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라는 말은 일단 결코 유쾌하지 않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영화 제목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다. 포스터의 글씨체도 ‘기생충체’로 꼬불꼬불 그려놓아 제목만 봐도 속이 스멀댄다. ‘기생충’에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프랑스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나 프랑스 관객들은 꽤 비위가 좋은 모양이다. ▲ 우리 사회 곳곳에 기생충들이 과연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케티이미지뱅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회충·촌충·편충 같은 기생충들이 직접 출연하진 않으나 관람하는 내내 자연 도감에서 본 기생충들의 온갖 모습이 떠올라 떨치기 힘들다. 그 끔찍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내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고역이고 악몽이다. ‘무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관람을 주저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아마도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는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법적으로는 해방됐지만 실질적인 해방과 평등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은 곧 평등’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고 해서 일본과 평등해진 게 아닌 것처럼, 흑인들이 노예로부터 해방됐다고 즉시 백인과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 21세기 한국에선 많은 재벌이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까지 미국의 남부 일부 주에서는 학교와 극장과 같은 공공시설, 화장실은 물론 대중교통수단까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주에서는 영화 속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흑인은 일몰 후엔 외출조차 금지됐다. 심야에 백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자리에 점잖게 앉아 국도를 달리던 돈 셜리는 흑인이 밤중에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된다. 백인들의 호텔 파티에 피아노 연주자로 초청된 돈 셜리지만, 화장실은 호텔 밖 ‘뒷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노예에서 해방은 됐지만 흑인들은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못하
1960년대로선 흔치 않게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 돈 셜리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야만성’을 체감하고 고민할 법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흑인 인권운동에 나서긴커녕 눈길조차 안 준다. 차별과 탄압에 대책 없이 울부짖는 흑인들도 꼴 보기 싫고, 거칠고 폭력적인 저항도 ‘인텔리’ 흑인이 보기엔 가당찮을 뿐이다. ▲ 모두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상대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인종차별의 모순과 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최고조였던 1960년대, 미국의 ‘이슬람 국가(Nations of Islam)’ 운동도 절정기를 맞는다.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자신들을 구원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백인들의 신’인 예수를 포기하고 예수와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듯한 마호메트에게 달려가 하소연해 보기로 한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적의 적을 만나면 터무니없는 동지애가 불끈거리고 엔도르핀도 솟구친다. 말콤 X(Malcolm X)로 대표되는 이슬람 국가의 전
돈 셜리 박사는 흑인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백인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길 갈망한다.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지적이며, 백인들만의 배타적 영역인 클래식 피아노에도 발군의 역량을 지녔다. 객관적으로 백인보다 뒤처지는 구석이 없다. 백인 중에서도 능히 상위 1%에 들 만한 자격을 갖췄다. ▲ 어느 편에 설지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박쥐 같은 사람들이 넘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이란 나라는 ‘시민 민족주의(civil na tionalism)’ 국가가 아니라 불행하게도 ‘인종 민족주의(racial nationalism)’ 국가다. ‘시민 민족주의’는 시민권을 부여받으면 누구든 같은 국민으로 받아들이지만, ‘인종 민족주의’ 사회에서는 시민권을 부여받아도 피부색이 다르면 그 시민권을 100% 인정해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주민등록증이라고 다 같은 주민등록증이 아닌 셈이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인종차별이 극성을 부리던 1960년대 미국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돈 셜리는 인종차별의 모든 불합리한 억압
돈 셜리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발휘해 18세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로 인정받지만 ‘흑인은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없다’는 1940년대 현실적 장벽에 좌절한다.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해 박사가 된 그는 음악의 꿈을 접을 수 없어 피아니스트의 삶에 재도전한다. ▲ 짝퉁은 항상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야 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속에 그려지는 흑인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저항과 타협의 모든 모습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여준다.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난들 흑인이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걸 절감한 돈 셜리는 피아니스트 자리로 돌아오면서 전략적 타협을 선택한다. 백인들의 배타적 영역인 클래식 피아노를 포기하고 대신 흑인들에게도 허용되는 재즈 피아노로 방향을 수정한다. 그러나 클래식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어서 ‘클래식 재즈 피아노’라는 묘한 포지셔닝을 택한다. 좋게 보자면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라고 할
미국도 우리네처럼 알게 모르게 ‘족보’를 따진다. 미국 시민권이 있다고 모두 똑같은 미국인이 아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주류 사회는 흔히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통칭된다.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다. 백인이되 영국 앵글로색슨 혈통이어야 하며, 남유럽계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여야 한다. ▲ 모두가 갑질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모두가 갑질의 피해자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이란 나라의 인종차별 문제는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제여서 어지간해서는 심드렁해지기도 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주제다. 그러나 영화 ‘그린 북’은 토니 발레롱가라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등장시켜 미국의 인종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라틴계이며 가톨릭 전통을 지닌 이탈리계 미국인은 ‘진골’이나 ‘육두품’ 어디쯤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와스프의 ‘성골’ 신분은 아니다. 토니는 클럽에서 ‘성골’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느날 클럽이 내부수리를 위해 휴
