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타나모 해병대 기지 사령관인 제섭(Jessup) 대령은 부대의 치부를 외부에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는 산티아고 일병을 향해 ‘코드 레드(Code Red)’를 발령한다. 합의되고 위임받은 공권력에 의한 처벌이 아닌 비합법적이고 은밀한 사형(私刑)이다. 문서에 기록된 공식적인 지시일 리 없다. 피라미드 조직처럼 입에서 귀로 전 부대원들에게 전파된다. ▲ 성역은 신계(神界)를 동경한 인간들의 상상에서 시작돼 권력장치로 변질됐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은밀한 명령인 ‘코드 레드’가 발동된 후 산티아고 일병은 같은 부대원들에게 살해된다. 흔한 군부대 사고사로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의기충천한 조앤 갤러웨이(데미 무어) 소령과 재기발랄한 군법무관 캐피(톰 크루즈) 중위에 의해 점차 윤곽이 드러난다. 결국 ‘코드 레드’ 발동의 수괴인 제섭 사령관이 군법정에 소환된다. 하지만 제섭 사령관이 누구인가. 전쟁의 신이고, 무수한 훈장을 모두 주렁주렁 매달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인물이며, ‘무려’ 백악관 안보회의 참석 멤버다. 한마디로 감히 건드릴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정신이 쿠바의 관타나모 해병대 기지에 충만하다. 노력해도 안 되면 더 ‘노오력’하라고 다그친다. 산티아고 일병은 죽을 지경이다. 인간이 느끼는 한계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지만 제섭(Jessup) 사령관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해병대의 생명과 같은 군기가 무너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 죽도록 충성하고 죽도록 일히라 다그치는 우리 사회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해병대를 닮았다. [일스스트=게티이미지뱅크] 쿠바의 관타나모 해병대 기지에 배치된 산티아고 일병은 부대의 유별나게 ‘빡센’ 군기와 훈련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한계를 느낀 산티아고 일병이 타 부대로의 전출을 청원하지만 제섭 사령관은 못마땅하다. 자신의 탁월한 지휘력으로 일병 하나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다. 개인이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집단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옷을 사람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옷에 맞추는 식
미국 해병대의 모토는 ‘Semper Fidelis’다. 모든 개인은 조직에 ‘항상 충성하라’는 말이다. 충성 앞에 ‘항상’이라는 말이 붙으면 불온하다. 조직이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충성하라는 말이 된다. 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en)’에서 산티아고 일병은 ‘항상 충성하라’는 해병대 모토를 위반해 공공의 적이 된다. ‘항상 충성하라’의 숨은 뜻은 ‘그렇지 않다면 사형선고’일지 모른다. ▲ 우리 사회의 많은 조직도 암묵적으로 '항상 충성하기'를 강요하고, 누군가 거부하면 바로 '코드 레드'를 내린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 퓨 굿맨’은 미국의 ‘귀신 잡는 해병대’에서 벌어진 불행한 사건을 다룬다. 해병대가 귀신까지 잡았다 하면 그 결과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귀신을 때려잡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고 귀신이 돼야 하는 과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나라 해병대의
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an)’은 미군의 해외 주둔지 중 하나인 쿠바의 관타나모 해군기지에서 발생한 어느 일병의 ‘의문사’를 다룬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추정되는 1960년대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휴전선과 같은 곳이다. 안보 목적상 밝힐 수 없는 비밀도 많고, 군기도 ‘빡센 곳’이다. ▲ '개인적인 이유'로 총기 사열의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을 깬 산티아고 일병은 '공공의 적'이 된다. [일러스트=케티이미지뱅크] 로브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1992년작 ‘어 퓨 굿맨’은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법정 드라마’라 하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법정이 아니라 ‘군대’라는 폐쇄된 사회에서의 법정 이야기라는 점이 특이하다. 영화의 시점(時點)은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거리에 돌아다니는 자동차들의 모습으로 추정하건대 아마도 1960년대쯤 되는 듯하다. 건물이나 복장은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매년 ‘부분 변경’이
영화 ‘라쇼몽’은 여성 관객들이 불편해할 영화다. 일본의 어느 숲속에서 벌어진 ‘강도’와 ‘강간’을 모티브로 한 대단히 ‘동물적’인 이 영화는 강도짓이야 그렇다 해도 강간을 다루는 방식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라쇼몽의 원작자도 남성이고, 감독도 역시 남성이어서인지 강간의 문제를 다루는 시각 역시 철저히 남성적이다. ▲ 여성은 남성의 욕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자기검열 해야한다는 헤이안 시대식 주장은 오늘까지 생명력을 유지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빚어낸 영화 ‘라쇼몽’의 배경은 11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이고, 영화가 개봉된 시점은 1950년이다. 그러나 강간의 문제가 다뤄지는 방식은 영화의 배경인 1000년도와 영화가 제작된 1950년도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한 ‘미투운동’으로 소란스러운 2019년 오늘날과 비교해도 또한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라쇼몽이 보여주는 여성문제 특히 강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11세기와 21세기
