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29일. 제주도지사로서 첫 출근을 했다. 1974년 농림부로 가면서 제주도를 떠난 이래 근 20년만의 귀향이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제주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전진의 깃발을 올려야 된다는 것이 포부였다. 그만큼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중압감 또한 컸다. 출근한 첫날 난 비서실에 두 가지를 지시했다. 도지사 집무실의 응접용 탁자와 의자를 전부 사무용으로 바꾸도록 했다. 더불어 도지사 집무실과 접견실을 서로 맞바꾸도록 했다. 도지사 집무실은 화장실까지 갖춘 넓은 공간인 반면 도지사를 찾아오는 도민들을 만나는 접견실은 좁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지사 출근시간을 오전 8시로 정하고, 결재나 보고가 필요한 직원은 오전 8시30분부터 도지사실로 와도 좋다고 말했다. 도정방침은 취임사의 내용에 맞춰 <1. 활력있는 제주산업, 2. 균형 있는 제주개발, 3. 자조하는 제주정신, 4. 헌신하는 제주행정>으로 정했다. 여기까지는 쉽게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됐다. 그런데 도정슬로건은 무얼할까를 망설였다. 집무실 벽에 새겨진 도정 캐치프레이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임 우근민 지사 시절 쓰던 슬로건을 보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
위기의 순간엔 기회도 다가온다고 했던가? ‘6공의 황태자’ 박철언에게 찍혀 미국으로 쫓겨난 내 처지는 너무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1년의 시간은 후일 제주도정을 책임지게 된 나에게 ‘금쪽 같은’ 자양분이었다.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자리를 얻은 난 아내와 함께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의 펄스처치(fallschurch)란 조그만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다. 허름한 원룸 아파트였다. 그곳에 살면서 난 학교를 오갔고, 아내는 집안 일을 돌봤다. 농림부 소속인 신분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눈길이 가서 난 조지타운대 근처에 있는 미국 농무성 산하의 경제조사연구소(ERS: Economic Research Service)를 자주 들렀다. 세계의 농업현황에 대한 자료가 풍부해 그곳에서 참 많은 자료들을 들춰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제주출신이어선지 그곳에서 세계 오렌지시장 현황에 대한 자료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생과와 가공용 오렌지의 원산지와 수·출입 실태를 많이 탐독했다. 제주도지사 시절 감귤정책은 이때 알게 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물&rsqu
때는 1990년 12월5일 새벽 5시. 전날 굳은 결의를 마음 속으로 다지고 YS의 서울 상도동 집을 찾았다. 그리고 집 앞에서 기웃거리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조깅을 나간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가는가?”라며 난감해 하던 차였다. 혹이나 하는 마음에 대문 옆으로 난 쪽문이 보이길래 두드려봤다. 웬 할머니가 문을 열더니 날 빤히 쳐다봤다. “어찌 오셨수?” 후일 YS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가 특유의 칼국수 솜씨를 선보인 할머니였다. 청와대로 간 뒤 언론에서 ‘밥 할머니’로 꽤 유명세도 치른 분이다. 그 분에게 간단한 소개를 하고 “대표님을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다”고 여쭙자 기다리라며 손짓을 하고 안으로 쑥 사라졌다. 그리고 5분여 뒤 집안 한 켠으로 안내를 받았다. 들어가보니 한마디로 진풍경이었다. 수십명의 기라성 같은 ‘백성’(?)들이 좁디 좁은 방 안에 주욱 줄지어 있었다. 더욱이 황당하게도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강보성 전 장관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 분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l
마음의 빚을 졌다. 밝히는게 도리라고 보기에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낸시 애덤스(Nancy Adams). 한-미간 쇠고기 협상 타결에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0년 봄까지 이어진 한-미 협상에서 미국측 수석대표였다. 당시 칼라 힐스(Carla A. Hills)가 대표였던 미국 무역통상대표부(USTR)의 부차관보 신분이었다. 그녀는 집요했다. “한국은 OECD 반열에 이미 진입했고, 시장개방 일정표를 내놓으라는 GATT의 평결을 수용했다. 더 이상 쇠고기 시장개방을 미루면 GATT 협정의 슈퍼 301조 조항에 따라 일부 품목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와 관세부과 등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으름장이었다. 난 이에 대해 “양국의 축우산업에 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공동조사단을 꾸리자”며 맞서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 1990년 1월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시절 한미 쇠고기협상 수석대표로 미국 대표인 낸시 애덤스와 경기도 광주의 한 축산농가를 방문, 현장실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한미 쇠고기 협상단이 경기도 광주의 한 축산농가를 찾았다. 1990년 1월의 일이다. 그러다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일
세상 이치를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게 어떤 자리에 오르고자 할 땐 그리 어렵더니 느닷없이 농림수산부 안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인물이 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난 마치 물을 만난 듯 주요보직을 꿰차기 시작했다. 농림수산부 총무과장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농업공무원교육원 교수부장이 됐다. 1983년 내 나이 만 41세에 불과하던 때다. ‘똥차’ 취급 받으며 거의 쓰레기 하치장으로 밀려나는 격이었던 내가 농림부 내에서 최연소로 국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걸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보안사의 두 친구 덕으로 봐야 할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최선을 다했다. 늦은 밤 술 한잔을 걸치고 한풀이나 하던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주어진 기회를 살려 최선을 다해, 보란 듯이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 ‘제주 촌놈’에게 이제 기회가 온 만큼 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 초임 공무원 시절 아내, 큰 아들과 함께 한 모습 그 때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기도 과천시에 정부 제2청사가 들어서던 1983년 무렵이다. 농림부는 과천행이었다. 서울시내에서 출퇴근하는 건 무리였고, 공무원들의 이주를 권장해 과천시
