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인생사와 같습니다. 바둑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바둑을 두어보면 상대방의 인격과 품성이 드러나 좋은 벗을 만나게 됩니다”
1983년 12월 18일 제주시 칠성통 제주기원에서 창립총회와 바둑대회를 열어 백록기우회의 초대회장에 선출됐던 박동일(朴東日, 45년생, 제주시 일도2동 371) 법무사의 말이다.
백록기우회는 제주 바둑을 사랑하는 김형유 왕위, 한용철 아마4단과, 박동일, 이우순, 홍영기 아마 3단, 홍성칠, 이기탁 등 아마 2단, 오행조 아마 초단 등 아마 2급 기력을 가진 23명이 창립했다. 제주도병무청에 근무하던 김형유는 제주일보사가 주최하는 왕위전 2기(1968년)에 이어 12기(1978년)~14기(1980) 왕위 등 5차례 왕위를 차지한 제주바둑계의 최강자였다. 김형유는 83년부터 89년까지 끊겼다 부활한 1990년의 17기 왕위전 준우승을 끝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 제주를 떠났다. 왕위전이 열리지 않게 되자 바둑동호인들이 백록기우회를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박동일은 임기 1년의 회장을 초대에서 3대(1986년)까지 연임했고 1997년 14대 회장도 지냈다. 창립 임원은 부회장에 김형유, 총무에 김동욱 등이고 김형유는 1987년 4대 회장을 지냈다. 주요 회장으로 박영수가 7대(1990년)~ 9대 회장을, 김기형이 10대(1993년), 17대(2002년) 회장을 지냈다.
당시 제주시내 기원은 제주기원, 칠성기원, 광양기원, 한국기원 등 5곳. 제주기원을 중심으로 백록기우회가 운영됐다.
박동일 창립회장이 백록기우회의 탄생에 맞춰 내건 것은 제주바둑계의 기도(棋道)문화 조성이다. 기원은 물론 사회에서 독버섯처럼 번져가는 도박성 내기를 끊고 내기 없는 건전한 게임의 바둑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백록기우회가 먼저 내기 없이 바둑을 두는 것을 솔선수범하자며 내기 바둑을 없앴다.
백록기우회는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왕위전을 주관했고 1991년~1992년 백록배 전도아마바둑대회를 주최하였으며 하찬석, 윤기현, 장수영, 김희중 등 프로기사들을 초청, 대국을 벌였다. 매월 회원간 정기 월례바둑대회를 지금까지 열고 있고 현재 회원 수는 27명이다.
박동일의 바둑 시작은 늦다. 안덕면 덕수리 출신인 그는 대정고 때도 바둑을 두지 못했다. 1963년 제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옛 제주도립병원 입구 쪽 남문로의 2층 기원을 찾으면서 바둑을 두었다. 어쩌다 바둑을 두다보니 재미가 있어 주말마다 기원을 찾게 됐다. 처음 18급에서 9급 바둑이 되면서 바둑을 더 잘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조남철의 ‘바둑정석’, ‘바둑개론’ 바둑책과 틈틈이 ‘월간 바둑’을 집에서 읽고 실전 기보를 따라 바둑을 두며 익혔다. 오늘의 그의 바둑 실력은 책에서 80%, 실전에서 바둑을 두며 익힌 것을 20%로 볼 정도이다. 67년 대학을 졸업할 때 쯤 그의 실력은 3급으로 늘었다.
박동일은 체신공무원 시험에 합격, 68년 서귀포우체국 효돈 분국에 근무했다. 이때 서귀포의 동갑내기 오정숙(吳貞淑)과 결혼했다. 이어 69년 3월 육군에 입대, 72년 2월까지 35개월간 강원도 양구의 2사단 31연대 연대본부 행정과에서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복무기간이 길어진 것이다. 군대에서 상관이 바둑을 좋아하면 편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그에겐 행운이 없었다. 그에게 2~3점을 까는 하수(下手) 장병밖에 없었다.
