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일본헌법 9조 노벨평화상 추천 한국위원회’가 ‘9조회’와 다카노스 나오미(鷹單直美·38)씨를 2015년도 노벨평화상 공동후보로 추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씨를 포함한 일본 원로 지식인 9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9조회’는 일본 우익의 헌법 개정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 모임이다. 다카노스 나오미는 2013년 8월 ‘헌법 9조 노벨평화상 실행위원회’를 설립하여 ‘일본헌법 9조’를 지켜온 일본국민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해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여온 두 아이의 어머니다. 다카노스 나오미씨는 2013년 1월 노벨위원회에 ‘일본헌법 9조’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에서 '노벨평화상 수상 대상은 개인이나 단체로 한정돼 있고 헌법과 같이 추상적인 것은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일본헌법 9조’를 지켜온 일본 국민을 후보로 추천하였다. 다카노스 나오미씨는 ‘일본헌법 9조&rsqu
제주에는 새해가 세 번 있다. 올해는 1월 1일 신정, 2월 4일 입춘, 2월 19일 설날이다. 일년을 15일 단위로 나누어 표시한 24절기의 첫날인 입춘을 제주사람들은 새해가 아니라 새철 드는 날이라 부른다. 봄 춘(春)이라고 쓰나 이 날의 날씨는 대개 춥다. 칼바람에 폭설까지 동반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도 있다. 입춘이 중국의 화북 지방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탐라국 입춘굿 놀이. [제이누리 DB] 우리나라에서 지금의 입춘은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축원의 글을 써 대문에 붙이는 정도로 가볍게 지난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인삿말이다. 입춘의 기원문(입춘첩)은 꼭 입춘대길 뿐만 아니라 각자 맘에 드는 구절을 써 내걸면 된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에게 입춘맞이는 아직도 각별하다. 입춘 사흘전 까지 약 일주일 동안 섬 전체가 들썩인다. 열에 한두 집이 이사를 하는, 세계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사 뿐만 아니라 헌 데 고치고 묵은 것은 버린다. 또 새 것을 만들거나 들이는 이 시기를 신구간(新舊間)이라 하는데 묵은 해와 새해의 교체기라는 뜻이다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78호 우리나라 국보(國寶) 및 보물 등의 일련번호가 폐지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국보를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총 317개의 국보가 있다. 1호가 숭례문이다. 국보 번호 폐지 논의는 국보 1호에 숭례문이 적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1934년 8월 우리나라 보물(국보) 153건을 지정할 때 숭례문을 1호로 했다. 당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울 입성에 사용한 문을 기념하기 위한 속셈이 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 때문에 1996년 이후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1호 교체가 논의됐지만 “혼란을 부른다”는 문화재위원회 반대로 무산됐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자 다시 1호 교체 주장이 대두했다. 지난해 숭례문 부실 복구 사태까지 겹치면서 번호 교체나 폐지 등 개선 작업은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83호 “일제가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해 1호로 정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나라에선 이에 맞서 ‘1호 숭례문’을 지킬 논리도 명분도 없
▲ 일터인 바다작업장으로 가는 해녀행렬. [제이누리DB] 아버지는 동네에서 힘이 세기로 소문난 장정이었다.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힘에 부치면 아버지를 찾아서 ‘힘을 보태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단다. 게다가 만능 일꾼이라서 집을 짓는 건축이나 밭담을 다는 석수일, 밭을 가는 쟁기질은 물론 갈치나 자리를 잡는 어부 일도 능숙하였다. 우리가 사는 집도 아버지가 지으셨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동트는 새벽에 밭갈이를 시작하면 해가 기우는 어스름까지 ‘이랴 이럇’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소를 어루만지면서 친구에게 하듯이 ‘속았다(수고했다)’며 다독였다. 남이 이틀 걸려 하는 일을 아버지는 하루 만에 해치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할 때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눈을 맞추면 손발이 척척 돌아가는 커플이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도 산남에서 1등 가는 보리, 유채, 고구마를 거둬냈다. 그처럼 아버지가 차별적으로 농사일의 경쟁력이 높았던 데는 남다른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밥에만 식구들 몰래 참기름을 듬뿍 뿌려놓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고래(古來
