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말고기 식당이 눈에 띈다. 오늘날 말고기가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처럼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지만 말의 고장 제주에서만큼은 점차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의 말고기 식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 알다가도 모를 제주의 말고기 식문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고기를 먹었던 것일까. 제주 신화를 통해 예부터 제주에 말고기 식용 문화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농경신이 된 자청비의 이야기를 담은 '세경본풀이'(제주에선 '신화'를 '본풀이'라 일컫는다)를 보면 자청비의 하인인 '정수남'이 아홉마리의 소와 말을 몰래 먹는 내용이 나온다. 이외에도 소와 말, 돼지 등을 먹는 육식신(肉食神)과 그렇지 않은 미식신(米食神)이 등장하는 여러 제주 신화를 보면 먼 옛날부터 말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말고기를 먹는 일이 크게 줄었지만, 고려 시대 몽골식 목마장이 들어서면서 제주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식 도살법과 요리법이 전해졌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는 말과 말가죽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도축 과정에 나온 고기를 먹었다. 제주에서 말은 농사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웬만
제주 한라산 중턱의 마방목지에 가면 드넓은 초원에서 뛰노는 제주마를 볼 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쯤 들러 예쁜 추억을 남기는 명소다. 오래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제주마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주마를 일컬어 흔히 부르는 '조랑말', '과하마'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 말의 산지 '제주' 그 유래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제주에서 말 사육은 탐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나라를 세웠다는 '탐라건국신화'에 그 일말의 단서가 남아있다. 세 신인은 사냥하며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주식으로 생활하다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한다. 중요한 건 세 공주가 당시 제주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함께 들여오는데, 바로 오곡의 씨앗과 망아지·송아지 등 가축이다. 역사를 반영한다는 '신화'(神話)의 속성상 이는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과 목축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 27년(1073년)에 탐라가 고려 조정에 말을 진상했다는 첫 기록이 있어 서기 1000년경 말이 본격
제주 목축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제1회 제주마 입목 및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천연기념물 제주 조랑말(제주마)을 소재로 한 축제로 27∼28일 이틀간 제주시 봉개동 개오리오름 일대 제주마 방목지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옛말처럼 '말'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조랑말을 키우며 삶을 이어간 말테우리는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다. 말테우리를 비롯한 제주 목축문화를 두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밭농사에 없어선 안 될 말테우리 조선후기 제주 문인 이한우(1818∼1881)는 제주의 열 가지 빼어난 경관을 정리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일컬었다. 이 중 마지막 제10경이 '고수목마'(古藪牧馬)다. 한라산 중턱이나 너른 초원에서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꼽은 것이다. 20세기 초 이를 바탕으로 춘원(春園) 정재민(鄭在民)은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5필의 말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말테우리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림 우측 상단의 글귀는 '말'(馬)을 '산속의 사슴'(山中鹿)이라 적
한 때 이주 열풍이 뜨거웠던 제주가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시들해진 이주 열풍과 청년층 이탈, 고령화, 저조한 출산율 등 팍팍해진 서민들의 삶 탓이다. 과거에도 이 같은 현상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과도한 수탈 등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도망치듯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주 인구가 크게 줄었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나온 조정의 정책이 '출륙금지령'이었다. 약 200년간 제주를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이 철저히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 떠나는 제주 사람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제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통제정책을 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듯이 '제주 백성들이 유리(流離)'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집과
70여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에 발생한 참극 '제주4·3'. 4·3의 비극성은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희생의 아픔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진실 규명을 이뤄내고,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인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사례로 평가받는 제주4·3은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진실·화해·상생'의 가치를 담은 4·3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다. 서슬 퍼런 국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노력, 그들에 의해 수집·채록한 4·3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 4·3 억압된 침묵의 기록 제주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했다. 이후 무장대와 군·경을 비롯한 토벌대는 서로를 각각 '통일 반대 세력',
제주삼다수가 가수 임영웅을 신규 브랜드 모델로 선정하고 새로운 도약에 들어갔다. 제주삼다수는 임영웅이 가진 특유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와 전 세대에게 신뢰를 주는 모습이 ‘믿고 마실 수 있는 물’ 제주삼다수의 브랜드 이미지와 잘 부합해 신규 브랜드 모델로 선정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임영웅과 제주삼다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업계 1위라는 점이다. 임영웅은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올해 1월 조사한 가수 브랜드 평판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각종 음원차트 1위 및 전국투어 콘서트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삼다수도 국내 생수시장에서 시장점유율 40.3%(2023년 기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출시 이후 26년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주삼다수는 이번 광고 캠페인을 통해 품질에 대한 자신감과 철저한 수질 관리 노력을 알릴 계획이다. 지난 21일 공개된 첫 CF ‘토지보호 편’에서는 제주삼다수를 지키기 위해 축구장 100개 크기의 땅을 매입했으며 ‘땅이 깨끗해야 물도 깨끗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제주삼다수는 한라산 국립공원 내 해발 1450m 높이에 스며든 빗물이 현무암과 천연 필터인 화산송이층을 통과하며 18년 동안 정화
