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 델 아구아, 이 이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온다. 2013년 3월 6일, 세계적인 건축가의 유작인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가 강제 철거되었다. 철거가 시작 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온 몸으로라도 막아보겠다는 급한 마음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현장은 처참했다. 우리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카사 델 아구아는 거대한 중장비에 의해 이미 앙상한 철골을 드러내고 희뿌연 먼지바람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건축가 승효상은 제주에 직접 내려와 철거반대토론회에서“ ''반달리즘(다른 문화나 종교 예술 등에 대한 무지로 파괴하는 행위)이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다. 카사 델 아구아는 제주도의 보물만이 아닌 세계적인 보물이 될 것이다.”라고하며 “카사 델 아구아를 철거할 권한이 우리에겐 없다 ”고 강하게 말했지만 행정은 끝내 ‘규정대로’ 를 고집했다.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카사 델 아구아의 철거현장은 포털사이트 검색 1순위를 차지하며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전 세계로 전해졌다. 당장 눈앞에 이익이 오는 자본의 탐욕과 문화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가 빚어진 발상이었다. 중장비의
▲ 현재 방송중인 KBS TV드라마 '징비록'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밀어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 다소나마 풀린다…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려라. 창공에 뜬 학이 이 골의 신선이라. 달 아래 행여 그 신선을 만나지 않으셨는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이 20대에 지은 성산별곡 일부다.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알고 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다. TV드라마 ‘징비록’에 정철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유성룡(1542~1607)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통상 인식하고 있는 다정다감한 시인이 알고 보니 ‘표독한’ 정치인이었다. 지난 1일 방송분에선 정철이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상소가 올라와 선조(1552~1608,1567년 즉위)가 좌의정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의 일이다. 정철의 나이 56세. ▲ 송강 정철(1536~1593) 정철이 눈치 없이 40세의 젊은 선조에게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진언을 했다가 밉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철은 광해군(157
▲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자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기 위해 봉숭아꽃과 잎을 작은 절구통에 모아 찧고 있다. 긴장할 수 있기에 행복한 우리의 아이들 ‘누군가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라고 내게 말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측가능한 길의 바깥으로 내려서야만,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져야만, 그리고 세상을 기회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으로 바라보아야만 진정 멋진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티나 실리그) 아이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가정이든 사회든 아이로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아이를 살리는 일은 가정도 사회도 살리는 일입니다. 아이의 목에 도금 가짜 금은동메달 대신 순금일 수 있을 희망의 목걸이를 걸어줘야 합니다. 아이의 가슴에 엉터리 스티커 대신 희망의 배지를 달아줘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제대로 멋지게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우리 아이들 앞에서 온전하고도 멋진 부모이길 바라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그렇게도 사랑한다면서 소홀하진 않았나? 지나쳐버렸다지만 과거라는 것은 회상하기에 언제나 현재입니다. 나의 추억은 대체로 ‘아픔’으로 떠오
▲ 강병철 논설위원 제주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점점 본래의 색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날마다 목격한다. 해녀문화와 함께 제주 특유의 문화중의 하나인 이어도문화가 제주도민들의 기억 속에서 상실되어가고 있다. 오죽하면 제주의 노인들에게 물어봤더니 이어도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서 이어도문화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겠는가! 제주 노인들의 ‘기억창고’에서 이어도라는 담론이 보편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고 제주 무가(巫歌)는 물론 제주 속담사전에서도 이어도에 대한 내용이 없어 이어도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어도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맷돌이 중요한 생활도구였다. 사람들이 곡식을 맷돌에 넣고 돌리면서 맷돌노래를 불렀다. 이 맷돌 노래 중에 이어도 노래가 있다. ‘이어도문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에서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이 맷돌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 날에는 이처럼 동영상에서나 맷돌 노래를 감상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들었던 노래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어도와 친숙하였고 이어도는 생활양식의
