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말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 지금은 정계를 떠나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정치인을 오래전부터 좋아했었다.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칩거하여 집필활동만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분이 쓴 책들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있다. 얄미울 정도로 빈틈없는 논리와 정나미 떨어지는 말맛 때문에 국민들이 그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외피에 불과한 그분의 이미지에 냉소적인 국민들이 섭섭했던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밉상마저도 현실정치인이 감당해야 할 자질의 범주라고 생각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더라도 남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으면 끝까지 좋아해 주는 뒷심이 없다. 누구나 소수의 편에 서는 건 외로운 것이므로... 가끔은 감히 그분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를 들여다본다. ‘바른 말을 착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나쁜 말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 과거 너희 나라의 군인들이 우리들에게 이래저래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였으니 사과하라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에 아베라는 사람은 “증거 있어? 막말로 전쟁 때 뭐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냐?&rdquo
스무 살 쯤에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감동한 나머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날부터 1년여 남짓 왕복 1시간 넘게 어두운 들길을 오가며 새벽예배를 보러 다녔다. 교회를 다니는 내내 단테의 ‘신곡’ 속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인도에 따라 신의 모습을 보려는 나름의 간절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칼날 같은 이성의 눈을 부릅뜬 채 ‘한 번 따져보자’고 덤비는 피 끓는 청년에게 성령은 강림하질 않았다. 그런 나의 간증(?)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하나님께 너를 맡겨라”라는 목회자의 말은 가슴에 와 닿을 리가 없었다. 부질없거나 주제 넘는 일이라고 체념한 이후에도 아예 등지면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주술에 걸려든 것 같기도 하여 아주 떠나지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부러 외면하려고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가장 문학적인 (우주)과학책이라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등을 어설프게 읽고는 무신론으로 나의 신념을 무장하려고도 해봤다. 아무리 그래봤자 지천명을 넘긴 후에도 이어령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미혹되고, “하느님을 믿느냐?”는 김수환 추기경의 물음에 “애매하게 믿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답
‘재의냐 추경이냐 (... 이것이 문제로다)’ 기자가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면 십중팔구는 품질이 나쁜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 ‘소유냐 존재냐’의 구도 위에 현재의 사안(事案)을 덧씌워서 핵심 쟁점이 마치 존엄의 우열을 따지기 어려운 두 개의 지향인 것처럼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어느 편의 오류도 정공할 배짱은 없으니까 대중의 명확한 판단을 흐리게 해서라도 미디어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싶은 경우일 것이다.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말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같으면 그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런 대중의 급소를 노린다. 제주자치도가 의회의 예산 삭감으로 파행을 겪고 있다. 국비보조사업의 도비 부담금은 물론, 필수경비인 공공운영비를 망라한 무차별 삭감으로 도정이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원희룡 도지사는 재의를 요구하겠다고 하고, 구성지 의장은 추경안을 제출하라고 공을 미루는데, 애꿎은 도민은 맞받아칠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도내에 십 수개가 넘는 언론은 공을 치고받는 정선아리랑만 제주판으로 표절하여 중계할 뿐, 둘 중 어느 한쪽의 반칙은 지적을 못한다. 무섭거나 재미있거나 모르거나 성가시거나..
