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5.5℃
  • 맑음강릉 20.4℃
  • 맑음서울 26.4℃
  • 맑음대전 27.3℃
  • 맑음대구 28.8℃
  • 맑음울산 26.3℃
  • 맑음광주 28.6℃
  • 맑음부산 23.8℃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1.8℃
  • 맑음강화 23.7℃
  • 맑음보은 26.6℃
  • 맑음금산 27.1℃
  • 맑음강진군 28.8℃
  • 맑음경주시 29.9℃
  • 맑음거제 28.2℃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제주4·3사건이 발발한지도 벌써 64주년. 아픈 과거는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픈 과거뿐만 이나라 아픈 몸까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4·3후유장애자들이다. 64년전 그 격랑 속에서 억울하게 갖은 고초를 당하고 몸은 망가지고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일 뿐이다.

 

대통령의 사과와 진상규명은 이뤄졌지만, 후유장애자들 중에는 어떠한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두 눈으로 생생하게 그 아픈 역사를 목격하고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국가는 인정해주지 않는다. 

 

제주4·3사건 64주년을 기념해 제주지역 사진가들로 구성된 '탐라사진가협의회'(회장 이병철)가 4·3후유장애 불인정자들의 삶을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전시는 30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한달 간이다.

 

고순호(86세/제주시 삼도동)

 

 

 

 

 

당시 애월읍 하귀리에 살았다. 1948년 2월경에 무장대 2~3명 남자들이 들어와 몸을 발로 짓밟고 죽창으로 찌르면서 마구 구타했다. 그 때가 23살이었다. 안팎거리 집도 전부 불에 타서 폭삭 내려앉은 모습까지 보고 피신했다.

 

당시 후유증으로 등뼈가 울툴불퉁 튀어나와 잠을 똑바로 누워 잘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왔다. 구타와 죽창으로 찔린 옆구리 골반부분에 농이 생겨 10년 만에야 아물었다. 밤이면 지금도 그 부위가 찢어지듯 아프다. 귀도 청력이 떨어져 보청기를 해도 전화통화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4년 진단서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 제출했지만, “진단된 병명이 자연발생적 질환으로 판단됨으로 제주4․3사건에 의한 질병으로 인정할 수 없음”이란 불인정 사유를 받았다.

 

기가 차고 통곡할 일이다. 죽창에 찔린 흔적이 자연발생적 질환이란다. 오히려 진단서를 안낸 만 못했다. 잊혀 가는 4․3 기억에 다시금 죽창을 찌른다.

 

송옥춘(86세/제주시 애월읍)

 

 

 

 

1948년 12월 19일 무장대의 습격으로 목조건물로 6개 교실이 있던 구엄국민학교가 모두 불타버린다. 이에 경찰은 이 학교의 나머지 교사들을 도두지서 등으로 연행해 상습적으로 폭행 구타한다. 당시 21살이던 송옥춘 할머니는 교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9차례에 걸쳐 도두지서로 불려가 군화발 등으로 허리를 비롯한 온몸에 구타를 당한다.

 

심지어는 아기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덜 맞을까 여겨 아기를 안고 갔는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도중에도 폭행을 당한다. 그 와중에 경찰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아기의 머리를 내리쳐 어린 딸이 품안에서 사망했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허리를 크게 다쳐 다발성 압박골절(제12흉추, 제2요추)로 약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서는 “진단된 병명이 자연발생적 질환으로 판단된다”며 “4.3에 의한 질병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4.3후유장애자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고춘자(70세/대정읍 무릉2리)

 

 

 

 

고춘자 어르신은 4․3 당시 7살의 나이였다고 한다. 4․3의 광기로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고춘자 어르신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면서 고아원에 맡겨지는 신세가 됐다.

 

고 어르신이 4․3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머리와 팔에 상처 그리고 잃어버린 시력, 어떻게 다쳤는지도 기억이 없다. 단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4․3의 광풍으로 지금의 몸의 새긴 흔적이었을 것이란 추측뿐이다. 인조 안구로 살아야 했던 험난한 삶이기에 지금도 모든 게 넉넉하지 않은 가난의 악순환이다.

 

아빠 없는 손자로 인해 가눈이 손자까지 대물림 될까 눈을 감고 싶어도 감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은 고 씨의 아버지로부터 손자들의 삶까지 관통하고 있다.

 

양일화(83세/한림읍 금악리)

 

 

 

 

 

1948년 당시 21세에 빨갱이 혐의로 제주경찰서에 끌려가 5년형을 받고 인천형무소에 압송되어 불법 감금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 의용군이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켰고 그때 무차별적으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그 후 부산수용소와 거제수용소등을 전전하면서 구타 및 고문피해를 입었다.

 

4.3사건 후 발생한 요통과 방사통으로 인해 온 몸 구석구석의 통증과 마비, 저림증상이 있으며 병원에서 “퇴행성 척추증”진단을 받고 방사선 사진상 상기 병중 소견과 함께 요통 및 하지방사통이 있어 약물 치료 및 물리치료 재활치료를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 해야 한다.

 

그러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 10차회의에서 심의한 결과 ‘진단된 병명이 자연발생적 질환으로 판단되므로 제주 4.3사건에 의한 질병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4.3후유장애자 불인정 판정을 받게 됐다.

 

양정순(90세/제주시 내도동)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양정순 어르신은 20대 중반의 가정주부였었다. 4·3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제주시 외도동에 살았었다. 어느 날, 아무런 이유 없이 지서에 끌려갔고 무자비한 폭행이 자인된 악몽 같은 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방망이 같은 걸로 전신을 구타당하는 와중에 얼굴을 여러 차례 맞았고, 그 순간부터 양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날 이후, 어르신이 살아가는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는 단절된 외로운 나날이었던 것이다.

 

몇 일 후에야 풀려났지만, 동네 주민들이 업고 나와야만 했다고 한다. 병원도 약국도 변변히 없던 시절이라 치료는 불가능했고, 한국동란이 끝나고 나서야 동문시장 인근에 병원이 다시 생겨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다녔던 병원이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후, 4·3후유장애인 인정제도가 생겼지만, 치료 받았던 당시의 의무기록을 첨부해야 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사라진 병원을 어디서 찾고, 수기에만 의존하던 당시의 의무기록은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살아남은 자식들의 도움으로 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없었던 일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라는 마음의 굴레를 해소시킬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고태명(80세/구좌읍 동복리)

 

 

 

 

 

“4·3 당시 중학교 1학년(17세)이었다.나를 데리러 온 산사람과 같이 있다가 경찰관에게 잡혔다. 산사람이 도망치자 경찰관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에 총을 쏘고는 산사람을 잡으러 갔다. 관통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뼈는 괜찮았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물고문·구타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중년이 들면서 통증이 나타났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허리와 엉덩이에는 통증과 함께 멍 자국도 생겼다. 진통제까지 먹어야 했다. 지금은 이틀에 한 번은 병원과 한의원에서 물리치료와 침치료를 받아야 통증이 겨우 사라진다. X-ray 검사에서 총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후유장애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너무 억울해 소송도 했지만 기다림에 너무 치쳤다.이제는 몸이 지친만큼 마음도 지치고 아프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