▲ 강민수 논설위원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는 원도심 뿐만 아니라 제주 역사를 아우르는 중심지다. 국가에서 각각 보물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러 볼 가치가 충분한데도 외면 받고 있다. 여기서 그 이유를 다 파헤칠 수는 없다. 다만 외국인들에게 좀 불친절한 것은 그럴듯한 영어 홈페이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브로슈어와 현장의 영어 안내문에 오류가 꽤 많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몇 가지만 추려 보겠다. 우선 관덕정 앞의 영문 안내판에는 the local officer(지방공무원) 신숙청의 지도 아래 관덕정이 세워졌다고 다소 엉뚱하게 써놓았다. 어떻게 일개 지방공무원이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자 보물로 지정될 정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한글에 그의 직위는 안무사(按撫使)로 되어 있는데, 왕의 ‘특사’로 지금의 제주도지사인 목사에 부임했던 것이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수한 여건 때문에 왕이 직접 제주목사를 임명했으며 행정적인 업무 외에 군사적인 책임도 겸하게 하여 만호, 안무사, 병마수군절제사, 방어사, 절제사 같은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겼다. 따라서 the local officer는 행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영화 국제시장이 2월 들어 누적 관객 수 13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 통계에 의하면 이는 역대 휴먼드라마 장르 중 흥행 1위의 기록이란다. 영화평론가들이 10점 만점에 5점을 부여한 ‘보통’ 영화가 요새 말로 대박을 친 셈이다. 그 덕택에 영화 속에서 영자 역을 한 여주인공이 어린이재단에 기부금을 낸단다. 영화 관람객 수에 비례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다. 이처럼 국제시장이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람객들의 반응에 관한 자료를 짚어보면, 전문가들이 ‘신파적 스토리’라고 비평하는 영화의 흐름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소통되기 때문이란다. 6.25의 흥남철수작전으로 비쳐지는 국가의 무능함, 전쟁과 폐허에서 전개되는 가난의 뼈저림, 생존을 위해 독일의 탄광과 베트남 전선에서 사투하는 개인의 몸부림, 이산가족을 찾아서 분단의 비극을 부둥켜안는 범국민적 눈물 등이,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사회의 아픔으로 공감되어서다. 사실, 오늘도 변함없이 국가는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1611년 3월 어느 날 보물선이 제주 바다에 나타났다. 독립왕국이던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이 일본에 먹힌 후였다. 24개월 전 유구국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왕과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갔다. 제주에 나타난 보물선에는 유구국 왕자가 타고 있었다. 기록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며보면 다음과 같다. ▲ 해상왕국 유구의 무역을 주도했던 아지 계층. 1879년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옛날 어느 큰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의 산지 바닷가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높은 이가 관가에 불려 갔을 때 사또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옷을 잘 차려입은 젊은이가 대답했다. “저는 유구국의 왕자입니다.” 사또는 먼 곳에 있는 왕자가 이곳까지 온 게 궁금했다. 왕자가 말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왕이신 제 아버지를 잡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슬퍼서 보물을 갖고 일본에 들어가 왕을 풀어 달라고 하려 배를 타고 떠났다가 이 곳으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사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1597년 음력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은 한 달여 간 심문을 받던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경남 초계(합천군)에 있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8월 2일까지 네달 간 백의종군했다. 백의종군은 군인이 계급 없는 백의(白衣) 신분으로, 군대 일에 종사(從軍)하는 걸 말한다. 권율의 군사자문 역할을 한 걸로 보면 된다. 석방 첫날부터 술을 들고 인사 오는 지인이 많았다. 이순신은 연일 취했다. 난중일기에 “정(情)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몹시 취했다…술병째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줬다”고 적었다. 낮술도 했다. “일찍 길을 떠나 오산에 이르니 술을 준비해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났다.” 원수 같은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제 역할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백의종군길(路)이 지난달 말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의해 고증됐다. 한양을 떠나 충남·전남북·경남에 이르는 640㎞, 긴 여정이다. 경남(161㎞), 전남(123㎞) 구간은 3~6년
