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원장(朱元璋) : 46명의 비빈을 참살해 순장. 명 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비빈 46명을 함께 부장하거나 순장하였다. 태조 이전에 죽은 비빈 2명을 태조 능묘의 동서 양측에 부장한 것 이외의 나머지 38명은 순장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주원장을 매장할 때 ‘미혼진(迷魂陣)’을 펼쳤다고 전해온다. 매장 당일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출관하였다. 이 이야기는 600여 년을 전해져 내려오면서 남경(南京) 민간에 전설처럼 퍼져있다. 남경에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해져왔다. “남경에는 세 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 용담(龍潭)의 아가씨는 노부인 같고, 무를 반찬으로 삼아 팔고, 13개 성문에서 관을 들고 나가고.” 이처럼 주원장이 죽고 나서 기이하게 매장하였던 이야기는 놀랍게도 남경을 상징하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물론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사료에도 기록돼있다. 명 주국정(朱國楨)의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에 기록돼있다. 주원장을 매장하는 그날 “발인했는데 각문하장(各門下葬)”했다고. ‘각문하장(各門下葬)’이
고대 10대 황제들은 자신이 죽어 묻히면 후궁도 같이 순장(殉葬)하기를 바랐다. 전제제국의 절대 권력자들은 죽어서도 재세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람에서 생겨난 고대 매장제도, 특히 중국 고대 제왕의 매장제도 중 가장 잔인한 것이 순장이다. 진한(秦漢)시기, 순장제도는 비교적 성행했었다. 한(漢) 왕조 이후에 와서 통치자들이 비인도적인 제도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점차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고고학자들이 주원장(朱元璋)의 능묘에서 많은 궁녀의 백골을 발굴됐다는 점이다. 한둘이 아니었다. 이는 분명 명(明) 왕조 개국황제 주원장이 죽었을 때에도 진한시기와 같은 순장제도가 실행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유학을 바탕으로 국태민안을 외쳤던 황제가……. 그렇다면 어떻게 순장을 했을까? 살아 있는 채로 묻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빈(妃嬪)들이 잠든 후 옆에 있던 태감들이 머리를 잘라내었다. 구리 주걱을 들고 있던 집행인들은 잘려진 부위를 통하여 수은을 집어넣었다. 일정량의 수은을 집어넣은 후 바늘과 실을 가지고 두부를 봉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순장했는데 그
넷째, 오누이 통혼 풍습이 있었다. 복희(伏羲)와 여왜(女娲)는 중국 신화전설 중의 인류의 시조다. 바로 성경 속 아담과 이부처럼. 그들은 부부가 돼 인류를 창조하였다. 그런데 복희와 여왜는 오누이이다. 지금까지도 중국 소수민족 중에 전하여 내려오는 ‘나(儺)’ 문화 중의 ‘나공나랑(儺公儺娘)’ 신화도 오누이가 결혼해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사실 원시시대 혈연가족 시기에 인류는 ‘잡혼(雜婚)’을 끝내고 다른 항렬끼리의 혼인은 금지했지만 형제자매 사이에는 통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복희와 여왜 오누이가 부부가 된 것은 ‘혈연혼’으로 보면 도덕적이었다. 중국 원시시기에 성년 남녀 사이에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오누이가 결혼하는 데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최초 인류는 혼인이나 가족의 관념이 없어 남녀사이가 ‘난잡’한 상태였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남녀사이에 명확한 분공이 일어나게 됐으며 동시에 인류의 지혜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사유도 진보하게 되었다. 그때 모자간, 부녀간 등 다른 항렬의 혼인은 점차 사라졌으나 오누이 결혼처럼 같은 항
셋째,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에 새 벼가 익은 후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히 먼저 먹지 못했다. 반드시 ‘첫 벼’로 농사의 신에게 헌제를 올렸다. 이런 풍습이 퍼져나가 장자를 죽여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확산됐다고 본다. 옛 서적에는 그런 잔인하면서 괴이한 풍습을 “장자를 죽임으로써 동생들을 많이 낳게 한다”고 하였다. 원시시대 부녀자의 사유 방식은 다음과 같다.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신령이 즐거워해야 만이 그녀에게 더 많은 자녀를 하사해준다.” ‘첫 벼’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첫 아이를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더 많은 자녀를 낳게 해준다는 관념이다. 이는 “신(神)이 먼저 향유하여야 한다”는 몽매한 의식의 연장인 셈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남방의 소수민족에게 남아있는 처녀의 동정을 깨뜨리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숫처녀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뿐 숫처녀와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기이한 관념의 풍습이 아닌가? 숫처녀의 신성함을 깨뜨릴 수
