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담1동주민센터 김혜영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 명만 낳아도 애국자라고 불러대니, 누가 나더러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기라도 하면 우스갯소리로 마냥 즐거워하기에는 마음 한켠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저출산 극복을 위한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 출산 극복 정책으로 정부에서는 보육료 지원, 양육수당 지원 등 아이 낳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원하는 출산장려금, 출산여성 산후조리 한약할인지원사업 외에도 용담1동에서 추진하는 특수시책으로 무럭이 통장’은 용담새마을금고와 용담1동주민자치위원회, 그리고 우리 동 직원상조회에서 협약을 맺어 용담1동에 출생등록을 한 아가의 이름으로 총 5만원이 적립되는 통장을 기부하는 사업이 작년부터 시작되어 작년에 46건, 올해 현재까지는 11건이 교부되었으며 고귀한 생명의 탄생을 축하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 출산 문제는 아직도 심각하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고 게다가 직장맘이기 때문에 출산을 꺼려하는 엄마들의 마음
▲ 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 최근 제주 언론들은 일제히 "10일 만에 엄청난 변화",“도지사는 흡족, 간부는 진땀” 등의 제하(題下)로 “제주자치도 4월 중점추진사항보고회”상황을 집중 보도하였다. 무려 3시간 5분 동안 이루어진 보고회에서 국장급 간부들은 보고 자료에 도표와 그래픽 사용 등을 사용하였다는 전황도 소개하였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는 그동안 도지사가 주안점을 두어왔던 민생과 현장행정에 포커스를 맞춰서 보고는 이루어졌다. 특히 도정에 대하여 불리하게 나타난 지역 언론 보도내용에 대해서 간부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새로운 정부의 국정기조에 맞출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각 부처 장관들의 업무보고 내용도 진언되었다. 이런 간부들의 자발적이고 정성(?)들인 보고에 도지사가 감탄하며 매우 흡족했다고 한다. 도지사는"지난 번과 보고가 너무나 달라져서 도지사가 놀랄 정도다. 칭찬한다"라고 했다. 업무보고 후 도지사의 강평에서도 도지사는"지난 번 보고에서는 이해가 안 갔는데 오늘은 이해가 간다"며 "어떻게 10일 만에 이
2011년 1월29일 영등포교도소 문이 열렸다. 높다란 담장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서자 고마운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김성흡 전 도의회 사무처장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이들이 와줬다. 눈물겨웠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곧바로 난 서울의 둘째(신용규) 집으로 갔다. 이틀을 둘째아들 집에서 머무르고 1월31일 제주로 왔다. 하지만 사실 주변과는 연락을 끊었다. 몸도 마음도 세상에 나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두문불출하다 설을 사흘 앞둔 2월10일 아내와 난 한적한 어느 중소도시로 무작정 떠났다. 아내와 한 며칠 쉬다 올 요량이었다. 그 도시에서 이틀간 머물며 설날인 13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한 교회를 찾아 아내와 주일예배도 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눈여겨 두었던 스테이크 하우스 'OUT BACK'이란 곳에서 아내와 함께 점심을 했다. 그 때였다. 우리 부부가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어떤 분이 우리 식대를 내고 가더라는 것이다. 우릴 알아볼 이도 없는 곳인데 의아했다. 물어보니 그 지역에서 복지사업을 하던 단골 40대란 것이 고작인 정보였다. 다
하루 종일 올레 코스에서 쓰레기 줍다 지금까지 나는 제주 올레코스 유지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에 대해 잘 몰랐었다. 나는 올레코스를 그냥 걸었다. 올레 리본과 화살표를 따라 태평스런 여행을 했다. 평일에 받은 스트레스를 다 풀었다. 좋은 추억 만들고 아주 단순하게 보냈다. 그렇지만 이런 추억을 올레꾼들에게 주기 위한 그 배경에는 제주올레 자원봉사 그룹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같이 평범한 올레꾼들은 쉽고 편안하게 올레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자원봉사그룹 중 한 그룹의 이름은 ‘클린 올레’다. 이 그룹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쓰레기를 줍는다. 매달 다른 코스에서 진행한다. 3월 9일. 32명. 저지마을 14코스 시작점 10시에 클린올레 자원봉사들이 모였다. 나도 그날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우리는 저지부터 협재해변 근처까지 쓰레기를 주웠다. 올레코스를 걷는 동안 지역이 바뀌면 쓰레기 종류도 바뀌었다. 예를 들면, 밭 앞에는 병과 로프, 농산물 쓰레기가 많았다. 숲길에는 오렌지 껍질, 사탕 포장지, 담배꽁초, 물병들이 많이 발견 됐다. 특히 숲 휴게소 벤치 옆에 쓰레기가 많았다. 우리가 해안에 도착하니 쓰레기가 진짜 많이 있었다.
