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후 강정마을 커뮤니티센터에서 강정마을 주민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의 절차적 문제 등에 대해 강정주민들에게 사과했다. [사진=제주도청] “국가안보를 위한 일이라고 해도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강정마을 주민 공동체는 붕괴되다시피 했다. 대통령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11일 오후 4시30분 강정커뮤니티센터. 문재인 대통령은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강정마을 주민들을 향해 '사실상' 사과했다. 또 “이제 강정마을에는 치유와 화해가 필요하다”며 “믿음을 갖고 주민들과 소통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시각. 대통령이 강조한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이 커뮤니티센터 밖에 있었다. 또 다른 강정마을 주민들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 10년의 갈등을 이제는 100년의 갈등으로 키우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 송석언 제주대 총장이 28일 제주대 본관 3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학과 교수 갑질 의혹과 관련해 발언을 하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28일 오후 2시 제주대 본관 3층 대회의실. 송석언 제주대 총장과 기자들이 자리를 마주했다. 예정된 기자회견에서 그는 멀티미디어학과 A교수의 ‘갑질’ 논란과 관련, 지금까지의 추진 경과와 부서별 조사 진행상황, 학교측 대응, 향후 계획 등을 화두로 꺼냈다.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과 학생들은 지난 6월 12일 “A교수가 평소에 해왔던 폭언, 인격모독, 교권남용, 외모비하, 성희롱 등의 부당행위들에 침묵하지 않겠다”며 수업과 평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어 제주대 공과대학 2호관에 해당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교내 곳곳에 관련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부착했다. 제주대 인권센터는 같은달 15일 ‘인권성평등침해심의위원회’를 열고 직권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또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A교수에 대해서는 학생과의 접근금지 조치를 했다. 같은 달 16일과 17일에는 교무처 차원에서 A교
▲ 제주4.3 70주년 추모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 인근의 동백꽃 4·3 70주년 행사장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몇 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동백이 무참히 지고 난 4월의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흰 국화꽃을 손에 들었고 또 누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모두들 조금씩은 슬픔의 지분을 나눠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제주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 중 벌어진 민·관의 충돌이 발단이 됐지만 그것은 형식적 사실일 뿐 사건의 진실은 아니었다. 그 이면엔 좌·우 대립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고 민족의 비극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2만5000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제주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죽었다. 억울함과 황망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핏방울처럼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는 남쪽 어느 지방에선 망자의 사잣밥을 전하는 도구로 쓰인다. 동백나무 줄기에 떡을 매달아 물가에 드리우면 죽은 자들이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운다는 것이다
유례가 없던 6일간의 폭설. 폭설은 한파를 동반, 제주를 초토화시켰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사고와 재난.재해도 속출했다. 눈이 잦아지고 낮 기온이 영상을 회복한 9일의 제주는 모처럼 평화롭다.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폭설 기간 겪었던 피해와 상처가 너무나 컸고 후유증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정의 무능과 탁상행정, 그리고 안전시스템의 부재를 또다시 절감해야 했다. “재난이 올 때마다 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도민들의 몫”이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지난 3일부터 도청과 각 행정시에 항의.민원 전화가 빗발쳤다. 폭설이 내렸던 지난달 11일과 12일보다 빈도수가 더 많을 뿐 아니라 그 강도에서도 비교할 없수 없을 만큼 격앙돼 있었다는 후문이다. SNS상에 올라온 비난수위는 더 높았고 신랄했다. “제주도는 뇌가 없는 집단”, “눈이 그친 후 기온이 올라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는 걸 수십 년 지켜봤다”, “지난 번에도 그렇게 혼나고서도 반성이 없다”는 등 격렬한 반응이 들끓었다. &ldq