‘재의냐 추경이냐 (... 이것이 문제로다)’ 기자가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면 십중팔구는 품질이 나쁜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 ‘소유냐 존재냐’의 구도 위에 현재의 사안(事案)을 덧씌워서 핵심 쟁점이 마치 존엄의 우열을 따지기 어려운 두 개의 지향인 것처럼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어느 편의 오류도 정공할 배짱은 없으니까 대중의 명확한 판단을 흐리게 해서라도 미디어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싶은 경우일 것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말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같으면 그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런 대중의 급소를 노린다. 제주자치도가 의회의 예산 삭감으로 파행을 겪고 있다. 국비보조사업의 도비 부담금은 물론, 필수경비인 공공운영비를 망라한 무차별 삭감으로 도정이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원희룡 도지사는 재의를 요구하겠다고 하고, 구성지 의장은 추경안을 제출하라고 공을 미루는데, 애꿎은 도민은 맞받아칠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도내에 십 수개가 넘는 언론은 공을 치고받는 정선아리랑만 제주판으로 표절하여 중계할 뿐, 둘 중 어느 한쪽의 반칙은 지적을 못한다. 무섭거나 재미있거나 모르거나 성가시거나..
▲ 정경호 전 제주도의회 의원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지 못한 어느 집에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어찌어찌해서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짱’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불안했다. 계속해서 오래오래 ‘짱’이 되고 싶은데 사정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짱’으로 여기게 한 것은 ‘말(言) 펀치(Punch)' 하나인데, 이게 언제 ‘뻥’이라는 것이 들통 날지 모를 일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짱’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말펀치’ 이외에 동네아이들의 환심을 살 그 무엇이 필요했다. 아이가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그 무엇은 동네 아이들에게 피자 같은 맛있는 군것질을 사주거나, 스케이트장 입장료를 호기롭게 대신 내주거나, 필요하다면 15금(禁)정도의 동영상 유에스비(USB)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에게는 그런 것들을 실행할 만큼의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래오래 ‘짱’의 자리를 누리려는 이 아이의 철부지 욕심은 급
올해로 93세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지금이야 내가 ‘모신다’고 할 수 있지만, 아흔이 되기 전까진 사실상 어머니가 우리를 돌보셨다. 어머닌 여느 제주도 할머니들처럼 과수원의 김을 매고, 마당을 가꾸고, 길가의 잡초도 뽑으셨다. 집안의 모든 식물들은 어머니 손길로 사철 꽃을 피워냈고, 물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보말까지 잡아오셨다. 가끔은 시장에선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산 오분작을 잡으실 때도 있었다. "어떵 이 귀헌 것들이 나 눈에 들려신고 이(어떻게 이 귀한 것들이 내 눈에 보였을까)? 어떵사 지꺼진지, 니 주잰 솔째기 곱정 놔뒀져(얼마나 기쁘던지, 너 주려고 살짝 숨겨 두었다). 아이덜 생각허지 말앙 싱싱헐 때 어서 먹어불라(아이들 생각하지 말고 싱싱할 때 빨리 먹어버려라). 닌 두린 때부터 안질이 안 조아부난 눈을 애껴사 헌다(넌 어려서부터 눈이 안 좋았으니 눈을 아껴야 한다)" 어머니는 50년간 대포 바다에서 물질을 하신 상군 잠수다. ‘숨비질 배왕 놈 주지 아녀’라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해녀 생애사 조사보고서’에도 소개가 되었으니, 동네의 대표 해녀인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0월 영국의 일간지 타임(Times)은 사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하였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바라는 것이 더 이성적일 것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 사설이 게재되었을 시기에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최빈국 대열에 속할 정도로 매우 나빴다. 이후 1955년 한국을 찾은 ‘유엔한국위원회’의 메논(Menon)도 한국경제의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평했다. 결코 과도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한국 상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적절하고도 합당한 평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국민들은 기적이라고 칭할 만한 놀라운 경제성장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 영국의 시사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계열사인 인텔
