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그런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주요국은 영국뿐이다. 영화는 핵보유국 중에서 영국만 살아남은 이유를 영국이 미리 핵폐기를 선언하고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라고 설정한다. 핵전쟁 후 혼란의 시대. 영국의 실권을 잡은 ‘슈틀러’는 생존과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극단적인 파시스트 정책을 펼친다. ‘슈틀러 정권’은 모든 인권과 자유를 유보하고 개인을 국가에 종속한다. 국가가 독점한 언론 매체는 국가의 선전기구로 전락한 채 끊임없이 단결과 복종을 주입한다. 영화는 슈틀러 정권을 최악의 독재정권으로 묘사하지만 민망할 정도로 ‘저렴’하거나 ‘저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일까. 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는 자신과 정권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단결을 부르짖는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적어도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해야 한다’는 일관된 신념과 원칙이 있다. 또한 슈틀러 총통과 그가 이끄는 ‘노스파이어’당은 적어도 핵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소련에 암담한 현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 사태를 막지 못한 영국의 전임 집권자나 집권세력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만 강조한다. 자신들이 저지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복수극’이지만 통상적인 복수 드라마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중국 무협영화처럼 주인공이 무공을 갈고닦아 악의 최고봉을 화끈하게 짓이겨버리는 식의 복수극이 아니라 대단히 절제되고 승화된 복수극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닮았다. 알렉산더 뒤마의 후손들이 혹시 ‘표절’이라고 꼬집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 ‘V’가 그의 아지트에서 이비(Evey·나탈리 포트먼)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TV 화면에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 흑백영화가 돌아가고 있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원수와 최후의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V는 그의 아지트에서 그 영화를 몇번이고 되돌려보면서 절제된 복수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억울하고 불의하고 부당한 체포를 당해 끔찍한 죽음과도 같은 수감생활 끝에 극적으로 탈출한 선원 에드먼드 단테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란 새로운 신분의 ‘가면’을 쓰고 복수에 나선다. 마찬가지로 V는 ‘가이 포크스’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 태어나 복수에 나선다. 또 다른 공통점은 에드먼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래 어느날 인류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핵전쟁이 터지고야 만다. 용케 핵전쟁의 재앙을 피해간 영국은 아수라장이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인 통제사회를 택한다. 과거의 망령으로 봉인했던 히틀러의 파시즘이 부활한다. 일당 독재 체제는 모든 민주적 가치를 폐기처분하거나 창고 속에 처박는다. 권력을 독점한 일당은 국민들의 총화단결을 외치고, 이를 해치는 모든 개인적인 소망과 욕구는 철저하게 매도한다. 개인적 욕구를 버리지 못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살벌한 강제수용소뿐이다. TV를 켜기만 하면 ‘위대한 지도자’ 슈틀러와 그의 나팔수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단결과 질서를 울부짖는다. ‘국가와 전체’는 선(善)이고, 개인과 다양성은 악(惡)이다.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 속 모습이 왠지 미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는 낯설어야 마땅한데, 그 모습들이 익숙하기만 하다. 분명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상황과 장면일 텐데, 언젠가 어디에선가 경험했던 것 같은 기시감(旣視感)이 든다. 꿈속에서 봤나 싶은 ‘데자뷔()’의 느낌이다. 기시감이 느껴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보여주는 가까운 미래의 영국은 ‘노스파이어(Norsefire)’라는 이름의 당이 일당독재하는 지독한 파시스트 독재국가로 변해 있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단결을 통한 힘 충성을 통한 단결)’이란 노스파이어당의 구호가 런던 시내의 모든 곳을 점령하고 있다. ‘히틀러’의 이름을 닮은 아담 슈틀러라는 ‘총통’이 유일정당인 노스파이어당과 국가를 동시에 장악한다. 슈틀러는 연설 스타일도 히틀러의 오마주다. 영국의 왕정도 끝났는지 왕조차 보이지 않는다. 히틀러의 재림 격인 슈틀러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 가치인 ‘안전’ ‘질서’를 위해 ‘자유’ ‘인권’과 같은 다른 가치들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다. 안전과 질서 외 다양한 가치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다른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수용소에 격리된다. 히틀러와 슈틀러는 ‘진시황제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진시황제는 법가사상서와 농사, 점복占卜에 필요한 책을 제외한 모든 ‘쓰잘데기 없는’ 책들을 불태워버리고, 그 ‘쓰잘데기 없는’ 이론들을 콩이야 팥이야 따져대는 선비들을 파묻어버렸다. 가히 파시즘의 태두라 부를 만하다. 파시스
1604년 영국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체포돼 끔찍한 처형을 당했던 인물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화끈한 테러’를 저지르는 영화 속 의문의 사나이는 ‘V’라는 이니셜로만 통한다. 그렇다면 V가 의미하는 건 뭘까. victory(승리), vision(미래의 제시), victim(희생자), vestige(과거의 흔적ㆍ상처) 중 하나일까.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의 행적을 보노라면 그의 이니셜 V는 victory, vision, victim, vestige 모두가 될 수 있을 듯하다. V의 투쟁은 자유의 승리(victory)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억압된 체제에 의해 상처받은(ves tige) 희생자(victim)의 분노일 수도 있다. 다른 면에선 억압적인 체제를 부수고 진정한 자유를 향하는 비전(vision)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모두 V의 과격한 테러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명분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독자와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원천봉쇄하기라도 하듯 V는 victory나 vision, victim이 아니라 ‘vendetta(복수)’를 의미한다고 제목에서부터 밝히고 들어간다(V for Vendetta).