▲ 폭설이 내린 지난 11일, 신제주로터리에서 차량 몇 대가 서행을 하고 있다. 도로 전체가 쌓인 눈으로 가득하다. 역대급 폭설·강풍·한파가 이틀째 제주를 덮쳤던 지난 12일. 제주도민은 침착했다. 승용차를 아예 집에 뒀다. 출근길 시민들은 애당초 마음을 비우고 버스로 향하는 발길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고립’을 자초하고 생업을 포기한 사람도 많았다. 덕분에 폭설로 인한 교통사고는 드물었다. 우려했던 ‘출근길 대란’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해마다 반복된 ‘학습효과’에 힘입은 제주도민들의 재난대처 방식이다. 기습적인 폭설로 교통사고로 1명이 사망하는 등 수십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전날 11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제주도정의 재난대처는 무능했다. 도지사를 중심으로 대책본부를 꾸려 재난대응을 진두지휘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제설작업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대책본부의 관심은 제주공항에만 쏠렸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2016년 1월 3일간의 폭설대란에 등장한 8만9000여명의 제주 체류객, 또 공항
▲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4월3일 열린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2006년 4월3일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4·3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4·3위령제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그해 3월 12일 탄핵 파동으로 참석이 어려운 처지가 됐다. 2006년 4·3위령제에서 그는 “국가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돼야 하며 일탈에 대한 책임을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며 4·3영령과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그 이전인 2003년 10월 말 제주를 찾아 유족들 앞에서 정부수반으로서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된 일'이라는 걸 확인, 공식 사과한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저는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
▲ 15일 오후 중국인 관광객들이 빠진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15일 오후 제주시 연동 바오젠거리. 중국인으로 들끓던 거리였지만 한산하기만 하다.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중국어 소리가 들끓던 거리였지만 들리는 소리는 한국말이다. 손님으로 들끓던 상점가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 매출도 며칠사이 70%나 줄어 업주들은 울상이다. 중국이 ‘한국관광 전면금지’ 조치를 내린 첫 날 바오젠거리 풍경이다. 2011년 9월 15일, 제주에 첫 ‘명예거리’가 생겼다. 2011년 9월 중국 건강용품 업체인 바오젠 그룹이 직원 1만1000명이 방문했다. 이후 대규모 중국관광객들이 이 거리를 찾았고, 제주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바오젠거리’로 지정했다. 이후 바오젠거리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언제나 붐볐다. ‘제주 속의 중국’으로 불릴 정도다. 거리의 간판은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많고, 가게 앞에 내건 현수막도 중국어가 대부분이다. 지난해 6월 바오젠거리의 도로명 사용 기간이 만료됐다. 하지만 제주도는 중국 관광객 폭주 추세에 맞춰 ‘바오젠거리’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10일 오전 11시 21분 이정미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이 입을 뗐다. 그간의 촛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하지만 촛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대통령 파면결정 선고가 내려진 당일 퇴근 무렵. 제주시청과 서귀포 1호광장에선 긴급 촛불집회가 열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사람들은 잔치떡을 돌리며 서로를 격려했다. 눈물을 흘린 이들도 있었다. 촛불은 여느 때보다 밝았다. 촛불을 든 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 자리에서 박찬식 육지사는 제주사름 대표는 “우리나라를 소수권력자들의 나라가 아닌 국민·인민의 나라로 대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수가 뒤따랐다. 집회에 참가한 김미선(31·제주시 용담동)씨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김씨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국민 80%가 촛불로 통합됐다"며 "일어나선 안될 일이었지만 어찌됐든 국민을 하나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앞으로 20%의 국민들과도 함께 가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곳곳에는 ‘민주주의여 행복하라’, ‘고생
