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은 퇴역 중령 슬레이드는 그야말로 ‘명예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적과의 전투나 임무수행 중 시력을 잃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슬레이드 중령은 객기를 부리다 수류탄 사고로 시력을 잃는다. 괴팍스러운 성격 때문에 퇴역 후 찾아오는 동료들도 없고, 함께할 가족도 없다. 그다지 살갑지 않은 조카 부부에게 얹혀사는 장애 중늙은이 퇴역 장교일 뿐이다. 그 신세가 딱하고 초라하다. ▲ 위기가 오면 안 보이던 영웅이 나타나고, 우리가 몰랐던 '민낯'도 드러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슬레이드 중령은 조카의 집 허름한 별채에 떨어져 거의 은둔생활을 하면서 알코올에 의지해 살아간다. ‘알코올 중독’ 같긴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나 주정뱅이 모습은 아니다. 소파에 흐트러짐 없이 정자세로 앉아 혼자 마실 뿐이다. 혼자 술을 마셔도 흐트러진 모습을 자기 자신에게조차 보이기 싫을 정도로 자존심 강하고 명예를 중히 여겨서인 듯하다. 보통 알코올 중독자처럼 아무 술이나 걸리는 대로 마셔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잭 대니얼스’만을 고수한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여인의 향기(1992년)’는 연기력이나 흥행성 면에서 ‘아카데미 상복’이 없기로 유명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쌍벽을 이룰 만했던 알 파치노의 한을 풀어준 영화다.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만 7차례 올랐던 알 파치노는 마지막 도전에 나선 고시생처럼 ‘미친 연기력’으로 홀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2시간 30분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의 연기력 때문인 듯하다. ▲ 탱고엔 '꼬인 스텝'이 없지만, 인생은 한번 꼬이면 '틀린 인생'이 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알 파치노)은 사고로 시력을 잃고 전역한 이후 실의에 빠져 술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괴팍한 성품 탓에 친구도, 가족도 없이 뉴햄프셔 교외의 허름한 주택에서 조카 부부에 얹혀살고 있다. 그 성격에 당연히 조카 가족들과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함께 살지만 뚝 떨어진 별채에서 홀로 지낸다. 심지어 네댓살 조카손녀하고도 앙숙일 정도이니 거의 스크루지 영감급이다. 추수감사절 휴가를 앞두고 조카 부부는 자신들이 여
죽은 자들이 보이고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9살 소년 콜은 ‘정상적(?)’인 학교 선생님이나 엄마가 보기에 분명 미쳤다. ‘미쳤다’는 말은 우리말의 가장 기본적인 어원으로 일컬어지는 ‘세소토(Sesotho)어’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럼 미친 건 정말 미친 걸까. ▲ '광인'과 '천재'를 구분하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길을 가다 보면 혼자 심각하게 대화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저 ‘아마 미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피해 지나친다. 콜은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는 죽은 자들의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말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미 죽은 말컴 박사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처참하게 죽어간 사형수들의 비명소리가 들려
‘식스 센스’의 시작은 마지막의 반전만큼이나 강렬하다. 성공한 아동심리학자인 말컴 박사가 필라델피아 시장이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와인을 곁들여 자축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행복한 장면은 왠지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이 치명적인 ‘대마大魔’가 등장한다. ▲ 내 주변의 누군가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대마는 과거에 말컴 박사가 상담치료를 맡았던 그레이라는 소년이다. 청년으로 성장한 그레이가 말컴 박사의 화장실에서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표정으로 덜덜 떨며 총을 겨누고 있다. 말컴 박사가 심리상담 전문가답게 ‘진정하라’고 달래며 다가가지만, 그레이는 말컴 박사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총을 발사한 후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레이를 치료하지 못한 게 말컴 박사의 역량이 부족해서였는지, 혹은 그가 의사로서 불성실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레이의 정신질환이 ‘신도 고치지 못할 병’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샤말란 감독이 보여주는 ‘반전反轉’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선과 악, 좋고 싫음의 반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반전이기 때문은 아닐까. 삶과 죽음처럼 극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는 달리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샤말란은 죽었는데도 죽었는지 모르는 말컴 박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 죽은 자가 죽기를 거부하면 참 딱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관객들은 주인공 말컴 박사를 ‘산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고 그의 언행을 분석하고 또 공감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샤말란 감독은 말컴 박사가 산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인데 ‘몰랐냐?’며 관객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한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따라다니고, 죽은 사람과 공감했다는 것이 문득 당황스럽다. 그를 따라다닌 관객 역시 죽었다가 깨어난 듯한 느낌이다.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우울한 꼬마 콜은 자신을 상담하는 말컴 박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말컴 박사는 콜의 고민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는 반전 영화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진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반전에도 흔히 ‘식스 센스급 반전’이라고 과장하기도 한다. 아동심리학 의사인 말컴 박사는 그레이라는 소년의 심리 치료에 실패했던 기억을 지우고 살아간다. 한 소년을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구하진 못했지만, 심리학 의사로선 성공한 말컴 박사. 반전은 거기서 시작된다. ▲ 반전은 독자나 관객들에게 단순한 재미 이상의 강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말컴 박사가 필라델피아 시장으로부터 그의 탁월한 업적을 기리는 표창장을 받고 우쭐하는 날, 대수롭지도 않게 잊고 지냈던 과거의 소년 환자 그레이가 청년이 돼 나타난다. 어린 그레이는 이미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영화는 그레이가 자신을 팽개친 말컴 박사를 원망하고 증오하며 그에게 총격을 가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자살하는 충격적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1년 후, 자신이 구하지 못한 그레이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말컴 박사가 의사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 잘못을 회개라도 하듯, 신경쇠약과 정신분