이승택 지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1974년 3월의 일이다. 사무관급 신분이던 난 농림수산부 농특사업국 기획계장이란 자리에 앉았다. 정소영 장관은 예상대로 청와대에서 2년간 경제수석으로 국가의 경제정책을 총괄지휘했던 분 다웠다. 농림수산부의 핵심을 두루 간파하고 있었고, 여러 획기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식량증산이 그 당시 다급한 문제인지라 정 장관은 우선 주식인 쌀 절약에 매달렸다.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진 것도 그 때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장관직을 잘 수행하시던 그 분이 돌연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75년 12월로 기억한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정 정관의 퇴임으로 난 외톨이가 됐다. 난 그분을 청와대에서 모시면서, 그분의 식견과 추진력에 탄복했던 터였다. 오로지 그분만을 믿고 농림수산부 행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막상 장관직을 버리고 떠나자 난 철저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서울의 공직자 사회에 제주출신은 찾아보기도 어렵고, 또 난 잘난 서울법대 출신도 아니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농림수산부의 요직은 서울대 중에서도 서울농대 출신이 꿰차고 있는 현실이었다. 서울농대 출신은 흡사 '마피아'
제주도지사로 취임하면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던 내 옛 얘기는 고교시절로 그치지 않는다. 솔직히 1993년 지사 임명장을 받고 가는 제주행 항공기에서 난 수많은 사연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 신구범 전 제주지사의 29대 도지사 취임식 장면 다시 농림부에 가기 전 제주도청에서 근무하던 때 얘기다. 내가 초임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던 때 도지사는 정우식 지사였다. 다혈질적인 분이었다. 당시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그 역시 육군 헌병대 대령 출신이다. 제주지사로 부임하기 전 서울시경찰국 국장을 역임하셨다. 그런데 성정이 워낙 거셌고, 군출신 특유의 성격 탓인지 지사 집무실에 결재를 받으러 온 간부 공무원들이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정강이를 걷어차는 일이 예사였다. 차분한 성격의 이군보 기획관리실장(차후 도지사 역임)님도 지사실에 업무보고를 하러 갈 때는 나를 지사실로 들여 보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정우식 지사는 나에게 그리 거세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때도 스포츠 머리를 하고 지냈다. 그런 나에게 기껏 하는 얘기는 “까까머리가 그래도 좀 하네”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하루는 지사실에 들어가 잔소리를 듣게 됐다. 이것 저것 보고자
1993년 제주도지사가 돼 고향에 돌아온 건 사실 나에겐 꿈이었다. 어찌 보면 나같은 놈이 그리 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한 학력이지만 사실 난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닌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재임도중 한 단체의 모임에 들러 파안대소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조천읍 신촌리) 내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다른 집은 밭이라도 있고, 무언가 풀칠이라도 할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밭떼기 하나 없었고, 솔직히 겨우겨우 연명하다시피 생활하는 처지였다. 아버님 일거리 따라 움직이다보니 초등학교를 6곳이나 다녔고, 그래도 다시 고향에 정착해 어찌어찌 조천중학교까진 졸업했다. 쑥스럽지만 중학시절 ‘공부 1등’ 자리는 놓쳐보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에 돈이 없다보니 고교 진학 얘기는 입에서 꺼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그렇게 1년을 놀았다. 그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세월을 보내는 내 처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워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눈물 나도록 공부를 하고 싶었다. &ldqu
1967년 8월17일 사무관급으로 제주도청에 첫 출근을 하고 나서 며칠 뒤. 내가 받은 첫 지시는 밤잠을 설치도록 만들었다. 한 여름에 “월동대책 세우시오?”란 말에 난 아득했다. 솔직히 며칠간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란 소린가?” 잠자리에서도, 사무실에 앉아서도 도무지 궁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리 저리 물어가면서 하나하나 대책이란 걸 만들어 보고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이군보(나중 제주도지사 역임) 실장님의 눈빛은 차가웠고, 이곳 저곳을 뜯어 고치는데 꼼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분은 나를 꼼꼼하게 가르쳤다. 아직도 난 그 분의 성실과 진지, 미래를 보는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최근에 그 분을 뵌 적이 있다. “그때 저를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드렸다. 그 분은 그저 지긋이 웃기만 했다. 나는 그렇게 제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6년여의 세월을 보냈다. 그 기간 중 지역계획과장, 기획관을 역임했다. 지역계획과장 시절엔 청와대로 파견, 제주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정소영 경제수석 밑에서 제
2012년 제주호의 항해는 어느 곳을 향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모진 풍파와 악천후를 만나서도 이겨냈고, 어떨 땐 쾌조의 순항도 거듭했습니다. 모두 우리 제주인이 합심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건 그 시대에 숨겨진 얘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과거를 살았고, 역사를 보았던 시대의 인물이 있습니다. 제이누리는 이제 그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그들의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봅니다. 그들의 인생사를 통해 미래를 향한 슬기를 얻고자 합니다. 먼 미래를 향한 제주호의 항해에 다시금 좌표를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보내온 글이 연재의 첫 순서입니다. 제이누리는 신 전 지사 이외에도 격동의 현장을 목도한 제주의 인물을 발굴, 연재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편집자 주 해가 떠오를 때 난 제주의 비상을 꿈꾼다. 해가 질 무렵 난 제주에 지혜의 샘이 솟고 있다고 믿는다. 성공도 있었지만 과오도 많았다.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제주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갖췄는가라고 자문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제주도민들에게 너무도 죄송스런 때가 많았고, 도민의 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