한 노파가 여자 시체의 머리칼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판다. 죽은 여자는 뱀을 말려 어포로 속여 팔던 여자다. 직장을 잃은 한 남자는 머리칼을 뽑던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난다. 문루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가는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아기를 삶아먹기 위해 가져간다고 의심한다. 환란의 헤이안 시대 라쇼몽에서 벌어진 참상이다. ▲ 상황논리란 욕감과 게으름, 그리고 무능에 대한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끊이지 않는 전란과 기근, 그리고 역병까지 마치 ‘재앙 3종세트’와 같은 혼동 속 헤이안 시대(약 800~1200년),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할 법한 수도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의 대문 ‘라쇼몽’의 무너져가는 문루에서 벌어지는 ‘삽화’들이 시대의 참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히 토마스 홉스(Thomas Hobbs)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All against all)’의 극적인 장면들이다. 17세기 영국의 법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지극히 이기적이
일본 헤이안 시대, 전염병과 대기근이 닥친 수도 교토에는 굶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처리하다 못해 아무 데나 버리게 되고 도시 외곽문인 라쇼몽의 다락은 시체 유기 명소가 된다. ‘비단결 같은 삶’을 갈구하는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이름이 역설적이다 못해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 모두 진정한 반성은 보이지 않고 오직 처벌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이유만 무성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과 「덤불 속藪の中」이 원작이다. ‘덤불 속’이 사실상 영화 스토리의 중심이다. 반면 같은 제목의 소설 라쇼몽은 영화의 스토리와 큰 연관은 없다. 그러나 라쇼몽은 덤불 숲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배경 역할을 한다.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외곽문이다. 수년간의 대기근, 화재, 그리고 전염병 등으로 죽은 사람들이 넘쳐나자 라쇼몽의 다락은 시체를 유기하는 장소가 돼 버린다. 영화 속 라쇼몽에는 다락의
▲ 인간은 '자기 자신도 속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1951년)’ 전쟁이 난무하던 일본의 헤이안 시대(794~1185년) 숲속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을 그렸다. 등장인물 모두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느 추리극과 달리 이 영화는 서로가 자신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라쇼몽’은 일본의 대표 문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단편 「라쇼몬」(1915년)과 「덤불속」(1921년)을 원작으로 한 일본의 고전영화다. 아키라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이 영화는 1951년 아카데미상 특별명예상과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도적 다조마루, 사무라이(이미 죽었으나 무당이 그의 영혼을 증인으로 불러낸다), 사무라이의 아내 그리고 목격자인 나무꾼과 스님은 숲속 살인사건의 피의자 혹은 증인, 참고인으로 관아에 끌려 나오거나 출석한다. 그들의 진술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이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빅 브라더'는 위기의식을 이용해 주민들을 통제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1949년 소설 「1984」에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년의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오세아니아의 ‘빅 브라더’는 주민을 지배하고 감시한다. 유라시아ㆍ이스타시아 대륙과 전쟁 중이라고 선전하며 위기의식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실제 전쟁 중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민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빅 브라더는 그렇게 권력을 유지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수혁(이병헌 분) 상병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정찰하던 중 지뢰를 밟는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난감한 상황에서 역시 정찰 중이던 북한의 오경필(송강호 분) 중사가 두려움에 ‘질질 짜는’ 이수혁을 발견하고 지뢰를 제거해주고 돌아간다. 그 인연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경비병 이수혁과 남성식(김태우 분) 일병은 공동경비구역 북측 초소를 드나들며 오경필, 정우진과 친구처럼 어울린다. 진정한 남북화합이 그곳에서 이뤄진다.