‘자살 굴’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더 기이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모친 시신을 먹거나 모친을 버리는 습속이다. 중국 고대에 농경은 여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여인이 농사를 발견했다고 한다. 풍작을 바라는 마음에서 부녀자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금기(禁忌)를 만들었다. 신령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다. 모계 씨족사회에서 노동력을 상실한 늙은 부녀자들 역시 씨족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일종의 “모친의 시신을 먹는” 풍속이 일시 유행하였다. “무술을 모방(模擬巫術)해” 노인의 농사 경험을 자손들 몸으로 전이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단계를 벗어난 후에는 ‘모친을 유기’하는 풍속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늙은 부녀자를 깊은 산중에 보내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는 전술한 ‘자살 동굴’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풍속은 잔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한 당시 인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는 가장 도덕적이었을 수도 있다. 둘째, 남편은 ‘산후조리’하고 산부는 밭에 나가
고대 중국, 특히 광대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 지역에는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으나 당시 인류의 사유방식으로는 논리적이라 볼 수도 있는 괴이한 풍속이 많다. 노인 ‘자살 굴’, 남자 ‘산후조리’, 모친을 먹거나 버리기, 큰아들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남매 통혼 등이 그것이다. 첫째, 노인 ‘자살 굴’ ‘자살 굴’이라고 했으나 ‘죽게 내버려두는〔寄死〕 갱(窯)’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전설 속의 고려장과 같은 행태를 자행하였던 갱과 같은 동굴을 말한다. 중국어로는 죽음의 갱이라는 ‘자사요(自死窯)’, ‘기사굴(寄死窟)’, ‘노인동(老人洞)’이라고 한다. 산 절벽이나 관목 총림 중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을 만들어 노동능력을 상실한 늙은이를 방치하였던 장소를 가리킨다. 그런 굴은 염진하(鹽池河, 단강구〔丹江口〕시 서남부에 위치해있는, 도교 성지 무당산〔武當山〕 남쪽 기슭, 동쪽으로는 백양평림업관리〔白楊坪林叢管理〕 지역과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관산〔官山〕과 이어져 있
중국의 배갈은 증류 가공 방법으로 만드는 알코올 농도가 비교적 높은 음용하는 술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량주로 우리나라의 일반 소주와 다르다. 중국에서는 배갈에 대해 ‘백주(白酒)’란 통일된 용어를 쓰고 있지만 ‘소주(燒酒)’, ‘백간(白干)’, ‘고량주(高粱酒)’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배갈의 과학적인 명칭은 ‘증류주(蒸溜酒)’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배갈은 ‘白干’에서 유래했다.[본 문장에서는 배갈과 소주라는 용어를 혼용해 쓴다] 중국은 언제부터 술을 증류했을까? 자체 발명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전래됐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으로 중국 배갈의 기원 문제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한(東漢), 당(唐), 송(宋), 그리고 원(元) 대에 비롯됐다는 네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동한이라는 설은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내편内篇』과 『후한서後漢書·신선전神仙傳』에 기록된 일단의 문자를 근거로 하고 있다. 초가(草家) 위에서 불을 붙여
1700여 년 전, 삼국(三國)시대 촉(蜀)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우유마는 어떤 모양의 운송 도구였을까? 고래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의 기록을 먼저 보자. 『삼국지·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은 교묘한 생각에 뛰어났는데, 기존의 활을 개조한 연노(連弩)라든가 목우유마 등은 모두 제갈량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있다. 또 “건흥 9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나왔는데 목우를 이용해 군량미와 말먹이를 운반하였다”, “건흥 12년(234) 봄, 제갈량의 무리들이 야곡으로부터 나와 유마로 짐을 운반하였다”고 돼있다. 이 기록을 보면 ‘목우유마’는 분명 제갈량이 발명한 것이고 서로 다른 두 가지 운송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목우가 먼저이고 유마는 나중에 발명된 것이고. 배송지(裴松之)의 주에서 인용한 『제갈량집』에는 목우유마의 제작법을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로써 역사상 제갈량은 확실히 목우유마를 제조하고 응용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근현대에 전기를 발명함으로써 조명 기술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길고긴 어두운 밤에 고대 중국인들은 어떻게 ‘조명’의 문제를 해결했을까? 1968년 하북 만성(滿城)의 서한(西漢)시기 두관묘(竇綰墓)에서 주작동등(朱雀銅燈)이 발굴되었다. 높이 30센티미터, 지름이 19센티미터였다. 주작이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켜세운 모양이다. 