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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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훈(李存勛 : 885-926)은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으로 오대(五代) 때 당 왕조를 건국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진왕(晉王)으로 봉해져 태원(太原)에 거점을 두었다. 후량(後梁) 용덕(龍德) 3년(923)에 칭제하고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 해에 후량을 멸한다. 그 성격이 잔악하고 살인을 즐겼으며 재물을 탐했다. 동광(同光) 3년(926)에 군란이 발생해 피살당한다. 후당은 오대의 왕조 중 가장 영토가 넓었다. 후당 14년 동안 3개 성(姓) 4명의 황제가 자리를 이으며 다스렸다. 마지막 황제인 이종가(李從珂)는 934년에 정변(政變)을 통해 황제가 됐으나 937년에 거란(契丹)과 결탁한 석경당(石敬瑭)의 군대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자 자살하고 후당은 멸망한다.
이존훈은 진왕 이극용(李克用)의 아들이다. 913년 연(燕)을 멸하고 유인공(劉仁恭), 유수광(劉守光) 부자를 죽였다. 922년 남하하는 거란 군대를 쫓아낸다. 923년 위주(魏州, 현 하북 대명[大名] 북쪽)에서 황제에 즉위하는데 바로 장종이다. 같은 해 그는 후량을 멸했다. 즉위 후 군사들이 이유 없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군령을 내렸고 기율을 엄격하게 하였다. 행군할 때 명령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고 기율을 준수하지 않거나 군기를 놓치거나 상명하복을 어길 때는 일률적으로 참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세금을 감해줬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기에 후량을 멸하고 하북을 통일하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이무정(李茂貞)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신하로 삼게 되면서 황하 유역을 통일하게 된다.
925년 그는 군대를 몰아 전촉(前蜀)을 멸하고 장강 상류로 세력을 넓혔다. 문헌에는 그가 평소에 음률을 좋아하고 노래를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군할 때마다 군가를 지어 장병들에게 부르게 했다. 적진으로 돌격할 때 크게 노래를 부르며 진격하게 하면서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렇게 매 전투마다 병사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군 역사상 기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그런 풍운아가 배우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 원인을 캐보자.
이존훈은 천성적으로 배우를 좋아했다. 스스로 배우의 이름, 즉 예명을 ‘이천하(李天下)’라 지었다. 진왕 때부터 황제가 된 후까지 늘 궁정에서 배우들과 공연했다. 한 번은 그가 배우들과 공연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천하, 이천하 어디에 있노?”라는 고함이 들렸다. 경신마(敬新磨)라는 이름의 명배우가 이존훈이 큰소리로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듣고 아무 말도 없이 쫓아가 뺨을 후려 갈겼다. 요란했던 공연장 일순 조용해졌다. 누가 감히 천자의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배우들 모두가 너무 놀라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이존훈은 뺨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서있었다. 얼굴색도 노래지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차린 배우 한 명이 적막을 깨며 급히 경신마에게 “네가 감히 어떻게 천자를 때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경신마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천하를 관리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인데 어찌 두 번이나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두 명이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이냐?”고 대답했다. 그의 이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일순간 호전되었다. 이존훈도 노여움을 풀고 경신마에게 상을 내렸고.
이존훈이 연극을 좋아해 배우들의 지위를 격상시킨 것은 그리 비난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배우들을 방종하게 만들어 정치에 간여하게 하면서 정치적 부패와 정국의 혼란을 불러왔다. 후당이 건국되기 이전에부터 배우들은 주군(州郡) 관직에 있으면서 군사 운영에 오점을 남겼다. 후량을 멸한 후 총애를 받던 배우 주잡(周匝)이 후량 군대의 포로가 됐었는데 후량 교방사 진준(陳俊)의 보호 아래 목숨을 건졌다. 이존훈이 변량(汴梁, 현 하남 개봉)에 도착하자 주잡이 알현을 하면서 후량에서 겪었던 일을 눈물로 호소하고 진준을 군수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윤허를 받은 것은 당연했고.
