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아내는 선배 2명과 제주도 3박4일 여행을 다녀왔다. 그 때 어디선가 안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렌트카 회사와 묵었던 호텔 등에 전화하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허사였다. “안경이 없어 TV보기도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더니 안경을 새로 맞추러 나가기 직전 아내는 다시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예~. 5만원권 무늬 안경닦이가 들어있는 무테 안경, 맞아요. 감사합니다.”
렌트카 회사에서 제주공항까지 태워다 준 차량에 두고 내린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아내는 렌트카 회사의 세심함에 연거푸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경을 되찾은 것은 제주도가 아내에게 준 여행의 즐거움 외의 큰 선물이었다.
내가 제주도를 처음 찾은 건 ‘서울의 봄’이 있었던 1980년이었다. 그 해 5월 대학가는 시위의 연속이었다. 서울역 앞 대규모 시위가 있은 후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됐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다. 정국은 꽁꽁 얼어 붙었다. 대학생은 서울 시내를 걷는 것 조차 힘들 때였다. 수시로 검문, 검색이 실시됐다. 검색 때문에 가방을 들고 종로거리를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었다. 거리에 여럿이 모여 말하는 것도 위험시 되던 때였다.
여름이 찾아오고 푹푹 찌는 더위가 ‘좌절된 청춘’을 더욱 끓게 만들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고향 친구들과 생각해 낸 것이 제주도였다. 3명이 함께 떠나기로 했다. 여행 기간만은 ‘시국에 대한 얘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에 모두 찬성했다. 현재로부터의 도피를 꿈꿨다.
◇서너 병씩 먹은 멀미약 탓에
당시는 비행기 값이 비싸 목포까지 기차로 간 후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3명은 고향집이 있는 대전에서 만나, 야간 기차를 타고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에서의 기억은 두 가지. 1980년 8월, 처음 나온 담배 ‘SUN(선)’을 목포에서 처음 봤다. 흰 포장지에 붉은 글씨의 상호 표시가 몹시도 강렬했다. 또 한 가지는 과다한 멀미약 복용.
일행 중 한 명만 빼고 배를 타고 큰 바다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2년 전 조그만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간 적이 있는 데 모두 토하고 야단 났었어.” 이 제주도 여행 경험담이 문제였다.
우리는 한 약국에서 물약으로 된 멀미약 한 박스를 샀다. 배 타기 전 3명이 모두 나눠 마셨다. ‘만사 불여 튼튼.’
그러나 배는 컸다. 대형 페리호였다. ‘제주도 유경험자’가 타봤다는 통통배(아리랑호라고 기억)수준이 아니었다. 어스름 무렵 목포를 출발해 밤바다를 통과해 다음 날 아침 제주도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그날따라 바다는 고요했다. 이 큰 배가 목포를 출발해 인근 섬 사이를 빠져 나가는 사이, 벌써 약 기운이 돌았다. 당시 멀미약은 사람을 졸리게 하는 성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어 모두 선실로 내려가 한숨 자고, 다시 갑판에 올라와 아름다운 밤바다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참이 흘렀을까. 잠에서 깨어나 갑판에 올라가니 이미 해는 떴고 저 멀리 제주도가 보였다.
◇버스 차장이 남자인 게 너무 신기해
제주도는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을 줬다. 야자수 등 열대성 나무는 이국적 정취를 느끼게 했다. 왠지 다른 나라에 있는 도시 같았다. 당시론 흔치 않은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생소한 사투리도 이질감을 줬다.
현실의 시국 상황을 떠나 며칠 간 살기로 작정한 우리들은 이곳을 아예 외국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정하니 하나 하나가 새로웠다.
제주도에선 이동하는 데 미니 시외버스를 주로 탔다. 그런데 차장이 남자였다.(당시 다른 도시들은 차장이 여성이었다.) 남자가 버스비 걷는 돈가방을 어깨에 맨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여행 내내 우리는 이들 흉내를 내며 큰 이유도 없이 웃고 다녔다. 그 정도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나이였다.
성산포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한 아저씨가 “민박 이수과”하며 접근한다. ‘이수과’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긴 바지 중 한쪽만 걷어 올린 옷차림이 특이해 우리들 관심을 끌었다. (제주도를 떠난 후에도 우리들은 이 아저씨 말투를 흉내 내며 웃곤 했다)
◇고등어 새끼 잡는 데 정신 팔려
결국 이 아저씨와의 인연으로 예정보다 하루 더 성산포에서 머물게 됐다. 이곳에선 귀중한 추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급히 낚싯줄과 낚시바늘을 사서 아들을 따라 나섰다. 포구에 가니 이미 많은 동네 사람들이 고등어를 잡으러 나와 있었다. 고기잡이 배들이 환하게 포구에 불을 밝히고 잡아 온 멸치 박스들을 내려 놓고 있었다.
한 켠에선 포구 바닥에 떨어진 멸치를 낚시바늘에 꿰어 바다에 던졌다. 고등어 새끼들이 포구 가까이까지 접근해 낚싯대도 필요 없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낚시바늘을 던지면 바로 고등어가 멸치 미끼를 물고 올라왔다.
낚시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그 묵직한 손맛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주민들은 고등어 새끼는 너무 흔해서인지 다시 놔 주고, 갈치만 양동이에 담았다. 갈치가 미끼를 물고 튀어오르며, 포구 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그 몸체가 어찌나 환상적이던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등어 대풍이었다. 우리는 내내 끓여 먹고 지져 먹고, 고등어를 물릴 때까지 먹었다. 성산포를 떠날 때는 고등어를 손질해 소금으로 절인 상태로 몇 마리 가지고 떠났다. 민박집 아주머니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중문에서 만난 7살 티모시
막 개발이 이뤄지던 중문에 도착했다. 해변가가 멀리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점에 텐트를 쳤다. 당시 중문엔 호텔은 고사하고 어떤 시설도 있지 않았다.
티모시는 우리 텐트에 수시로 놀러왔다. 최근에 새 차를 샀는지 자동차 자랑이 대단했다. “우리 차는 볼보인데 스웨덴 자동차로 성능이 아주 좋다”는 걸 늘어놨다. 당시 우리는 집에서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을 때였다. 티모시가 “자동차 시트가 저절로 따뜻해진다”고 말해 우리 모두 “무슨 거짓말이냐”고 몰아붙이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당시 왜 어린 꼬마와 자동차 얘기로 열을 올렸는지.
그런데 그 티모시가 보고 싶다. 내 젊은 시절을 기억해 줄 것 같은 티모시와 성산민박집 아저씨가 보고 싶다.
그 후로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 그러나 1980년 8월의 제주도처럼 강렬한 기억은 없다. 다만 제주도는 나의 22살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조한필은?=대전 출생. 고려대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고대사를 전공했다. 중앙일보 편집부와 전국부 기자를 지냈다. 현재는 충청타임즈 천안·아산 주재기자 겸 부국장으로 재직하면서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