▲ 강민수 논설위원 사흘에 걸친 탐라국입춘굿놀이가 끝나니 제주목관아 일대가 다시 조용해졌다. 장수 수(帥)라고 적힌 사령관의 황색 깃발이 저 홀로 찬바람에 펄럭일 뿐이다. “과거 제주의 중심이던 제주목관아가 복원됐지만 운영방향을 잃으면서 외국인 관광객 투어코스에서도 외면 받는 ‘죽은 문화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11월초 제주의 어느 신문은 이곳이 도정감사에 오른 일을 이렇게 보도했다. 행사도 프로그램도 마땅한 게 없고, 있다고 해도 몇 년째 똑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운영 적자폭은 매년 늘었다. 제주목관아는 조선시대 목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지금의 도청과 같은 곳으로 1993년 복원되면서 국가사적에 지정됐다. 탐라시대부터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유서 깊은 원도심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나 발길은 뜸하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은 왜 이곳을 외면할까? 복원된 유적지가 대개 그렇듯이 박제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입구에 설치된 안내문부터 읽어보기가 벅차다.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전문가들이나 아는 고고학과 서지학을 동원하며 이 '장대한' 복원공사를 어떻게 성사시켰는지에 대한
▲ 병자호란이 시대적 배경인 영화 <최종별기 활>의 한 장면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後金)의 태종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황제로 칭한다. 그는 1636년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조선에 보내 군신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사로잡힌 조선의 왕 인조는 용골대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용골대는 서울을 떠나면서 객사의 벽 위에 ‘청(靑)’자 한 글자를 써놓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청(靑)자는 십(十)+이월(二月)이 되며 이것은 12월 압록강에 얼음이 얼 때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고한 것이며 전쟁 시기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날씨조건에 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의 병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추위에 적응이 잘 된 군사들이었기에 이런 해석이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이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한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본래 이들은 만주 북부와 몽골 지방에 살던 기마 민족으로 겨울에는 -40℃까지 떨어지는 혹한과 살을 에는
제주성은 내성-탱자성-해자-외성의 철벽 구조였다 유배인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 애달픈 사랑만 한 것이 아니라 1811년 목사로 부임해 와서는 제주성의 정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특히 그는 성 밖의 이중성, 즉 외성(外城)을 새로 둘렀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비변사등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의아한 일이다. 조정철은 왕에게 "탐라의 내성(內城)과 바깥 지성(枳城 : 탱자성)은 예로부터 없었던 성의 체제이며 천험(天險)의 요지"였다며 상당히 훼손된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린다. 본성을 내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성 밖에 성을 한 바퀴 더 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왕의 허락을 구한다. "성첩(城堞)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 두고 바깥에 성을 쌓아 그 사이에 12개의 과실 정원을 설치하여 모두 귤과 유자를 심고 다시 성과 정원을 주관할 사람을 두어 수리 보호하고 감수하는 일을 맡기게 하소서." ▲ 100여 년 전의 지적도에서 확인되는 내성, 탱자성, 해자, 외성 성첩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병을 쏘거나 방어하는 곳이다. 기존
기와 한 장이 나를 조각 맞추기 게임으로 몰아넣었다. 원도심 답사가 심각한 취미로 자리 잡은 지난 가을 어느 날이었다. 대개 혼자 발품을 팔다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만 같이 다녔는데, 그 날의 동행은 한옥 전문 대목장인 친구 성문순이었다. 조선시대 유사시 총사령관의 작전본부였던 터에 축대는 물론 기왓장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잘 만들어진 초석과 기둥도 방치되어 있었다. 그날의 수확은 수성소임신이월(守城所壬申二月)이라 새겨진 기와를 찾아낸 것이다. 제주성을 지키는 어떤 건축물이 임신년 이월에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 수성소임신이월이라고 새겨진 기와 사진을 본 윤봉택 선생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말 좋은 자료를 발굴했다"며 "제주성에 수성소가 있었다니 흥분된다. 대부분 수성소는 큰 성에만 있는데, 이 자료로 인하여 제주성에도 수성소가 있었음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 말했다. 매장문화재 발굴 신고를 하라는 권고를 잠시 미루고 추가답사와 관련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이와 비슷한 발굴은 이미 두 번 있었지만 조각이 나서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었다. 제주목관아 터 발굴 현장에서 성소임신이월(城所壬申二月)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