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서귀포시 대정읍 노을 해안은 남방큰돌고래가 매일 오전 10~12시, 오후 3~5시쯤 자주 나타난다는 곳이다. 얼마 전부터 ‘남방큰돌고래 멍’ 때리는 힐링 성지로 이름나 있다. 매일 해수면 위로 나오기만 기다리는 관광객들이나 지역주민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갯바위 끝까지 가서 망원경으로 바다를 관찰하거나 드론을 띄우는 열성 팬도 있다. 바다 날씨가 흐려 볼 수 없는 날도 있지만, 날이 개고 바다 날씨가 좋아지면 틀림없이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틈만 나면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 지역주민도 있다. 와서 한 시간 정도 ‘돌고래 멍’하며 자연치유하고 간다고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가까운 바다에 남방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이 방송됐을 때 외국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좀비'가 아니었다. 바로 한국의 전통 모자 '갓'이었다. 해외 시청자들은 당시 드라마 킹덤에 대해 "좀비와 멋진 모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갓'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과거에도 개항 후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다채로운 갓에 매료돼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갓'을 비롯한 '망건', '탕건' 등 다양한 관모(冠帽,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를 만들었던 주산지가 '제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관모 공예의 명맥이 유일하게 제주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 잊혀가는 관모 전통 잇는 사람들 순우리말인 '갓'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모자다. 선비들은 상투를 틀고 이마에 망건(網巾)을 두른 뒤 그 위에 탕건(宕巾)을 쓰고, 다시 그 위에 갓을 썼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완벽하게 두를 때까지 수차례 풀었다 둘렀다를 반복할 정도로 의관을 정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이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한라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1901년 10월, 드디어 겐테가 제주로 왔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서다. 1900년 가을 의화단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파견되어 북청사변 현장을 돌아본 후, 다음 해 조선을 답사했다. 겐테는 당시 황실 고문이던 미국인 샌즈의 소개로 제물포에서 현익호를 타고 3일간 항해 끝에 제주에 도착했다. 그의 손엔 일종의 ‘출입 허가증’인 고종황제의 칙서(勅書)가 쥐어져 있었다. 제주 목사(牧使) 이재호는 “외국인이 한라산을 오른다면 재앙이 생길지도 모르며 민란(民亂)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들이 외국인을 싫어하는 상황에서 한라산을 오르는 도중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른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갓 전시관'. 조선시대 양반들이 외출할 때 일상적으로 썼던 모자인 '갓'을 테마로 한 전시관이 제주에 있다는 것에 관광객들은 의아해하곤 한다. 다양한 박물관들이 즐비해 제주를 '박물관 천국'이라 부르곤 하지만, '갓 전시관'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경복궁이나 한국민속촌 인근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갓 전시관이 제주에 들어선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외할머니 고(故) 강군일(1883∼1952년) 선생, 어머니 고(故) 고정생(1907∼1992)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장순자(84)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그리고 장순자 선생의 딸 양금미(48) 이수자 등 4대(代)째 갓을 만드는 전통을 이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딸에게로…4대째 전통 이어가 "고정생 할망이 일등이우다! 그 할망밖에 잘하는 사람이 어서….(고정생 할머니가 일등이예요. 그 할머니밖에 잘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서울에서 온 전문가가 제주시 삼양 일대 5개 마을을 돌며 양태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묻고 다니자 뭇사람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정상에 오르면 능히,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높다 하여 한라산(漢拏山)이라 했다. 백록담은 태고의 신비를 머금고 있다.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진산(鎭山)으로 신성시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한반도로 몰아치는 태풍을 온몸으로 막아주는 산이다. 그러기에 언젠가는 꼭 오르고야 말겠다는 도전정신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실제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구나, 아무나가 아니라 준비하고 선택된 사람들만 그 환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 왔던 시인 묵객들과 관리들은 한라산을 등반하고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하였다.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은 한라산 등반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거나 돌이나 바위에 새겨 마애석각(
올 초 개봉한 영화 '파묘'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상반기 극장가를 휩쓸었다. 무당 '화림' 역을 맡은 김고은이 서슬 퍼런 식칼을 든 채 신들린 듯 춤을 추며 굿을 하는 장면이 관객들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등 영화의 흥행 뒤에는 무속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이른바 오컬트(occult) 장르물인 '파묘' 이후 무속 신앙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무속 신앙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제주. 독특하게도 제주에선 다른 지역과 달리 무당을 '심방'이라 부르며 종교와 문화유산의 영역에서 보호한다. 제주에선 왜 무당을 심방이라 하는 걸까. ◇ "신령을 만나는 이, 신의 성방"…심방의 의미는? "난 무당이라 불리는 게 싫어. 심방님 또는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제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러 심방과 인터뷰하다 보면 '무당'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무속 신앙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제주에선 여전히 종교와 문화 영역에서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심방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무당을 일컫는 명칭이다. 유독 제주에서 달리 부르는 '심방'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심방
제주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들의 무구(巫具)가 최근 연이어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기증됐다. 지난 2022년 12월 별세한 고(故) 고행선 심방의 무구자료 80점과 지병으로 인해 무업활동을 중단한 강인순 심방의 무구자료 65점이 지난해 2월과 4월 각각 기증됐다. 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의 전통을 이어온 고(故) 서재 김윤수 큰 심방의 무구자료 33점도 지난 2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기증자료 목록에 올랐다. 무구는 심방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여러 도구를 두루 일컫는 말로, 심방 사이에 대를 이어 전승되곤 한다. 무구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또 이들 무구가 박물관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 박물관으로 향하는 무구…달라진 시대상 제주는 예부터 오랜세월 무속 신앙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산과 들,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했고, 자신과 가족·마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신 신당인 '본향당'(本鄕堂)을 중심으로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제주에선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이사철인 '신구간'(新舊間), 새해를 맞아 마을을 지키는 신께 감사의 세배를 올리는 신과세제