▲ 김성민/ 수필가, 논설위원 서울 사는 동생네 두 가족 여덟 명이 설 쇠러 왔다가 한사리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내의 뒷정리를 수발하려고 나훈아 히트곡 음반을 틀고 볼륨을 어지간하게 올렸다. 어느 신문에선가 우리나라의 중년 남성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단어를 물어봤더니 첫째가 어머니이고 그다음이 고향이라고 대답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그 ‘어머니와 고향’이 하필 나훈아의 꺾고 넘는 노랫가락을 타기만 하면 구곡간장을 헤집어 놓고야 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설날에 TV를 통해 보고 듣는 나훈아의 ‘애타도록 그리운 어머니와 꿈에도 못 잊을 고향’은 마치 민족의 명절 제례악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마의 갈기 같은 은발머리에 가슴을 풀어 헤친 와이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아리수’를 부르는 걸 본 이래 TV에서 나훈아를 본 적이 없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시골 어느 요양원에서 요양 중이란다. 대한민국의 대표 수컷이 요양 중이라니... 쯧쯧 세월이 무상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성학자인 박혜란 여사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나브로 늙어 간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
▲ 김성민/ 수필가.논설위원 지난 연말 성탄전야. 온 누리에 평화(平和)가 넘쳐난다는 거리마다 하느님의 은총을 노략질한 것 같은 취객들과, 사탄의 저주를 억울하게 받았을 것 같은 폐지할머니들이 세밑 대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화(平和)는 쌀(禾)이 입(口)으로 골고루(平) 들어간다는 말이라던데, 이마저 창조주 하느님의 전지전능이라면 대체 당신의 평화는 어떤 것인지? 하느님은 천지창조를 대충 하신 건지? 아니면 이것이 완벽하게 창조된 세상인지?’ 성탄절에 똬리를 튼 의념(疑念)에 쏠려 얼추 연말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하나 마나 한 생각이 바람에 구름 가듯 서서히 멀어질 때쯤, 우근민 도지사의 신년사가 미처 도망치지 못한 구름조각을 다시 붙들어 맸다. ‘위목, 아랫목이 고루 따뜻한 제주’ 먼저 참 좋은 말씀을 하셨다. 그 중에도 ‘고루 따뜻한’이라는 수식이 가슴시리다. ‘윗목’과 ‘아랫목’은 노골적으로 해석하면 상류층과 하류층을 은유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행여 그 명징한 어휘의 바탕에 우리 편과 그들 편이라는 묵은 더께가 끼어있지 않기를 바란다. 상
▲ 김성민 논설위원/ 수필가 어이가 없다. 도민들이 그들을 향하여 ‘무뇌인간’이다. ‘영혼이 없다’라고 비아냥거릴 때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는 않았지만 갸웃거리기는 하였다. 그런데 아니다. 고개를 끄덕거렸어야 했다. 그들의 증세가 생각보다 너무 심각하다. 이런 건강상태로는 내년 6월 도민의 재검진이 너무 까마득하다. 뇌뿐만 아니라 골수까지 악성 바이러스로 꽉 들어차서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건강하다고 악다구니 쓴다. 그러니 자기네 편에 서라고. 그래야 “××고교 출신보다 승진도 먼저하고, 수지맞는 계약도 해줄 수 있다”라고... 시장님의 이런 망발을 가능케 하는 사유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생각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다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하게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 말이다. 그래, 원인은 폭정이다. 인간
▲ 김성민 수필가/ 논설위원 金형이 중학생 시절에 제일가는 참고서는 ‘완전정복’이었다. 표지에 백마를 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단숨에 넘을 것 같은 그림만 보아도 정복욕이 저절로 솟아났었다. 나중에 이 그림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쓰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영웅(우상)으로 추앙하기 위해 다비드라는 화가가 야욕적으로 그린 정치선전물이란 걸 알았다. 병사들의 뒤에서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보다 다비드의 그림재주가 더 비루하게 생각되었다. 얼마 전에 다비드의 그림에 빗대어 볼만한 진경(眞景)이 도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金형이 회장으로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협의회’를 비롯한 관변단체들의 도정이슈에 대한 찬양광고가 그것이다. 광고의 문구마저 천편일률적인 소위 ‘그들의 입장’은 과연 주관적인 애향심의 발로인가, 아니면 모종(某種)의 ‘완전정복’을 도모함인가. 그들의 몰개성(沒個性)이 만들어 내었을 만만치 않은 민심(?)에 최소한의 의문이 든다. 산전수전 다 겪은 李형의 좌우명은 ‘시류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 김성민/ 수필가 ‘나’와 ‘저’는 같은 1인칭 대명사다. ‘위원장’과 ‘위원장님’도 같은 상대방을 호칭하는 2인칭 대명사다. 그런데 이것은 같으면서 많이 다르다. 대표적인 호학군주이면서 독서광이었던 정조는 읽은 책의 원문을 초록(抄錄)할 때 “발췌한 부분과 자신의 입론이 뒤섞이지 않도록 명심해야한다”고 했다.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원문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나’를 ‘저’로 발췌한 것은 발언의 정수를 교묘히 왜곡(자신들은 오타라고 함)하여 자신들의 의도와 뒤섞어 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이 디테일한 관심을 갖지 않기를 기대하여 속이려 들었으니 참으로 나쁘고 미운 공무원들이다. 우근민 지사는 지난 1일 취임 3주년 기자회견에서 최근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의 광역자치단체장 공약사항 이행평가에서 A등급(우수)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가에 따르면 민선5기 우근민 제주도정의 공약사항 200개 중 98.5%인 197개가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닷새 후 도내 2개 언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