검찰 사무직 9급(당시 5급) 시험에 도전하여 합격, 73년 5월 강원도 원주지검에서 출발했다. 바둑에 몰입, 몰두하지는 않았지만 취미를 넘어서 바둑 실력을 기원 1급 수준으로 기력을 높이기로 목표를 정했다. 때마침 일본 바둑계에서 한국의 조치훈의 성적을 내기 시작할 때였다. 원주의 일본책 전문서점에서 월간 ‘일본기도’ 책을 구입하고 직장에 늘 들고 다녔다. 이때 국내 월간 ‘바둑세계’에서 포석(布石)과 중반전, 사활(死活), 끝내기 등의 실력을 가늠하는 문제 4~5개로 실력을 인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에 응시하여 아마 초단부터 차례 차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춘천, 서울지검 등을 거쳐 1983년 9월 초 제주지검 수사관으로 오고난 뒤에야 제주에서 아마 4단 자격을 땄다. 10여년이 걸렸다.
군과 직장 생활에서 바둑을 잘 두면 그런대로 인정을 받는다. 그에겐 바둑을 좋아하는 상관이 없어 큰 혜택은 없었지만 머리가 좋다는 평가가 절로 따라 붙는다. 머리가 나빠 멍청하다는 업신여김은 절대 없어지는 것이다.
박동일, 그에게 바둑은 인격 도야의 마음 닦음이다. 바둑 두는 것 자체가 즐거워 최고의 여가선용이다. 바둑을 두다보면 상대방의 품격이 절로 드러나 좋은 벗은 물론 훌륭한 선‧후배를 만날 수 있어 남과 사귐에 있어 최선의 선택법이 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제주불교 사회단체인 붇다클럽의 4대 회장도 지냈다. 백록기우회 초대회장을 지냈기에 왕위전의 심판위원장은 늘 그의 몫으로 10여 년 간을 맡았다. 바둑대회를 여는 주최, 주관을 맡는 입장이어서 바둑대회 입상 경력은 없다.
박동일은 2004년 ‘현대수필’ 추천작가 수필가로 등단했다. 이어 2007년 ‘시사문단’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2012년 봄 ‘늦게 나온 달빛’ 제목의 시집도 펴냈다. 그의 수필과 시에는 바둑 주제가 녹아있다. 그의 목표는 바둑 주제의 시리즈 시를 발표하는 것으로 한창 구상 중이다. 일부 시인 등이 쓴 바둑 주제의 작품들이 있으나 작가의 바둑 실력이 낮기 때문에 바둑 철학의 진수, 묘미가 덜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구상의 이유이다.
그가 좋아하는 기사는 이창호다. 이창호는 모든 분야에서 기본이 탄탄하여 바둑교본에 따라 바둑을 두기 때문이다. 그의 바둑은 날카롭지도, 엉성하지도 않고 바둑 순리 그대로 거의 완벽한 바둑을 보여준다는 것. 이창호를 통해 남이 없는 기량을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창호는 나이는 어리지만 훌륭한 인격을 갖춰 더욱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박동일은 “바둑은 내가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100점이 아닌 70~80점의 바둑 수를 두는 실수가 있기 때문”으로 본다. 눈에 안 보이는 실수지만 그 실수는 집의 수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한 번의 실수가 결국 승패를 결정짓고 만다는 것이다. 치명적 실수는 만회가 불가능하고 재기(再起)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바둑의 반상(盤床)과 인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승부의 판가름은 집중력으로 본다. 집중을 잃으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바둑인의 공통된 바람은 실력이 느는 것. 박동일은 “늘고 싶어야 는다”고 말한다. 자나 깨나 목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바둑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꼽는 방법의 첫째로는 정석공부이다. 프로는 정석을 배워서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아마에게는 배워야 할 정석은 꼭 익혀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실전 기보를 자꾸 놔봐아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또한 바둑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는 2~3점을 먼저 놓아두는 상수(上手)와 바둑을 두는 것이다. 이때 마구 두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레 최선을 다해 둘 때 상수와 실력이 좁혀진다고 말한다. 같은 실력의 동수와 두는 것이 재미는 있지만 실력은 늘지 않는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바둑책을 꾸준히 보는 것이 실력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제주바둑을 위해서는 ‘어린이 바둑의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바둑은 어릴 때 배울수록 성장도가 높기 때문이다.
☞장승홍은?
= 연합뉴스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끝으로 은퇴한 원로 언론인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제주지부장, 제주불교법우회 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와 청소년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제주청교련 회장도 지냈다. 청년시절부터 다져온 바둑실력은 수준급이다. 제주바둑계의 원로와 청년을 두루 아우른 친교의 폭이 넓다. 최근 본인이 직접 취재현장에 나서 제주바둑계의 역사를 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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