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두깨가 왔습니다! 찰진 찹쌀떡과 함께 냉큼 달려왔죠.”
교복을 입었다. 술집으로 향했다. 찹쌀떡을 팔아야 한다. 찹쌀떡에 모든 게 달려있다.
욕을 하는 사람도 술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인들도 잡상인 취급을 하며 쫒아냈다.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가게에 들어가 신발정리도 해주고 바쁠 땐 일손도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를 보면 즐겁다는 사람들.
“홍두깨 양반! 여기 와서 찹쌀떡 멘트 좀 시원하게 날려주고 가-”
사연의 주인공은 성우 문정호(50)씨.
지금은 '잘 나가는' 목소리로, 역시 '잘 나가고 있는' 그다. 그의 목소리는 GS홈쇼핑의 간판이자 KBS 등 방송 프로그램과 각종 행사, 광고에서 쉼 없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사연들이 애잔하다.
1990년대 어느 날. 제주에서 사우나를 운영하던 제주토박이인 그가 친구로 부터 한 이야기를 듣는다. 뭍에서 사업을 해 '대박을 터뜨렸다'는 친구의 이야기다. 혹했다. 1997년 그는 전재산을 털어 부산행을 택했다.
그는 부산에서 ‘의류 사업’에 나섰다. 잘 돼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었다. 결국 그는 얼마가지 않아 좌절을 맛 봤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다시 일어섰다. 이번엔 ‘토스트 가게’다. 하지만 시기상조였다. 너무 빨랐다. 지금은 '○○토스트' 등 토스트 가게들이 판을 치지만 그 당시에는 밥심으로 살던 때였다. 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제 아이디어가 시대를 너무 앞섰던 것 같아요. 지금 이 시대에 토스트 가게를 했으면 대박 났을텐데 말이죠.”
모든 것이 무너졌다. 가족과도 이별의 길에 들어섰다. 아내와 이혼했다. 그렇게 빈털털이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인 아들을 데리고 고시원으로 향했다.
“비좁은 고시원이었지만 어느 부자 부럽지 않은 우리 부자(父子)만의 보금자리였어요. 이 보금자리를 지키고 싶어 닥치는대로 돈을 벌었죠."
칼국수집에서 주방 일도 하고 대형마트에서 판촉일도 했던 그다.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그러다 그는 막걸리집에서 '서빙일'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문득 세월에 묻혀 있던 히든카드가 떠올랐다. 바로 ‘목소리-’.
“모슬포훈련소에서 22살(1987년)에 군복무를 하다 소리를 너무 질려 열흘정도 목소리가 안나오더군요. 그러다 목소리가 바뀌었어요. ‘득성’을 한 거에요! 멋진 목소리를 갖게 되고 전 고민에 빠졌죠. 이 목소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그러다 흐르는 시간에 제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어요. 그러다 막걸리집에서 일을 하면서 제 히든카드를 찾을 수 있었죠.”
그의 목소리는 고단한 서빙일에 재미를 더했다. “막걸리 성우가 왔습니다. 오우 오늘은 혼자오셨군요. 오늘도 시원한 막걸리 한잔 벌컥벌컥 들이켜보죠. 막걸리는 원~샷입니다. 쭉쭉!”
예상 외로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후 그의 닉네임은 '막걸리 성우’.
그런데 갑자기 기회가 다가왔다. 어느 날 그에게 한 손님이 찾아왔다. 방송국 PD였다. 그의 간드러지는 말솜씨를 들은 PD는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렇게 둘은 친해졌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가 살던 고시원에 그 PD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매일 오다가다 만났다. 그렇게 그와 PD와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그를 형으로 대해주던 PD가 어느 날 제안을 해왔다. “한번 성우 오디션을 봐봐. 형이라면 할 수 있어!”
그는 PD의 뒤를 따라 여의도 한 방송국에 들어섰다. 난생 처음 녹음실에 들어갔다. 대본을 들고 읽어 내려갔다. 긴장한 탓인지 발음은 꼬이고 목소리는 떨리고 ... 그렇게 첫 녹음을 마쳤다.
냉정했다. 현실이었다.
버스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마흔 다섯에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난 아닌가 보다"란 마음에 좌절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PD 친구가 한마디를 남겼다. “성우 공부 해라”
좌절도 잠시, 그는 성우 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낮에는 성우 공부, 밤에는 찹쌀떡 장사를 하면서 학원비와 내공을 쌓아갔다.