인도 출신으로 드물게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오른 M. 나이트 샤말란(M. Night Shyamalan) 감독의 1999년작 ‘식스 센스’는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초자연·심리·스릴러 계열쯤 될 것 같다. ‘육감’이라는 문제 자체가 분석적·이성적으로 파악이 안 되는 초자연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일 듯하다. 이번엔 식스 센스 속으로 들어가보자. ▲ 우리 사회의 문화.체제.제도 모든 부문에 수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식스 센스’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아 그해 아카데미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샤말란 감독의 각본을 읽어본 월트 디즈니사의 사장이 회사의 검토 절차와 승인도 없이 그 자리에서 300만 달러에 판권을 덥석 사버릴 정도로 신선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뛰어난 각본이었던 모양이다. 타이틀 롤은 브루스 윌리스가 맡고 있지만 ‘다이하드’ 시리즈를 통해 악당들에 맞서 혈혈단신으로 족히 1개 사단에 맞먹는 전투력을
아서(Arthur)가 출근하는 곳은 어릿광대 인력사무소다. 직장동료들을 만나는 장소라기보단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기다리는 대합실에 가깝다. 자주 보는 사이지만 “Hi” 한마디 외엔 달리 섞을 말이 없다. 복잡한 도시는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아서에겐 아무도 없다. 그래서 더 외롭다.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보다 양보하기 어려운 게 사회적 욕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위험한 징후다. ▲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제시한 '욕구 5단계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집에 돌아왔을 때 아서를 기다리는 건 침대에 몸져누운 홀어머니뿐이다. 불행하게도 아들의 따뜻한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아니다. 오히려 아서가 챙겨야 하는 ‘짐’이다. 아서는 퇴근해서 돌아와 기계적으로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반려견에게 개밥 깡통을 하나 따서 놓아주듯, 어머니 침대에 저녁식판을 가져다놓고 옆에 앉아 멍하니 TV를 본다. 하루 종일 혼자 빈집에서 TV만 보던 ‘엄마’는 아서에겐 아무런 관심도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가는 ‘고담’시에서 아서는 혼자는 끼니도 해결 못하는 홀어머니와 허름하고 쇠락한 아파트에서 단둘이 살아간다. 무인도와 같은 삶이다. 어머니가 어느날 “사람들이 어느 시장 후보가 참 좋다고 하더라”고 아서에게 말한다. 아서는 ‘누가 그러더냐? 엄마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느냐?’며 시큰둥해 한다. ▲ 사람들은 '양지'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음지'에서라도 인정받기를 원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는 “TV에서 그러더라”고 방어한다. 딱한 장면이다. 아서가 하는 일이라곤 일용직 광고홍보맨을 파견하는 사무실에서 소개해주는 업소나 행사장에 찾아가 ‘광대’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게 전부다. 그런 아서의 초라한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의 투명인간에 가깝다. 영화는 우울한 투명인간 아서가 그에게 어울릴 법한 허름한 보건소 사무실에서 권태로워 보이는 의사에게 우울증을 호소하며 처방약을 늘려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주인공 아서(Arthu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는 기묘한 정신병을 앓는다. 아서를 학대한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서에게 항상 예의 바르고 항상 웃기를 강요한다. 아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안, 분노를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야 한다. ▲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서로 어긋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주인공 남녀가 사랑하지만, 꿈 많은 여주인공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다. 세월이 흘러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고, 이번에는 여자가 청혼하지만 남자가 거절한다. 여주인공은 수습이 안 되는 이 ‘뻘쭘한’ 상황을 ‘어릿광대’라도 등장해서 수습해 줬으면 한다. ‘Send In the Clowns’의 노랫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실제로 중세시대 뮤지컬에선 출연자들이 대사를 잊는 난감한 상황에 대비해 어릿광대를 대기시켰다고 한다. 이 ‘불후의 명곡’은 영화 초반에 한번 등
주인공 아서(Arthu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줄곧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는 기묘한 정신병을 앓는다. 아서를 학대한 어머니는 ‘그럼에도’ 아서에게 항상 예의바르고 항상 웃기를 강요한다. 아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안, 분노를 ‘웃음’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고 살아야 한다. ▲ '날것(생)'으로서의 감성적 욕망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페르소나(Persona)’는 가면의 라틴어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배우들은 자신의 배역에 따른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과 걱정을 간직한 채 자신이 맡은 ‘밝은’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겠다. 서양 놀이인 트럼프에서 ‘조커’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가치 없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하는 존재다. 항상 웃고 있는 ‘조커’란 그렇게 대단히 슬픈 존재다
‘조커(joker)’는 ‘정의의 사도’ 배트맨의 대척점에 선 최악의 악당이다. 배트맨 시리즈는 썩 단순명쾌한 ‘선악 구도’로 짜여있다. 당연히 요한복음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이 실현된다. 어두운 하늘에 배트맨이 아침 해처럼 떠올라 조커가 드리운 무거운 어둠을 걷어낸다. 하지만 조커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의 내부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악당 조커는 어찌 보면 영웅 배트맨의 존재 이유다. 조커가 없다면 배트맨은 할 일이 딱히 없다. 조커의 난동과 포악성이 극에 달할수록 배트맨의 활약이 절실하고 그만큼 눈부시다. 회색과 대비된 흰색보다는 완전한 검은색에 대비된 흰색이 더 눈부시다. 영웅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면 악당은 철저히 악당다워야 한다. 슈퍼 히어로가 있으려면 슈퍼 빌런이 필수적이다. 슈퍼 히어로의 탄생을 위해 오늘도 악당들은 괜히 지구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노라며 핵폭탄 하나씩 들고 왔다갔다 하더니, 이젠 우주를 통째로 날려버리겠다고 나댄다. 판이 점점 커진다. 슈퍼맨, 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