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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지사, 관리소홀 지적…"다른 곳으로 이전 건립하라"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의 위치를 옮길 것을 지시했다.

 

우근민 도지사는 22일 오전 간부들과 티타임 자리에서 “재선충 방제를 위한 소나무 고사목 제거가 자원봉사자, 군인, 경찰, 공무원 등 하루 1000여명이 참여해 계획대로 추진되고 있다”며 “내년 4월까지 고사목 전량 제거에 총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고 지시했다.

 

특히 “삼성혈, 산천단곰솔, 문화재 지구 내 소나무 재선충 방제를 위해 주변 고사목 제거, 예방주사 등 모든 방안을 동원해 재선충 방제에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라”고 강조했다.

 

우 지사는 이어 “1970년도 서귀포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침몰해 3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위령탑이 세워졌으나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유족들이 슬픔을 달래고 참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며 “서귀포시장은 적절한 부지를 물색해 위령탑을 이전·건립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우 지사는 지역의 역사·문화 정립과 홍보에도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는 “항파두리, 추사 김정희 선생, 모슬포 공군 격납고, 제주 4·3 등 제주도 역사·문화를 도내 역사 선생님, 관련 전문가들로 역사·문화 자문단을 구성해 지역의 역사·문화를 올바르게 정립하라”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도민·관광객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 나갈 수 있도록 관련 부서에서는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제이누리=김영하 기자]

 

 

※남영호(南榮號) 침몰 사건은 ☞ 지난 1970년 12월15일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 간 정기여색선인 남영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남영호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정원 302명이 승선 가능한 철선이다. 1968년 3월5일 서귀포~성산포~부산 간 노선을 첫 취항했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남영호는 1970년 12월14일 오후 5시쯤 서귀항에서 승객 210명과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싣고 출항했다. 또 성산항에서 승객 121명과 화물을 더 싣고 밤 8시10분쯤 부산을 향해 나섰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하창(荷倉)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아 실었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쌓아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쯤 기울었다. 만재흘수선(滿載吃水線)이 물속에 잠겨 복원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성산항에 도착하자 다시 화물을 더 실었던 것이다.

 

사고는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새벽 1시20분쯤 전라북도 상일도 동남 28마일 해상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 우현 선체에 몰아쳤다. 때문에 갑판 위에 쌓아 놓은 감귤 상자가 갑판 좌현측으로 허물어졌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지면서 선체가 기울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영호는 이에 정상 속도인 15마일을 10마일로 줄여 계속 항진하려 했으나, 결국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망자는 319명이었고 생존자는 12명에 불과했다.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됐다. 이 사고로 임검 경찰관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고 서귀포경찰서장이 입건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이 조난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이 남영호는 정원이 29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등 331명을 태워 정원보다 41명이나 초과했다. 게다가 남영호가 출항하기 전날까지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제주 지역에 묶여 있던 승객과 감귤 등 화물 400톤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는 1차적으로 하중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당시 항해 10일 전에 서귀포~부산 항로에 경험이 부족한 을종 2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 면허를 가진 자가 선장임무를 맡은 것도 참사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또 낙후된 선박 시설과 기관, 무선시설도 침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아울러 감독기관의 감독소홀도 참사를 부른 요인으로 보고 있다.

 

사고 뒤 서귀포항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이 세워졌고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서귀포시 영천동)으로 옮겨졌다. [디지털 서귀포 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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