이후 이들 배우들이 황제의 총애를 믿고 궁전을 출입하며 관리들에게 모욕을 주면서 군신들의 분노와 질투를 샀다. 이존훈은 배우 경진(景進) 등에게 눈과 귀가 돼 밖의 정보를 캐오도록 명했다. 경진이 궁전에서 보고할 때마다 좌우의 시종들을 물렸다. 경진이 실질적인 특무대가 된 것이다. 안팎의 관리들은 그들 무척 두려워해 서로 다투어 의탁하려 하였다. 당시 공겸(孔謙)과 같은 혹리조차도 경진을 만나면 공손하게 ‘八哥(원래 구관조를 가리키나 중국 고대 귀족이나 왕손들의 장난감을 말하는 것으로 말 잘하고 능력 있어 총애를 받는 사람을 상징한다)’라고 불렀다. 이존훈이 처음 낙양에 진군했을 때 당나라의 궁에 머물렀다. 이때 배우들은 토비(土匪)마냥 제멋대로 못 된 짓을 했다. 병사들의 처와 딸들은 재앙을 피해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 쓰레기 예인(藝人)들이 점차 후당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모든 배우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이존훈은 사냥을 즐겼다. 그가 사냥을 나갈 때마다 농작물들을 밟아 훼손시키니 낙양 부근 농민들의 농지는 말이 아니었다. 당시 낙양령(洛陽令)이던 하택(何澤)이 말을 막아서며 간언하였다. “폐하께서는 어찌 백성들을 살피지 않으십니까?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력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천하를 통치하려 않으시고 하필이면 가렴주구로 군량 공급에만 전념하려 하십니까? 농작물이 여물고 있는데 폐하께서 어찌 임의대로 사냥을 하시면서 흉작이 될지 풍작이 될지 관심도 두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신다면 말 앞에서 죽음을 내려 주실 것을 앙망합니다. 그럼 후세들이 폐하의 잘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존훈은 자기에게 그렇게 충성하고 있는 관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잠시 동안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하택을 창부랑중(倉部郞中)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후 이존훈은 예전처럼 사냥을 즐겼다. 한 번은 그가 중모(中牟)에서 사냥을 하면서 농작물을 망가뜨려 놨다. 중모의 현령이 말을 막아서면 백성들을 살펴주기를 간언하였다. 이존훈은 자신이 천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존귀한 몸인데 사냥조차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에 대노하여 현령을 참수하라 명령하였다. 배우 경신마는 일부러 현령을 이준훈이 타고 있는 말 앞에 꿇게 하고 짐짓 욕을 해댔다. “너 이 놈. 현령이란 자가 어찌 천자께서 사냥을 즐긴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감히 백성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할 수 있더란 말이냐! 너는 어찌하여 백성들을 굶어죽게 하지 않느냐? 이 땅을 텅텅 비워두고 천자에게 말을 타고 사냥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 이놈의 현령, 백번 죽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존훈이 볼 수 있도록 여러 배우들과 함께 현령을 참수해 백성들에게 보이는 연극을 했다. 경신마 등이 공연하는 연극을 보고는 이존훈이 가가대소하고는 중모 현령을 석방하였다.
제왕이 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취미를 방임하면 황음무도하게 되고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후량을 멸한 후 이존훈은 향락을 천하제일로 삼았다. 황태후에게 고명하고 황후에게 교령을 행하게 하고 자신은 나가 놀기 바빴으니 정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 배우들을 총애해 높은 관직에 앉혔다. 배우들 중에는 경신마와 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배우들은 사치와 음락을 즐겼고 세도를 부렸다.
926년 조재례(趙在禮)가 반란을 일으켜 업도(鄴都)를 공격했다. 이존훈은 대장 이사원(李嗣源, 부친 이극용이 양자로 들인 인물, 사위 석경당[石敬瑭]과 연합하지만 후에 석경당이 거란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후당을 멸한다)에게 반란을 평정하라 출정을 시켰으나 이사원은 변주(汴州)에서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배우 과종겸(郭從謙)은 궁 안에서 내응하여 궁성을 공격하였다. 이존훈은 반란군의 화살에 목숨을 잃으니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가 그리도 아꼈던 배우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잠깐! 이존훈은 한족이 아니다. 당나라 말기 서돌궐(西突厥) 사타(沙陀)족 출신인 이극용(李克用)이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진양(晋陽, 현 태원[太原])에 주둔해 산서지방에서 일어났던 진(晋)나라가 그 전신이다. 이극용은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진왕의 지위를 제수 받았으나 주전충(朱全忠)과의 세력다툼에서 패했다.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우자 이극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량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극용이 죽자 아들 이존욱이 진왕을 계승할 때 후량의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가 우위를 점하게 됐다. 힘을 얻은 이존욱은 923년 위주(魏州)에서 황제를 칭하면서 후당을 건국하였다.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양에 수도를 정했던 것이다. 이 또한 북쪽 이민족이 남쪽으로 이주[북족남천(北族南遷)]한 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