부리는 등반을 물고 있고 발은 반룡을 딛고 날개를 벌려 날아가려는 형태다. 등반은 원형으로 홈이 파져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고 각각 1개의 못이 박혀있다. 중국 고대 전설 속 주작은 백조의 왕이다. 춤을 잘 추는 신령성과 고귀한 생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길함을 준다고 돼있다. 한(漢)나라 때 주작은 4신 중 하나로 도기, 동경에 자주 등장하며 석묘의 묘비에도 자주 등장한다.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물이요 길상의 징조를 나타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작을 닮아 묘의 주인이 신선이 되거나 일찍 하늘나라로 올라가기를 바랐던 소박한 소망을 담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이런 주작동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예술 조형에 감탄하거나 그것이 지니는 내용에 감동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ldquo
한혈마(汗血馬)는 전설 속의 신비롭고 최상의 능력을 보유한 기이한 말을 가리킨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바람처럼 빨리 달린다고 전해온다. 여러 왕공 귀족들은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천금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漢) 무제는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새벽 6시, 해가 서서히 뜨며 밝아올 때 북경의 연룡(燕龍) 경마장의 마방은 벌써 떠들썩해졌다. 일꾼들이 매일 첫 번째로 하는 일, 마방 정리가 시작되었다. 그중 조마사가 가장 분주하다. 그는 막 중국으로 수입된 말 3필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몇 개 월 후 그중 한 필을 경매시장에 내놔야한다. 현재 경매최저가격이 100만 인민폐에 달하고 최종 경매가격은 중국 말 경매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원산지는 멀고먼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은 아칼 테케(Akhal Teke)다. 중국인은 그 말에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한 명칭, 한혈보마(汗血寶馬)라 붙였다. 현재 전 세계에 3000여 필밖에 없고 그중 2000여 필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 그 나라의 국보다. 그렇다면 한혈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천 년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문제 두 가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문물 발굴에 따라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면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첫째, 『손자병법』은 82편인가 아니면 13편인가? 둘째, 『손자병법』은 손무(孫武)의 작품인가 아닌가? 손자(孫子)의 이름은 무(武)다. 손무자(孫武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고대 군사전문가요 병가(兵家)의 창시자다. 제(齊)나라 낙안(樂安, 현 산동 박흥〔朴興〕 북쪽, 일설에는 혜민〔惠民〕이라고도 한다) 사람이다. 생졸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했다고 전한다. 손무는 원래 제나라 전(田) 씨의 후예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오(吳)나라에 이르러 오왕에게 중용된다. 오나라를 개혁해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나라는 손무의 도움으로 서쪽으로 강국 초(楚)나라를 치고 남쪽으로 월(越)을 정복했으며 북으로는 제(齊)와 진(晉)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제후국이 되었다. 그때가 오나라의 전성기였다. 손자 일생에 있어 후세에 남긴 최대의 공헌은 그의 군사관련 저작 『손자병법』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병법 걸작이다. 여태껏 ‘병경
사람들은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실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중,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이요 잔혹한 역사임도 알고 있다. 그런데 ‘분서갱유’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도대체 진시황은 왜 갱유를 자행했는가? 그리고 갱유한 수는 몇 명일까?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에서 유생(儒生)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석상에서 많은 유생들이 모여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여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왕관(王綰), 박사 순우월(淳于越) 등은 분봉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승상 이사(李斯) 등은 군현제(郡縣制) 실시를 주장하면서 순우월 등이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것을 배운다”, “옛것을 얘기하면서 지금을 해친다”고 공격하였다. 최종적으로 진시황은 이사의 견해를 지지하고 이사의 ‘분서’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기(秦紀, 진나라 사서), 의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