제주삼다수를 생산·유통하는 제주개발공사가 올해 공공주택 사업에 총력을 질주한다. 공공임대주택은 물론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사업에도 박차를 가한다. 제주개발공사는 도내 공공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국고보조금 등 약 291억원을 포함, 올 한해 719억원을 투입해 제주도내 공공주택 사업을 추진한다고 25일 밝혔다. 제주개발공사는 우선 도내 공공임대주택의 신속한 공급을 위해 약 301억원을 투입해 180호를 매입하고 임대를 추진한다. 더불어 건설형 공공주택인 ‘마음에온 연동·대림·법환·대정’ 건립 추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는 2026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특히 제주에서 첫 추진되는 삼도이동 토지임대부 분양주택(72호) 사업은 내년 상반기 공사착공을 목표로 한다. 입주는 2027년 3월 예정이다.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은 토지의 소유권은 사업자인 제주개발공사가 갖고, 건축물 및 복리시설 등에 대한 소유권은 주택을 분양받는자가 가지는 주택이다. 분양가격에 토지가격이 포함되지 않아 ‘반값 아파트’라 불리며, 무주택 서민들의 자가소유기회 확대를 보장하는 주택이다. 삼도이동에 이어 서귀포시 동흥동 일원 후보지에도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이 공급될 예정이다. 공사는 더불어 지난 2월
마을 전체가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 600년 전통을 이어온 성읍민속마을이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문화재 보호와 마을 정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혈세만 낭비했을 뿐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주민과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다. 600년 전통이 천 년 이상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성읍민속마을의 과제는 무엇일까. ◇ 600년간 명맥 이어온 민속마을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정의조점', '정의양로', '정의강사'는 옛 제주현성에서 거행된 행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의조점은 이형상 목사가 정의현을 둘러보며 군사시설을 비롯한 각종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모습을, 정의양로는 정의현성에서 치러진 노인잔치 광경을, 정의강사는 동짓날 정의현에 머물며 시행한 강사(講射), 즉 글 외우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동문·서문·남문과 함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의현성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 성안에 수많은 민가가 밀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현감이 집무하는 현아(縣衙), 교육시설인 향교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 밖에도 민가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천미(靈泉川尾)라고 표기한 하천(지
제주 사람 중에도 제주의 전통주라고 하면 '오메기술', '고소리술', '쉰다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제주도무형문화재 3호 오메기술과 11호 고소리술은 좁쌀을 주원료로 한 술이다. 쉰다리는 쌀밥이나 보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도수가 낮은 술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술', '오합주', '모주'도 거론된다. 강술은 오메기떡과 누룩을 반죽해 발효한 걸쭉한 상태의 술이고, 오합주는 좁쌀을 원료로 한 청주와 꿀, 참기름, 계란, 생강 등 다섯 가지를 섞어 만든 술이다. 모주는 조선 광해군 시절 제주에 유배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의 시녀가 노씨를 봉양하기 위해 만들어 팔았다는 탁배기 같은 낮은 도수의 술이다.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제주의 전통주는 이들 6가지 정도였다. 그런데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전통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가 정부가 주류의 제조와 유통 및 판매 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술이 생산, 유통되기 시작했다. 2010년 '전통주 등의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 각지의 전통주 산업은 활기를 띠었다. 10일 제주도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4·3과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새롭고 편리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근현대를 거치며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온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늙고 병들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4·3에도 멀쩡하던 초가…근현대화에 사라져 40대 중반인 기자가 제주 전통 초가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대한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댁은 제주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에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를 뜻하는 제주어)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부속건물)가 'ㄷ'자 모양으로 된 세거리집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90세 가까이 된 아버지는 옛날 초가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와 살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고조부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4·3
제주도의 오름은 공식적으로 368개이다. 등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오름 수는 이를 넘어선다. 하루에 하나씩 오르더라도 1년에 다 탐방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1년 동안 하루에 하나씩 올라도 못다 오를 오름들 오름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제주. '오름 왕국'이다. 생성 시기, 생태, 인간 삶과 얽힌 사연이 오름마다 각양각색이다. 분화구 모양, 화구 능선 등 오름의 '개성'을 알아내고, 이런저런 사연에 귀 기울이며, 정상에 서서 바다, 하늘, 들판을 바라보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육지 등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게 제주 오름들을 거의 다 올랐다는 김상수 거문오름 자연유산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오름을 오르다 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제주 땅의 자연과 역사를 몸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용눈이 오름은 평생 제주 사진을 찍어 제주의 매력을 알렸던 김영갑 작가가 사랑했던 오름이다. 용눈이는 한 봉우리 안에 분화구가 셋 있다. 용암이 세 번 분출했음을 뜻한다. 세 분화구가 연출하는 지형은 마치 용이 누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눈이는 해발 247m, 비고 88m이다. 20분 정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부드러운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