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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7) 정신분열병이 '조현병'으로 개명한 이유

 

친구 C가 9월 학회지에 실린 논문 <정신의학 문헌에서 살펴본 조현(attunement)의 의미: 현상학적-인류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조현병>을 한 장 한 장 스캔 떠서 보내주었다. 논문만 보면, 학회에서 정신분열병(Schizophrenia)을 조현병(調鉉病)이란 신조어로 대체한 것은 정신분열병이 가진 어둡고 부정적 이미지 개선을 위한 목적은 맞지만, 더불어 병의 생물학이나 물리주의 측면을 강조하는 의지로 짐작한 건 나의 완벽한 오해였다.

 

이 논문은 현상학으로 불리는 후설, 하이데거 철학이 밝힌 존재(주체, 자기)와 세계관계를 토대로 ‘조현’(attunement) 개념을 설명하고, 그 개념으로 학회가 정신분열병을 '조현병'(조현이 안되는 병)이라 개명한 근거를 뒷받침했다.

 

이런 것도 일종의 학문간 '통섭'인지, 일부 유럽에서 유행했다던 실존주의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개념응용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오래 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었고 최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 유명 철학 고전을 읽었다는 친구 C가 왜 이 논문을 칭찬했는지, 덧붙여 이번 겨울에 읽으려고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샀다고 했는지 그건 대략 알 것 같다.

 

 

서양철학 기본 소양이 없어 관련 논문 한편으로 의미를 또렷이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 논문 일별로 관련 내용을 말해 본다는 건 어쭙잖고 심지어 용기를 내야 할 일이다. 현상학은 상호주관성(相互主觀性, Intersubjectivity)이 주체(자기, 정체성) 형성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주체는 세계와 ‘상호주관성’(핵심 개념인 것 같다)을 통해 자리 잡는다. 물론 당장은 상호주관성이 우선이지만 일방통행은 아니다. 주체는 되새김 반응처럼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더욱 온전하고 단단하게 형성되고 자리 잡는다. 세계와 주체간의 조응(調應)이요, 조율(調律) 과정이다. 상호주관성과 주체는 유기적 관계다. 결국 주체는 ‘유아독존’하는 게 아니라 ‘세계-내-존재’다. (갑자기 신영복 교수 <강의>가 떠오른다. "관계론입니다. 동양사상이 대게 그러하지만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입니다. 연기론, 화엄(華嚴)...")

 

얼핏 언어학에서 출발했다는 구조주의도 연상되었다. 고종석은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2012년 개정판)에서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는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구조주의 발원지가 언어학이었기 때문에 구조는 곧잘 언어를 의미하기도 했다. “언어는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다.” 그가 어떻게 분석을 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는 없지만 이른바 후기구조주의자라고 분류되는 정신과 의사 라깡은 무의식을 언어학과 튼실하게 연결시킨 이론으로 정신분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논문은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에 관심을 둔 것이라 '언어를 배우기 이전' 세계와 상호주관성, 주체 형성에 초점을 맞췄고 언어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신분석 한 갈래인 <대상관계이론>에서도 정신발달과 관련해서 ‘자기’(self)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혀왔고 그와 연관해서 정신분열병을 ‘자기 병리’로 설명해왔다. 자기와 대상(object) 인식도 대상이 먼저이고 자기 형성이 뒤따르는 것으로 선후 관계를 밝혔다고 생각한다. 명쾌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인식과 감정, 대상과 세계 등 용어에 담긴 미묘한 개념 차이는 있었다. 자기(주체) 형성 과정, 자기와 대상(상호주관적 세계)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미묘한 차이를 벗어난다면,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은 <대상관계이론>과는 달리 ‘무의식’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돌아가자. 현상학은 상호주관적 세계(구조주의의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와 주체의 발생과정과 관계, 주체가 무엇인지 그렸다. 상황은 주체가 ‘자연스레’ 느끼고 반응하던 상호주관적 세계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심지어 생소하다. 세계와 관계하는 주체의 핵심 정체감도 따라서 부자연스러워진다. 흔들린다. 총체적으로 ‘조율’이 안 된다. 이것이 자기(주체) 병리다. 정신분열병(Schizophrenia) 핵심증상들인 환청이나 망상 등은 오히려 상호주관성 상실과 자기 병리에 따라 2차적으로 발생한 바깥 증상이다. 정신분열병의 핵심 병리는 상호주관성 세계와 ‘조율’하지 못하는 자기라는 것이다.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으로 개명한 이유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여기서 도돌이표 질문이 있다! 주체가 병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유기적으로 관계하는 상호주관성 세계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스럽던 세상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성 세계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체에 병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돌이표. 물론 이건 말장난이요 생트집이다. 철학이 정신병의 원인과 병리를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다.

 

동료 B는 현(絃)이란 말에 신경다발도 연상된다고 말했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정신’은 육체라는 악기가 내는 '화음'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여기서 육체를 오로지 뉴런, 신경다발 덩어리인 뇌라고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무 단순한 물리주의, 생물학 비유라고 할 지 몰라도 나는 조현병(調絃病)을 우선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세계와 주체(자기) '조율' 장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그 다음 이야기라는 거다.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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