▲ 서부소방서장 정해국 최근 사회 외부환경이 건물의 초고층화, 복잡화로 변모하고 있는 시점에 119활동이 보다 광범위해지고 있으며, 재난발생 유형 또한 다양화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변화의 핵심가치를 변화에 대한 빠른 적응력으로 직시하여 정책방향을 설정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목표를 달성하게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2년 국민생명보호정책의 성공적 수행으로 화재사망자를 저감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일반주택화재 사망자의 증가와 현장대원의 안타까운 희생이 잇따라 이에 근본적인 예방대책을 마련하여 2013년에는 재난에 안전하고 행복한 국민만들기 정책인 ‘국민행복 안전정책’ 추진에 본격 돌입했다. 세부 추진내용을 살펴보면, 선진형 화재안전기반 구축을 위해 취약가구 소방안전복지서비스 및 화재안전관리 주체의 자기책임성 강화를 위한 능력제고 정책, 소방활동 안전사고 줄이기를 위한 안전관리 종합대책 추진 등이 포함되어 있다. 현장안전관리정책은 소방공무원의 상황별 위험예지 훈련 및 안전관리의 내부적인 노력으로 성과 달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 주택 소방시설 설치 및 다중이용업주 및 관계인 소방안전 관리능력 제고방안과
▲ 양성철/<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지금 말하지만 난 그 ‘폭도의 수괴’로 불렸던 이덕구의 아들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코흘리개이던 신촌초등학교 1학년 동급생이자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았던 벗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역시 지금 세상에 없다. 4·3사건이 종반전으로 치달을 무렵 어느 날 경찰의 손에 붙들려 갔고, 후일 들은 얘기지만 경찰관도 차마 그냥 총을 겨눌 수 없어 놓아주고 도망치게 한 뒤 총부리를 겨눴다고 한다. 너무도 아픈 우리네 역사다. 그 어린 영혼이 무슨 죄가 있다고 숨져가야 했는지 그 참담했던 제주의 시련이 아직도 마음을 후빈다.” “삼양지서가 습격 당했을 땐 새벽에 군경 토벌대가 한 달 된 갓난애까지 포함해 전 주민을 신촌초등학교에 불러세웠다. 기관총이 내걸리고 전원이 몰살 당할 위기였다. 그런데 삼양출신인 한 경찰관이 ‘무고한 백성을 죽이려면 나를 쏘고 죽여라’고 맞섰다.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 사람 덕에 마을 사람 다수가 살았다. 하지만 군경 토벌대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을 주민들을 신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불러 세워 연령대 별로 마
요즘 치과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도대체 누가 이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교도소 수감 시절 ‘엉터리’ 치료를 받은 이유 탓에 듣는 말이다. 수감시절 이를 감싼 보철이 떨어져나가자 일주일에 한번 오던 순회진료 의사에게 이를 맡겼다가 그 꼴이 된 것이다. 지금 날 진료하는 치과의사는 “돌팔이가 보철한답시고 생이를 깨 버리더니 발치(拔齒)한답시고 이 뿌리는 놔두는 바람에 염증이 생겼다”고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아마 갓 치대를 졸업한 서투른 친구의 의술에 나보다도 더 분통을 터뜨린 것 같다. ▲ 축협 중앙회장 재직 시절 농축협 통합반대운동을 벌일 때 축협 통합전산센터 직원들이 MT 현장에서 신 전 지사를 응원하는 기념촬영을 했다. 교도소 내 진료는 그 정도로 열악하다.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기도 어렵고,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기도 어렵다.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수감 1년여가 지나면서 난 우연히 침과 뜸에 생각이 다다랐다. 교도소 안에서 신문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결과다. 신문기사는 구당 김남수옹의 정통 침뜸연구원을 소개하는 기사였고, 그가
▲ 강철수 제주시주민생활지원과장 사회복지공무원이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들어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는 5월 결혼을 앞둔 여성공무원과 가정을 갖고 있는 30대 중반의 가장도 포함되어 더욱 안타까움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한결같이 숨지기 전 유서에는 가족과 동료, 국민들에게 “ 근무하기가 너무 힘들다” 고 하소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살인적인 업무폭주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압박감, 불안감, 공직사회의 회의감속에서 하늘나라를 선택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민원인들로부터 입에 담기 힘든 언어폭력에 시달려왔다. 사회복지업무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업무라 항상 거친 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족을 못 드렸을 때는 경우에 따라서는 신체적 위험까지도 노출되기도 한다. 또한 함께 근무하는 동료직원들의 관심부족과 삭막한 사무실분위기도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 이처럼 복합적인 문제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요인들을 만들어 낸 결과다.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장의 한사람으로서 매우 통탄스럽고 책임을 깊게 느끼게 한다. 복지재정이 급속한 증가로 선택적복지에서 보편적복지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복지업무가
