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고담’시에서 아서는 혼자는 끼니도 해결 못하는 홀어머니와 허름하고 쇠락한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아간다. 무인도와 같은 삶이다. 어머니가 어느날 “사람들이 어느 시장 후보가 참 좋다고 하더라”고 아서에게 말한다. 아서는 ‘누가 그러더냐? 엄마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느냐?’며 시큰둥해 한다. ▲ 사람들은 '양지'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음지'에서라도 인정받기를 원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는 “TV에서 그러더라”고 방어한다. 딱한 장면이다. 아서가 하는 일이라곤 일용직 광고홍보맨을 파견하는 사무실에서 소개해주는 업소나 행사장에 찾아가 ‘광대’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게 전부다. 그런 아서의 초라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의 투명인간에 가깝다. 영화는 우울한 투명인간 아서가 그에게 어울릴 법한 허름한 보건소 사무실에서 권태로워 보이는 의사에게 우울증을 호소하며 처방약을 늘려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주인공 아서(Arthu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는 기묘한 정신병을 앓는다. 아서를 학대한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서에게 항상 예의 바르고 항상 웃기를 강요한다. 아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안, 분노를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야 한다. ▲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서로 어긋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주인공 남녀가 사랑하지만, 꿈 많은 여주인공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다. 세월이 흘러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고, 이번에는 여자가 청혼하지만 남자가 거절한다. 여주인공은 수습이 안 되는 이 ‘뻘쭘한’ 상황을 ‘어릿광대’라도 등장해서 수습해 줬으면 한다. ‘Send In the Clowns’의 노랫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실제로 중세시대 뮤지컬에선 출연자들이 대사를 잊는 난감한 상황에 대비해 어릿광대를 대기시켰다고 한다. 이 ‘불후의 명곡’은 영화 초반에 한번 등
주인공 아서(Arthu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줄곧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는 기묘한 정신병을 앓는다. 아서를 학대한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서에게 항상 예의바르고 항상 웃기를 강요한다. 아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안, 분노를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야 한다. ▲ '날것(생)'으로서의 감성적 욕망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페르소나(Persona)’는 가면의 라틴어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은 자신의 배역에 따른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과 걱정을 간직한 채 자신이 맡은 ‘밝은’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겠다. 서양 놀이인 트럼프에서 ‘조커’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가치 없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하는 존재다. 항상 웃고 있는 ‘조커’란 그렇게 대단히 슬픈 존재다
‘조커(joker)’는 ‘정의의 사도’ 배트맨의 대척점에 선 최악의 악당이다. 배트맨 시리즈는 썩 단순명쾌한 ‘선악 구도’로 짜여있다. 당연히 요한복음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이 실현된다. 어두운 하늘에 배트맨이 아침 해처럼 떠올라 조커가 드리운 무거운 어둠을 걷어낸다. 하지만 조커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의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악당 조커는 어찌 보면 영웅 배트맨의 존재 이유다. 조커가 없다면 배트맨은 할 일이 딱히 없다. 조커의 난동과 포악성이 극에 달할수록 배트맨의 활약이 절실하고 그만큼 눈부시다. 회색과 대비된 흰색보다는 완전한 검은색에 대비된 흰색이 더 눈부시다. 영웅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면 악당은 철저히 악당다워야 한다. 슈퍼 히어로가 있으려면 슈퍼 빌런이 필수적이다. 슈퍼 히어로의 탄생을 위해 오늘도 악당들은 괜히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노라며 핵폭탄 하나씩 들고 왔다갔다 하더니, 이젠 우주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다고 나댄다. 판이 점점 커진다. 슈퍼맨, 배트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작 ‘킹덤 오브 헤븐’은 거장의 명성이나 엄청나게 투입된 제작비에 비해 흥행 성적은 거의 ‘폭망’에 가까운 영화다. 감독이나 제작사가 흥행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왜 영화의 메시지를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듯도 하다. ▲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의 부정적인 측면만 비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 대전투를 따라간다. 세계 영화시장의 대부분이 기독교 국가라는 점과 9·11 테러 이후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교에 갖는 엄청난 적개심을 감안했다면, 당연히 기독교 세력을 ‘빛의 자식들(Son of Lightness)’로, 이슬람 세력을 ‘어둠의 자식들(Son of Darkness)’로 그려야 한다. 적어도 흥행을 고려한다면 그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런 편한 ‘흥행공식’을 거부했다. 그의 뚝심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아마도 스콧 감독 정도의 세계적 거장이었기에 제작사의 &lsq
“적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늘 용기 있게 선(善)을 행할 것이며, 생명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며 약자를 보호하라.” ‘기사의 서약문’이다.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는 아들 발리앙을 체포하러 온 법 집행관들을 도륙하고 죽음이 임박하자 발리앙을 기사로 임명한다. ‘킹덤 오브 헤븐’에는 혼란 중에 두차례 ‘약식’ 기사 서임식(敍任式) 장면이 나온다. ▲ 정치인에게서 정치인이 갖춰야 할 본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예루살렘으로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 이벨린의 영주 고프리는 사생아 발리앙을 대장간에서 조우해 동행한다. 발리앙은 이미 마을에서 사제를 살해한 몸이다. 이내 군사들이 쫓아와 체포하려 든다. 법 집행관들은 명색이 그래도 작위를 받은 고프리의 체면을 고려해 꽤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한 뒤 순순히 발리앙을 내어달라고 청한다. 발리앙도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한다. 그러나 고프리는 명예로운 기사답게 아들을 내어주기는커녕 부하들과 대뜸 칼을 뽑아 들고는 국가의 집행관들과 살육전을 벌인다. 집행관들은 몰살당하고 평생을 주