그는 사실 ‘여전사’다. 지금껏 그렇게 거침없이 살았다. 노회한 정객(政客)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다수건만 그는 그렇지 않다. 국제사회에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는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아시아와 세계를 누비고 있다. “내 삶에서 피로와 피곤, 그리고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외친다. 줄곧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여기던 이들에게 보란 듯 도전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대만 첫 여성부총통을 두 번이나 지낸 뤼슈렌(呂秀蓮·80). 여든의 나이에도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평화’를 추구하는 그의 이상이 입으로 터져나올 땐 그저 달변이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가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감동이었습니다.” 그가 제주도청을 잠시 들러 본 로비라운지 현판은 그렇게 그에게 다가왔다. 뤼슈렌 전 부총통은 여성으로서, 또 민진당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대만 10·11대 부총통을 지냈다. 국민당 계엄 통치 시절인 1979년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으로 5년을 복역했고, 천수이벤 총통 시절엔 부총통으로 대선유세를 함께 치르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기도 했다. 구사일생을 거듭하며 대만 민주화와 여성운동, 대만독립운동의 기수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민주태평양연
15일 아침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신양분교 운동장은 고요했다. 기다란 단층 건물 오른편에 2층 건물이 증축된 것 같은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교실은 대충 10개쯤 되어 보였다. '꿈과 끼를 마음껏 펼치는 행복한 학교'라고 적힌 현판 아래 연구실에서 이 학교의 유일한 교사인 이정래 선생은 현재 재학생이 4학년 여학생 1명뿐이라고 말했다. 이 여학생은 원래 하추자도 신양리 출신이지만 또래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해 다리로 연결된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초에 진학했다. 하지만 휴교 위기에 놓인 신양분교의 사정을 고려해 다시 분교로 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양분교 재학생 한 명이 졸업하면서 학생이 없어 휴교 위기에 처하자 이 학생이 '억지로' 옮겨와 다시 분교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이 선생은 "작년에 새로 부임한 마을 교회 목사의 딸이 전학을 왔으나 지난주에 목사가 다른 곳으로 부임하면서 그 6학년 학생이 전학을 갔다"고 설명했다. 이 학교는 원래 신양국민학교(초등학교)로 설립됐고,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1969년 재학생은 565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마다 재학생이 줄면서 1999년 추자초 분교장으로 격하됐다. 제주도의 부속 섬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섬인 추자도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김광석의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는 입대하는 까까머리 젊은이들과 연인, 가족의 심금을 꽤나 울렸던 노래다. 노래에 등장하는 훈련소로 논산훈련소('육군 제2훈련소'에서 '육군훈련소'로 개칭)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제주에 '원조' 훈련소가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과거 6·25 전쟁 당시 50만 장병을 양성했던 제주 '육군 제1훈련소'다. ◇ "제주서 강한 신병 양성 훈련소 초석 다져"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한 교차로. 차들이 오가는 도로 양옆으로 높이 3.7m, 가로·세로 2.5m 크기의 시멘트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간격은 17m 정도다. 갈라지고 금이 간 기둥과 현판을 걸어뒀던 것으로 보이는 녹슨 철근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기둥의 정체는 옛 제주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고시됐다. 2008년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기존 등록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정문을 추가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등록됐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2개의 시멘트 기둥, 인근에 몇 안되
"나무 표지에서도 기념 촬영할 수 있습니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 1950m의 고지대 답게 한 여름 뙤약볕에도 서늘한 공기가 밀려온다. 그러나 그 기운을 느낄 틈은 없다. 북새통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남한 최고봉 한라산을 등정한 걸 기념하기 위한 촬영행렬이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백록담' 표지석을 차지하려는 긴 줄이 이어져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행렬은 분화구 정상 밑으로도 길게 늘어서 있다. 긴 대기 줄로 인해 한 번 촬영하려면 1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한여름에는 기다리는 동안 땀이 식어 한기를 느끼기 때문에 등산객들은 바람막이를 꺼내 입곤 한다. 땀을 쏙 빼고 기껏 정상에 올랐지만 하염없이 긴 줄로 기념 촬영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는 등산객들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는 "다른 나무 표지도 있다"면서 기념촬영 대기 줄을 분산하도록 하는 안내방송까지 하고 있다. 해발 1950m 한라산 정상에는 자연석 표지석 외에 '한라산동능정상', '명승 제90호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멋진 나무 표지도 있다. 하지만 등산객들은 자연석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1555년) 이후 40년이 채 안 돼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년). 조선을 거쳐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해 7년간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됐고, 온 국토는 황폐해졌다. 조선의 백성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제주도는 무사할 수 있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임진왜란 당시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와 당시 제주의 숨은 영웅들을 알아본다. ◇ 임진왜란 속 제주의 숨은 영웅들 1592년 임진년 봄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일본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최단 거리로 진격해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전쟁을 단숨에 끝내려 했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사흘 전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간 뒤였다. 일본의 당초 계획대로 되지 않은 전쟁은 결국 장기전에 돌입했다. 임진왜란 초기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침공 우선순위에 제외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주 백성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제주 섬 전체를 책임지고 다스렸던 목사(牧使)는 이경록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