많은 영화에는 주연 못지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조연들이 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도 인상적인 조연들이 등장한다. 그중 영화 흐름의 물줄기를 쥔 조연은 아니지만 머리를 무겁게 하는 대사의 주인공이 있다. 어깨에 별 하나를 달고 있는 표 장군(기주봉 분)의 이야기다. “이수혁이 좀 봐. 쟤는 혼자서 두 마리나 죽이고 왔잖아!” ▲ 영화 속에서 한국군 수뇌부가 북한군을 세는 단위는 '명'이 아니라 '마리'다. [사진=공동경비구역 JSA 스틸 이미지] 남한의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 북한의 오경필 중사와 정우진 전사, 그리고 북한군 장교 한 사람이 공동경비구역 북측 초소에서 ‘의문의 합류’ 중 북한군 장교와 정우진 전사가 총격에 사망한다. 북한 오경필 중사는 북측으로 튀고, 남성식 일병은 남측 초소로 도망치고, 다리에 총상을 입은 이수혁 병장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와 구조된다. 북측 초소로 싱겁게 ‘마실’을 다니다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든 이수
공동경비구역 내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한가운데엔 남북분단 경계선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으로 한발자국만 넘어서도 ‘월북’이라는 시비에 휘말리는 엄중한 경계선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선 사병들이 이 군사경계선을 옆집 가듯 수시로 건너 다닌다. 그리고 결국 비극적 사건이 벌어진다. ▲ 군사경계선을 드나들며 정을 나누던 남북 병사들은 파국을 맞는다. [사진=더스쿠프] 북한군 초소에서 서로 형ㆍ동생 하며 초코파이를 나눠 먹던 남북 병사들의 ‘잘못된 만남’은 파국을 맞는다. 전역을 앞둔 이수혁(이병헌 분) 병장은 남성식(김태우 분) 일병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북한 초소를 방문한다. 정들었던 북한군 초소병 오경필(송강호 분) 중사, 정우진(신하균 분)과의 이별을 아쉬워한다. 모두들 이별을 앞두고 착잡하다. 남북 병사들이 어울려 ‘마지막 만남’을 아쉬워하고 있는 초소에 북한군 장교가 무심코 들러 문을 열다 두 남한 병사들과 마주친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하고 손 턴다’고
영화 ‘사막의 라이언(Lion on Desert)’은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문명적 충돌’을 아랍인의 시각에서 제작해 서구 극장에 올린 거의 유일한 영화다. 서구인들이 반길 리 없다. 항일투쟁기 영화를 만들어 일본에서 흥행몰이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3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해 고작 13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 이탈리아 최정예 사단과 기갑부대도 무크타르의 게릴라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일러스트=케티이미지뱅크] 1981년작 ‘사막의 라이언’은 분명 흥행면에서는 ‘폭망’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찌 보면 흥행 참패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던 것도 같고, 크게 흥행을 고려하지 않고 제작된 듯도 싶다. ‘사막의 라이언’은 이슬람 세계의 서구와의 ‘문명적 충돌’을 아랍인의 시각에서 그려낸 영화다. 서구사회에서 크게 환영을 수 없는 주제였던 것이다. ‘사막의 라이언’이 그린 리비아의 독립투사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는 당시 리비아의 절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