갓 전시관'. 조선시대 양반들이 외출할 때 일상적으로 썼던 모자인 '갓'을 테마로 한 전시관이 제주에 있다는 것에 관광객들은 의아해하곤 한다. 다양한 박물관들이 즐비해 제주를 '박물관 천국'이라 부르곤 하지만, '갓 전시관'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경복궁이나 한국민속촌 인근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갓 전시관이 제주에 들어선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외할머니 고(故) 강군일(1883∼1952년) 선생, 어머니 고(故) 고정생(1907∼1992)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장순자(84)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그리고 장순자 선생의 딸 양금미(48) 이수자 등 4대(代)째 갓을 만드는 전통을 이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딸에게로…4대째 전통 이어가 "고정생 할망이 일등이우다! 그 할망밖에 잘하는 사람이 어서….(고정생 할머니가 일등이예요. 그 할머니밖에 잘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서울에서 온 전문가가 제주시 삼양 일대 5개 마을을 돌며 양태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묻고 다니자 뭇사람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올 초 개봉한 영화 '파묘'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상반기 극장가를 휩쓸었다. 무당 '화림' 역을 맡은 김고은이 서슬 퍼런 식칼을 든 채 신들린 듯 춤을 추며 굿을 하는 장면이 관객들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등 영화의 흥행 뒤에는 무속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이른바 오컬트(occult) 장르물인 '파묘' 이후 무속 신앙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무속 신앙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제주. 독특하게도 제주에선 다른 지역과 달리 무당을 '심방'이라 부르며 종교와 문화유산의 영역에서 보호한다. 제주에선 왜 무당을 심방이라 하는 걸까. ◇ "신령을 만나는 이, 신의 성방"…심방의 의미는? "난 무당이라 불리는 게 싫어. 심방님 또는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제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러 심방과 인터뷰하다 보면 '무당'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무속 신앙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제주에선 여전히 종교와 문화 영역에서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심방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무당을 일컫는 명칭이다. 유독 제주에서 달리 부르는 '심방'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심방
제주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들의 무구(巫具)가 최근 연이어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기증됐다. 지난 2022년 12월 별세한 고(故) 고행선 심방의 무구자료 80점과 지병으로 인해 무업활동을 중단한 강인순 심방의 무구자료 65점이 지난해 2월과 4월 각각 기증됐다. 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전통을 이어온 고(故) 서재 김윤수 큰 심방의 무구자료 33점도 지난 2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기증자료 목록에 올랐다. 무구는 심방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여러 도구를 두루 일컫는 말로, 심방 사이에 대를 이어 전승되곤 한다. 무구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또 이들 무구가 박물관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 박물관으로 향하는 무구…달라진 시대상 제주는 예부터 오랜세월 무속 신앙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산과 들,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했고, 자신과 가족·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신 신당인 '본향당'(本鄕堂)을 중심으로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제주에선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이사철인 '신구간'(新舊間), 새해를 맞아 마을을 지키는 신께 감사의 세배를 올리는 신과세제
국민의힘을 이끌 새 선장에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선출됐다. 한 신임 대표와 함께 '친한(친한동훈)계' 최고위원 2명도 지도부에 입성했다. 한 대표는 23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원 투표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과반인 62.84%(32만702표)를 득표,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확정했다. 원희룡 후보는 18.85%(9만6177표), 나경원 후보는 14.58%(7만4419표), 윤상현 후보는 3.73%(1만9051표)의 득표율을 각각 기록했다. 대표 선거와 별도로 1인 2표 방식으로 치러진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장동혁·김재원·인요한·김민전 후보가 당선됐다. 45세 미만 청년최고위원에는 진종오 후보가 선출됐다. 장동혁 수석최고위원과 진종오 청년최고위원은 한 후보의 러닝메이트다. 인요한 최고위원은 원희룡 후보의 러닝메이트로서 '친윤(친윤석열)계'로 분류된다. 한 대표는 수락 연설에서 "민심을 어기는 정치는 없다"며 "국민의 마음과 국민 눈높이에 더 반응하자"고 말했다. 또 "건강하고 생산적인 당정관계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때그때 때를 놓치지 말고 반응하자"고 강조했다. 아울러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
국민의힘 새 대표로 한동훈 후보가 선출됐다. 한 후보는 23일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서 당원 투표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과반인 62.8%를 득표,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확정했다. 원희룡 후보는 18.8%, 나경원 후보는 14.6%, 윤상현 후보는 3.7%의 득표율을 각각 기록했다. 최고위원에는 장동혁·김재원·인요한·김민전 후보, 청년최고위원으로는 진종오 후보가 선출됐다. [연합뉴스]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 씨는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김민기)의 건강이 지난 19일부터 조금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오후 8시 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김씨는 고인이 눈을 감기 직전 유언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갑작스럽게 떠나셨지만 3∼4개월 전부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며 "학전과 관련해선 '지금 끝내는 게 맞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선생님은 배우 설경구, 장현성 씨가 와도 '밥은 먹었냐'고 하실 분"이라며 "(평소 성격을 미뤄)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조의금과 조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미술에 몰두했던 학생이었으나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뒤 붓을 놓고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획일적인 수업 방
조 바이든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민주당 대선 후보직에서 사퇴하면서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사퇴하는 초유의 사례로 남게 됐다. 미 CNN 방송은 이날 "미국 현역 대통령이 재선 선거운동을 포기한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다"고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재선 도전에 나섰던 현직 대통령이 당내 경선에 나섰다가 포기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1952년과 1968년이 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민주당 소속 해리 S. 트루먼 당시 대통령은 1952년에 재선에 도전했으나, 지지율 하락으로 경선 초기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자 그해 3월 "나는 후보 재지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19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민주당의 린든 B.존슨도 재선에 도전했으나 트루먼 전 대통령과 비슷한 결말에 이르렀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에서 베트남전 반대 기류가 확산하며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고, 그해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경쟁자인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의 표차가 기대보다 적게 나타나자 3월 말 연설에서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바이든 대통령
15일 아침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신양분교 운동장은 고요했다. 기다란 단층 건물 오른편에 2층 건물이 증축된 것 같은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은 대충 10개쯤 되어 보였다. '꿈과 끼를 마음껏 펼치는 행복한 학교'라고 적힌 현판 아래 연구실에서 이 학교의 유일한 교사인 이정래 선생은 현재 재학생이 4학년 여학생 1명뿐이라고 말했다. 이 여학생은 원래 하추자도 신양리 출신이지만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다리로 연결된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초에 진학했다. 하지만 휴교 위기에 놓인 신양분교의 사정을 고려해 다시 분교로 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양분교 재학생 한 명이 졸업하면서 학생이 없어 휴교 위기에 처하자 이 학생이 '억지로' 옮겨와 다시 분교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이 선생은 "작년에 새로 부임한 마을 교회 목사의 딸이 전학을 왔으나 지난주에 목사가 다른 곳으로 부임하면서 그 6학년 학생이 전학을 갔다"고 설명했다. 이 학교는 원래 신양국민학교(초등학교)로 설립됐고,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1969년 재학생은 565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마다 재학생이 줄면서 1999년 추자초 분교장으로 격하됐다. 제주도의 부속 섬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섬인 추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