▲ 신용인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해군은 해군기지 건설에 이어 강정마을에 군관사를 건립하기 위해 어제 오후 김정문화회관에서 사업설명회를 열었으나 강정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의 격렬한 반발로 파행을 겪었다. 강정주민들은 군관사 건립을 해군기지 건설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 군관사 마저 건립이 된다면 마을을 해군에게 송두리째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해군이 강정마을에 군관사를 건립하는 이유가 강정주민들에게 군관사 건립을 약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군 입장에서는 구태여 강정마을에 군관사를 건립할 이유가 없으나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건립한다는 것이다. 2007년 해군기지 건설부지로 강정마을이 선정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 해군은 꼭 강정마을에 지을 이유는 없으나 강정주민들이 유치결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해군기지 건설사업을 추진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무엇이었나? 강정마을 공동체는 찬반으로 갈리며 완전히 붕괴되었고, 반대 주민들은 체포ㆍ구금되고 3억 원이 넘는 벌금 폭탄을 맞았으며, 4ㆍ3 이후 최초로 육지경찰이 대규모로 들어와 상주하여 마을이 준전시상태로 돌입하는 등 강정주민들은 지금까지 이루 말할 수
▲ 제주도 총무과장 문영방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창의적이며 혁신적이냐에 따라 그 조직이 성패가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애플”과 일본의 “소니”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처럼 열심히 일만하면 됐던 시대는 지나가고 얼마나 똑똑하게 일하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공직사회도 열심히 일하다가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면 감사에 지적되고 추궁 당하느니 적당히 문제가 안 생길 정도로 과거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는 인식 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신명나게 일 할 수 있는 여건과 동기부여가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우리도에서는 창의력과 능률, 직원들의 의견존중, 자유로운 의견개진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신명나는 일터를 조성하기 위하여 행정역량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일할 때는 집중해서 하고 쉴 때는 확실히 재충전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조직으로 변모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공직자의 친절 생활화를 한층 업그레이드하여 도민들로부터 친절도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내부고객인 공직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더 정확히 말하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이가 느닷없이 구치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형님’ 타령을 하니 난감했다. 막 수감돼 들어오던 이가 내 방 쇠창살을 붙들고 다짜고짜 ‘형님’으로 부르길래 난 방문으로 다가가 왜 나를 형님으로 부르느냐고 정색하며 물어봤다. 솔직히 그가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이란 걸 난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말한 사연은 이랬다. 그는 1980년 15년형을 언도받고 1995년 만기 출소, ‘조폭세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선언한 뒤 어느 날 제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와 친분이 있던 강영철 제주시의회 의원(훗날 제주시의회 의장 역임)과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들끼린 서로 막역한 사이였고, 강 의원이 날 따르던 지라 그가 끌고 내 집무실로 대동하고 온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인사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가물가물 그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다. ▲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이 첫 만기출소 뒤인 1996년 자신이 대본을 쓰고 출연한 영화 '보스'의 포스터다.
▲ 반기성/ 제이누리 기상전문위원, 케이웨더 예보센터장 스칸디나비아반도에 본거지를 뒀던 바이킹 족들은 가장 험한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북위 60도 이북에 위치한 이 지역은 강한 바람과 많은 눈·비,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도 더 추운 날씨를 보이는 곳이다. 이들은 척박한 땅, 햇빛을 거의 보기 힘든 자연조건, 북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 인해 애초부터 농사를 지어 풍족한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러기에 주변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다른 지역을 침략해 식량을 약탈하며 살았으며 특히 바람과 파도를 접하는 게 비일비재했다. 그들은 늘 바다와 하늘을 관찰하며 살아왔다. 고위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인 빙광(氷光·극지방과 같이 늘 얼음으로 덮인 곳에서 빛의 반사로 공중이 밝게 빛나는 현상)을 발하는 높은 빙하를 보며 살았고 오랫동안 수로를 항해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얼음 상태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했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날씨와 관련된 속담이나 징후가 가장 많은 곳도 바로 바이킹 지역인데 그들의 삶과 날씨가 매우 밀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바이킹 사람이라면 어떤 해류를 이용해야 항해를 잘 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또한 바다표범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