“찹쌀떡 장사요? 길 가다가 우연히 찹쌀떡 파시는 분을 보고 시작하게 됐어요. 말도 마세요. 처음에는 얼마나 창피했는지... 첫날 ‘찹쌀~떡’ 이 멘트를 입밖으로 꺼내기까지 2시간이 걸렸어요. 술집에 들어가기까진 사흘이나 걸렸네요.”
학원비 30만원을 모아 성우학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학원에서도 냉랭했다. 학원은 그의 나이를 지적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학원을 찾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학원비가 든 봉투와 수박 한 통.
그렇게 중·고생, 20대 동생들이 가득한 곳에서 성우 공부를 시작했다. 그저 하라는 대로 닥치고 따라했다.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파란색 쓰레기 통을 뒤집어 쓰고 연습도 했다. 찹쌀떡을 파는 시간은 그에게 주어진 ‘목소리 뽐내기’ 시간이 됐다.
그는 괜스레 망설여졌다. 그의 힘든 생활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겁났다. 하지만 ‘성우’의 꿈이 그를 밀쳤다. 방송 출연이 그가 내린 결론.
신용불량에 이혼에, 혼자 아들을 데리고 고시원에 사는 모습이 전국에 공개됐다. 할 말이 없었다.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악플'에도 시달렸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방송이 나가고 한달 남짓 지나고 여기저기서 녹음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처음 손을 내민 곳은 GS홈쇼핑. 그렇게 그와 GS홈쇼핑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에겐 하루하루가 가슴 벅찼다. 힘들게 열심히 노력한 꿈이 이뤄졌다. 그러나 동료 성우들 사이에서는 눈총을 샀다. 게다가 마음과는 달리 발음은 꼬여가고 대본 지문을 읽는 것도 실수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생방송이라는 부담감이었다.
그렇게 2년을 GS홈쇼핑 성우생활을 하다 결국 2012년에 그는 말 그대로 짤렸다.
그러나 그에겐 더이상 좌절이란 없었다. 쓰레기통을 뒤집어 쓰고 발음 연습하기 바빴다. 연습시간이 빠듯해 직장 생활은 할 수 없었다. 저녁에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낮에는 연습에 열중했다.
1년 후 그는 다시 GS홈쇼핑을 찾았다. 그는 기회를 한번만 더 달라고 애원했다. 회사는 그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GS홈쇼핑의 전속 성우로 2016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인터뷰 요청에 뒤늦게 연락이 닿은 13일 밤 11시 30분에도 그는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홈쇼핑은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시간에 생방송으로 이뤄지는 특성을 가졌기에 그는 밤·낮 없이 스탠바이 중이다.
GS홈쇼핑의 ‘성우’ 타이틀을 되찾은 그 해, 그에게는 사랑도 찾아왔다. 치킨집에서 일을 하다 그녀를 만났고 평생을 약속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감싸고 그와 ‘하나’를 이뤘다.
그는 공채 성우가 아니면서도 국내 최초로 ‘성우’라는 타이틀을 달고 방송에서 종횡무진 중이다. 뿐만 아니라 성우와 음악감독 등 5인이 모여 ‘KOREA CREATER TV’를 만들어 새로운 분야도 개척하고 있다. 광고 패러디와 여행 소개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가고 있다.
힘들었던 도전 속에서 결국 꿈을 실현시킨 그. 그는 그 도전이 “힘들지 않았다’고 평한다. 그에게 인생은 ‘톰소여의 모험’ 일뿐.
“모험같은 인생이요? 배경은 없어요. 다만 제가 제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죠. 제주는 ‘소년의 꿈’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신비로운 곳이죠.”
“모슬포훈련소에서 얻은 ‘득성’과 개구쟁이가 살던 함덕, 그리고 제일 처음 마이크를 잡고 만물 트럭에서 목소리를 냈던 12살 소년이 있던 곳, 그 곳들은 모두 제주였어요. 제주가 ‘소년의 꿈’을 이루는 곳이라고 말한 이유, 이제 아시겠죠?”
고향 제주에 남다름이 있는 그. 예순이 되는 해 다시 제주로 돌아와 아직 이루지 못한 소년의 꿈들을 이루겠다고 한다.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고 말겠노라”는 쉰살의 개구쟁이의 말.
“인생이란 모험은 예측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도 열심히 살아야죠! 인생을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여러 모험을 겪어본 선배로서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열심히 사는 개구쟁이가 희망이 되줄게요.” [제이누리=박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