▲ 이순신의 대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 이순신 장군의 집무실이자 회의실이던 운주당(運籌堂)은 한산도에 복원되어 있다. 운주는 '사기(史記)' 의 운주유악(運籌帷幄)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짠다는 뜻이다. 운주당을 지켜본 유성룡은 항상 열린 소통의 공간이었다고 썼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투를 연구했는데,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고 하여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모든 병사들이 군대에 관련된 일을 잘 알게 됐다. 또한 이순신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했으므로 전투에서 패하는 적이 없었다." 이순신이 관직을 박탈당하자 원균이 이 운주당을 꿰어차 앉았다. 같은 장소라도 누가 운용하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유성룡이 회고한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이중 울타리로 운주당의 안팎을 막아버렸다.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먹고서 날마다 술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을
▲ 조선 말기 의병. 1907년 일본군이 병력을 증강하고 의병부대에 대한 무력진압에 나선 가운데 영국 언론인 멕켄지는 의병활동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러.일 전쟁 때도 [Daily Mail]지 특파원으로 종군취재를 해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사진이다. 갑오년에 이은 을미년도 역사상 간지(干支)로 기억되는 해다. 120년 전인 1895년 민비(후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고(을미사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내려지고(을미개혁), 이 두 사건 때문에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바로 전해인 갑오년과 연장선에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갑오년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이어 한반도가 청일전쟁터가 됐고 갑오경장이 행해졌다. 이후 간지로 기억되는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 기미독립운동(1919) 등이 일어났지만 120년 전 을미년처럼 3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 ‘을미’ 이름이 붙어 불린 적은 없다. 1895년 초 일본은 독(毒)이 올라 있었다. 청일전쟁 승리에 따른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둥 반도를 차지했으나 러시아 주동으로 독일·프랑스가 소위 ‘3국 간섭&
▲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한라산에 눈이 쌓이면 백두산의 얼음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이들이 있다. 바로 동토(凍土)의 땅을 탈출해서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에 정착한 190여명의 북한이탈 주민들이다. 북한의 겨울은 만물이 얼어붙는 시기라 초근목피는커녕 찬물도 구하기가 어렵다. 수도관이 꽁꽁 얼고 강조차 얼어붙어 얼음을 녹이려 해도 땔감이 없다. 평양을 제외하곤 전기도 연탄도 끊긴다. 물과 불이 없는 집에 쌀이 있을 리 만무다. 겨울 추위에 배조차 곯으니 삶의 서러움과 쓰라림이 뼛속에 사무친다. 생명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저주로 느껴지는 곳, 저 북녘 땅처럼 냉혹한 삶터가 지상에 또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먹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진다. 바로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인류 보편적 가치, 즉 인권(Human Rights)이다. 인권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리이므로 국가나 국제사회가 합의하고 승인함으로써 보장되고 발현되어진다. 이 때문에 지난 18일 유엔총회는 북한인권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토록 권고한 ‘북한인권 결의안’을 흔쾌히 통과시켰다. 이
전 세계적인 석유생산량 증가와 수요 감소, 석유시장 주도권 쟁탈전 등이 얽혀서 유가는 당분간 하락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석유생산량을 조절하여 유가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온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2014년 11월 27일 일평균 300만배럴 생산 유지를 선포한 이래 유가는 끝없는 추락을 하고 있다. 압둘라 알-바드리 OPEC 사무총장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OPEC이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12월 16일 배럴당 50달러대까지 유가는 하락하고 있는데 텍사스산 원유(WTI)가 배럴당 55.91달러까지 하락하였다. 국제유가 하락은 전반적으로 글로벌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는 국가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필리핀과 같은 섬나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이점을 준다. 일본이나 제주도 같은 섬 지역은 모두 유가 하락의 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곤경에 빠진 아베노믹스에 유가하락은 한 줄기 무더운 여름날의 단비 같을 것이다. 세상사라는 것이 누군가 이익을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심각하게 큰 피해를 보는 국가 중에 대표적인 국가가 러시아일 것이다. 러시아는 유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