피터 패럴리(Peter Farrelly) 감독의 ‘그린 북’은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ㆍ각본상ㆍ조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00만 달러(약 239억원) 정도의 제작비가 든 이 작품은 전세계에서 3억 달러 (약 3578억원) 이상을 벌어들였으니 평단과 관객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흔치 않은 성공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그린 북'은 미국의 영원한 스캔들이자 흑역사의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린 북’은 미국의 영원한 스캔들이자 흑역사라 할 수 있는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다.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대부분의 영화가 칙칙하거나 우울한 경우가 많은 반면, 이 영화는 어두운 주제를 ‘버디 무비’와 ‘로드 무비’라는 형식을 빌려 경쾌하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돈 셜리(Don Shirley)’ 박사는 ‘비록’ 흑인이지만 명문대학교의 사회학 박사이자 클래식 재즈 피아니스트다. 미국 북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인종차별이
우리는 수많은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큐멘터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간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신봉하기도 하고, 그것이 다큐멘터리이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많은 위인전은 대개는 파이의 표류기 같은 동화인 경우가 많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다큐멘터리처럼 믿고 싶어 한다. ▲ 우리는 '동화 같은 이야기'와 '다큐멘터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간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도 소년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무려 227일간 겪는 표류기다. 보통 표류기도 아니고 구명보트에 무시무시한 벵갈 호랑이와 동승한 표류기다. 사나운 호랑이를 길들이기도 하고, 어부처럼 낚시를 해서 호랑이와 사이좋게 나눠 먹기도 한다. 어떤 날은 갑자기 날치들이 하늘을 뒤덮을 듯 날면서 구명보트 가득 쌓이기도 한다. 표류 중 무인도를 만나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숲속으로 돌아가고, 파이는 항해를 계속해 결국 구조된다. 참으로 기적 같고 동화 같은 표류기지만 관객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스페인 부부 사이서 태어나 캐나다에 정착한 작가가 자신과 관계가 ‘1’도 없는 인도 소년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 아마도 기독교를 비롯한 배타적 ‘유일신 체계’가 아닌 힌두교라는 ‘물렁한’ 종교의 미덕을 생각해보고자 한 것인지 모르겠다. ▲ 아무리 '신념'이 짓밟혀도 그 '신념'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파이의 가족이 신봉하는 ‘채식주의’라는 가치관은 캐나다로 향하는 이주선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요즘은 비행기 기내식단도 채식주의자와 당뇨병 환자들을 위한 메뉴가 따로 마련되지만, 당시 호화유람선도 아닌 화물선 주방장에게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고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파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은 모두 채식주의자이니 고기는 빼달라’며 요청하고 채식요리를 원한다. 주방장의 적대적인 반응이 이어진다. 영화에서 이 한 장면 등장하는 화물선의 너절한 주방장 역을 무려 프랑스 국민배우로 유명한 제라르 드파르디외(Gerard Depardieu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소년 파이의 종교는 힌두교다. 파이는 어린 시절 친구와 동네 성당 입구의 성수(聖水)를 훔쳐 마시자는 내기를 한다. 감히 ‘성수’에 손대는 소년을 발견한 성당 신부는 ‘목이 마른 모양이구나’ 라며 성수 대신 생수를 주는 관용을 베푼다. 이후 파이는 ‘왠지 예수라는 사람이 좋아졌다’고 술회한다. ▲ 이념도 단일신관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도 모두 좋은 이념들일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 뱅크] 파이가 보여주는 신앙관은 흥미롭다. 인도 타밀족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파이의 종교는 자연스럽게 힌두교일 수밖에 없다. 힌두교는 문자 그대로는 ‘인도의 종교’를 뜻한다. 인도에서 기원된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자이나교를 배제한 의미로 사용된다. 특정한 교조나 교리, 중앙집권적 권위나 위계조직이 없이 다양한 신앙 형태가 융합된 종교인 힌두교 안에는 거의 모든 형태의 종교가 발견된다. 융합적 태생 덕분에 다른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이름이 남아있는 한 사후(死後)에도 그 사람은 존재한다. 당연히 이름이 없어지면 그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다. 옥스퍼드 언어학파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름은 생명이며 존재 자체다. ▲ 다른 사람이 나와 나의 이름을 존중해 줄 때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질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우리가 대개는 아무 생각 없이 부르고, 또는 불리는 ‘이름’을 생각하게 한다. 인도 타밀족인 주인공 소년 파이(Pi)의 정식 이름은 ‘피신 몰리토어 파텔(Piscine Molitor Patel)’이다. ‘몰리토어(Molitor)’라는 인도에서 다소 생소한 이름이 들어간 이유는 그의 삼촌이 프랑스 파리 여행 중 묵었던 호텔의 수영장 물의 깨끗함에 감동해서 갓 태어난 조카의 이름에 생뚱맞게도 파리 호텔 이름을 넣은 것이다. 그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삼촌의 축복이었는지 모르겠다. 파리
리안(李安) 감독에게 2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준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2012년)’는 스페인 태생 캐나다 작가인 얀 마르텔(Yaan Martel)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2001년 출판돼 전세계 50여 개국에서 1200만부 이상 판매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대만의 거장 리안 감독이 유려한 솜씨로 스크린에 풀어냈다. ▲ 인행의 고생길에서 한탄만 한다면 길가에 핀 꽃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와호장룡’ ‘색ㆍ계’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리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2006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거장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 역시 관객과 평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호평을 받으며 2012년도 아카데미 감독상을 차지했다. 얀 마르텔의 원작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굳이 분류하자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쯤 될 것 같다. 수많은 고정 관념들로 가득 차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어른’들의 머리에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선사한다.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