믿음(belief)은 신뢰(trust)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인식체계가 다르다. 신뢰가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라면, 믿음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영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신뢰는 그 신뢰에 반하는 정보들이 들어오면 약화되거나 깨지지만, 믿음은 아무리 많은 반대 정보가 있어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 믿음이라는 것은 경험의 문제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184년 프랑스의 대장장이 발리앙(올랜도 블룸)은 예기치 못했던 아내의 자살로 망연자실하고 세상에 미련도 없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자살한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독교적 ‘믿음’이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경험의 문제이거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을 목격한 적도 없고, 증언을 들은 바도 없다.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믿음은 떨쳐버릴 수 없이 강고하다. 자살한 아내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을 것을 두려워하던 발리앙은 어느날 마을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던 십자군 한 무리와 마주한다. 십자
리들리 스콧 감독은 흔히 말하는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는’ 거장 중 한사람이다.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2005년)’은 어마어마한 인원과 물자를 마음껏 동원해 제작한 대서사 드라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12세기 십자군과 이슬람군을 재현한 대규모 전투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돈 냄새’가 진동한다. ▲ 예루살렘은 특정한 신의 왕국이 아니라 모두의 '하늘(Heaven)의 왕국'이다. 막대한 제작비가 든 작품이지만, 전쟁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보기에 불편하고 어이없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왜 저렇게 죽고 죽여야 하나? 꼭 저래야만 하나?” 영화는 200년(1096~1290년) 가까이 7차례에 걸쳐 마치 대역병처럼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1187년 3차 십자군 전쟁 중의 가장 처절했던 ‘하틴(Hattin) 전투’를 보여준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3만명의 이슬람군과 유럽에서 원정 온 2만명의
동면에서 깨어난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호화 우주선에서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즐기는 ‘자유인’의 삶을 누린다. 안락한 잠자리, 최첨단 의료시설, 약품, 식량 등 아발론호는 생존을 위한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노동의 수고도 필요 없고,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자유인의 삶이 행복했을까. ▲ 진정한 자유는 '~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5000명의 대규모 우주 이주자들을 120년간 동면 상태로 조정해 태우고 떠난 아발론호에서 프레스턴은 기계 오작동으로 30년 만에 깨어난다. 오로라는 외로움을 못 견딘 프레스턴의 조작으로 역시 자의와는 상관없이 31년 만에 ‘깨어남’을 당한다. 프레스턴과 오로라는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짝을 이뤄 아무도 없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서 여생을 마친다. 물론 목적지였던 ‘홈스테드 II’라는 행성에 도착해 보지 못한다. 작가였던 오로라는 예기치 않게 우주선에서 프레스턴이라는 남자와 짝을 이뤄 보내게 된 자신의 일생에 후회가 없다는
우리는 모두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만큼 큰 고통이나 두려움은 없으며, 외로움은 또한 사람을 병들게 한다. 겁 없이 설치던 흉악범도 독방에 한달 가까이 처박아 두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영화 ‘패신저스’는 외로움에 관한 보고서다. 주인공 프레스턴은 없는 게 없는 초호화 우주선을 독점했지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시들시들 병들어간다. ▲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가정을 꾸려도 군중 속에 파묻혀 있어도 외롭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아발론(Avalon)’호를 타고 120년간 동면 우주여행길에 오른 프레스턴은 5000명의 승객 중에서 30년 만에 혼자 깨어난다. 아발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잠’과 깊은 인연이 있다. 영국의 전설 속 아서왕이 최후의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피신해 잠들었다는 섬이 바로 아발론섬이다. 아서왕은 그 섬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깊은 잠에 빠졌을 뿐, 영국에 또 다른 큰 변고가 생기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영국을 구할 것이라고 한다. 우주선이 위험에 빠지는 큰 변고가 일어나 우주선과 승객들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프레스턴은
5000명의 인간이 동면기 속에서 잠든 채 ‘아발론호’를 타고 외계 행성 ‘Homestead II’로 향한다. 하지만 120년의 여정을 목표로 떠난 우주선에서 프레스턴이 기계 고장으로 의도찮게 깨어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전장 1㎞에 달하는 우주선은 새벽거리처럼 인적이 없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시간, 홀로 텅빈 거리에 나선 꼴이다. ▲ 사람들의 칠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인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프레스턴은 텅빈 우주선을 돌아다니며 여러 기계를 작동시켜 본다. 안내데스크의 화면도 작동시켜 보고, 지구의 우주선 본사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기계가 들려주는 음성은 참으로 정확하고 상냥하지만, 프레스턴이 느낄 황망함에 대해선 무감각하다. 우리가 안내전화에서 흔히 듣는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지요?’라는 상투적인 ‘공감 멘트’마저 없다. 기계들이 내놓는 답변들은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다. 기계는 나의 마음이나 기분, 나만의 ‘문제’를 알 리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튼 틸덤(Morten Tyldum) 감독의 2017년 작품 ‘패신저스’는 장르나 구성면에서 꽤 독특하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주로 공상과학 영화가 많지만, 패신저스는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공상과학 로맨스’쯤 될 것 같다. 공상과학이 앞서는지 로맨스가 앞서는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보기에 따라 ‘타이타닉’의 우주 버전쯤 될 것 같기도 하다. ▲ 우리는 '작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 ‘타이타닉’이 대서양 한가운데서 조난당한 여객선 ‘타이타닉호’ 안에서의 러브스토리라면, ‘패신저스’는 대서양쯤은 접시물로 느껴질 만큼 그야말로 칠흑 같은 ‘망망우주’에서 조난당한 호화 우주선 ‘아발론호’ 속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타이타닉에서는 승객 1500명이 모두 조난자인 데 반해, 패신저스의 설정은 좀 특이하다. 승객 5000명 가운데 두 남녀 주인공만이 조난을 당한다. 매도 같이 맞으면 덜 아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