▲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왼쪽 첫번째)가 6일 제주항일기념관에서 열린 '자유·법치·사회 회복을 위한 시국강연회'에 참가했다. 6일 오후 2시 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기념관. ‘자유·법치·사회 회복을 위한 시국강연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입구에 펼쳐져 있다. 강연장에는 ‘행주치마 의병대’라고 적힌 태극기를 둘러매고 한 손엔 태극기를 든 이들로 가득했다. 족히 100여명은 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분위기도 있었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마치 대치하듯 그 반대편에는 ‘3·1영령을 욕보이지 마라’. ‘항일정신 산교육장에 이념논쟁 웬말이냐’라고 적힌 피켓을 든 제주4·3유족회와 시민단체 회원들.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며 “신성한 이곳에서 지금 무얼 하려 하느냐”며 고성이 오고 갔다. 급기야 서로에겐 욕설과 막말이 오갔고 일부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편이 든 피켓을 부수고 어깨를 밀치는 등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여분 뒤 자리가 정돈됐
지난 12일 오후 7시 제주시청 어울림 광장 일대. 2000여명의 인파가 빼곡히 자리를 잡았다. 손에 쥔 건 모두가 촛불. ‘박근혜 정권 퇴진·하야’를 요구하는 손팻말을 든 이들의 얼굴에 비장감이 흘렀다. 특정 정파도, 여느 노동운동 세력도 아니었다. 어린이 손을 잡고 현장을 찾은 부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는 청년, “내가 지난 선거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도 후회한다”는 한 60대 노인, 교복을 입고 나온 중·고생들. 남녀노소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의 외침은 모두 하나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발언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자유발언에 나선 한 고등학생은 “어렵게 꽃피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되찾아야 한다”며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시각 서울 광화문에서도 소식이 들려왔다. 몰려든 인파는 100만. 여러 미디어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최대 인파’라고 뉴스를 쏟아냈다. 박종철·이한열 두 대학생의 비통한 죽음과 맞물려 정권말기 폭정의 끝을 향해가던 1987년 6월 민주
대형사고는 우연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경고성 징후가 수없이 등장하고 난 뒤 사고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333의 법칙’이란 말도 있다. 경미한 300여차례의 신호, 다시 30여차례의 경고, 그리고 단 3번의 강도 높은 경고. 그 이후 거대한 재난에 직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 이른다. 사소하게, 무관심하게, 소홀히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대형사건·사고는 어느덧 우리 코 앞에 등장하게 된다. 추석연휴 막바지이던 지난 17일 제주시 연동의 한 성당. 고요한 아침 미사를 올리던 한 여성신자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느닷없는 참극이었다. 중국인 관광객이 휘두른 흉기에 스러지던 그의 비명은 재난이자 대형사고였다. 영결미사에서 “난개발의 열병에 시달리던 제주가 맞닥뜨린 참혹한 메시지”란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의 진단이 내려꽂힌 지점이었다. 제주 여느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평범한 한 가정의 행복은 그렇게 무참히 깨졌다. ‘하인리히 법칙’을 운운할 필요도 없다. 과연 그동안 이런 사건의 전조는 없었나?
어떤 현상을 종합적으로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낸 것이 있다. 사회나 자연현상을 정리·분석하는 수단, 즉 ‘통계’다. 지난 5월 국토교통부는 ‘2016년 지적통계연보’를 발표했다. 그러자 제주도가 관할하는 7개의 부속섬이 돌연 사라졌다. 사라진 것만이 아니다. 갑자기 ‘섬’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돌연 등장한 섬들도 있었다. 심지어 필지와 면적도 뒤죽박죽이었다. 직접 국토부의 2016 지적통계연보와 제주도 디자인건축지적과의 지적공부등록 도서현황, 제주도 해양수산국의 무인도서현황을 살폈다. 그 결과 지적통계와 지적공부에는 9개의 유인도와 78개의 무인도가, 무인도서현황에는 8개의 유인도와 79개의 무인도가 있었다. 국가와 제주도는 물론 정작 제주도청 안에서도 관리하는 섬이 제각각이었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생각하고 있는 섬의 기준도 달랐고 필지와 면적도 달랐다. 유인도 수는 우도의 비양도를 섬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차이였다. 무인도 개수를 따지고 들어가자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표면상 차이는 7개였지만 사실 13개의 섬이 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