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소설에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은 V라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이지만 ‘얼굴’이 없다. 첫 등장에서 마지막 죽음까지 마스크 속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 주인공의 캐릭터를 V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상징성으로 유추하는 수밖에 없다. V의 마스크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얼굴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얀 얼굴에 볼은 분홍빛이다. 콧수염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고, 턱수염 역시 아래로 날카로운 칼처럼 내리꽂혀 있다. 웃는 얼굴 같기는 한데,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느낌이다. 영화의 ‘얼굴’ 역할을 하는 가이 포크스라는 인물은 1605년 영국 제임스 1세의 가톨릭 탄압 정책에 항거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 국회의사당 상원 건물을 국회 개원 날 폭약으로 ‘날려 버리려 했던’ 무척이나 과격했던 인물이다. 감히 국왕과 영국 귀족들을 일거에 날려버리려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을 의사당 건물 지하에 쌓아놓았다가 적발됐으니 그 처벌 수위가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에겐 ‘Hanged, Draws, Quartered(목매달고, 끄집어내고, 토막내기)’라는 설명하기조차 끔찍한 왕정 시대 영국법이 정한 최악의 형벌에 처해진다. 일단 교수형에 처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ㆍ2005)’는 제임스 맥테이그(Jaems McTeigue)라는 생소한 이름의 감독의 데뷔작이자 아직까지는 그의 인생작인 듯하다. 앨런 무어(Allan Moore)라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 만화를 그 유명한 워쇼스키 자매가 영화각본으로 재탄생시켰다. 제임스 맥테이그는 ‘매트릭스’ 시리즈에 조감독으로 참여해 워쇼스키 자매와 인연을 맺었다. 영화는 2005년에 제작됐지만 앨런 무어의 원작만화는 1988년도 작품이다. 당시는 소련이 해체(1989년) 되기 전으로, 세상은 여전히 핵전쟁의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영국에선 보수당 정권(마가렛 대처 수상)이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극우 정치노선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디스토피아 작가들이 그려내는 미래상은 언제나 ‘현재’의 세상에서 그 암담한 미래상의 ‘조짐’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어쩌면 디스토피아 작가들은 「25시」를 쓴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들은 항해를 떠날 때 항상 잠수함에 토끼 몇마리를 태웠다. 토끼가 사람들보다 ‘산소 부족’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승무원들은 멀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와 아들 코모두스라는 2명의 황제를 보여준다. 철학가 뺨치는 지혜를 뽐냈던 아우렐리우스가 ‘정치가(statesman)’라면, 아버지를 목졸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코모두스는 전형적인 ‘정치인(politician)’이다. 그럼 정치가와 정치인의 차이는 뭘까. 정치인은 정치를 입신양명과 부귀영화의 통로로 사용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즐긴다. 반면 정치가는 공동체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그 비전을 실현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크기만큼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정치가는 고통스러워도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3가지 성격의 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타협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 아무 걱정 없겠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픈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보통 사람이 아닌 권력자가 ‘해야만 하는 일’을 외면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매달
막시무스에게 코모두스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코모두스는 막시무스가 아버지처럼 모신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막시무스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까지 불태워 죽인다. 막시무스는 하루아침에 로마 최고의 장군에서 노예검투사로 전락한다. 코모두스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사내의 처절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볼 때 한가지 짚어볼 게 있다. 막시무스의 불행은 모두 코모두스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라 해도 직접적 원인은 코모두스가 제공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간접 원인들은 따로 있다. ‘간접 원인’이 없었으면 ‘직접 원인’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게 ‘진짜 원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 막시무스를 불행으로 이끈 간접 원인은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사태를 만든 ‘간접 원인’은 어쩌면 게르만족의 침입이었을 듯하다. 북방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막시무스는 로마 최고의 장군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역시 아들 코모두스를 제쳐두고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찜’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게르만의 침략을 당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코모두스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막시무스
코모두스 황제와 노예검투사 막시무스는 AD 180년 어느날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한복판에 서서 수만명의 군중 앞에서 칼을 뽑아 들고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결국 두 사람은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어쩌다가’ 두 사람이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맞서고 그렇게 죽게 됐을까. 누구 탓일까. 대중예술에서 극작가와 감독의 시선은 주인공 편향적이고 선악善惡 대결구도에 맞춰져야 한다. 영웅은 절대선이어야 하고, 빌런은 절대악이어야 한다. 막시무스는 강직하고 사심 없고 당당하다. 반면 코모두스는 무능하고 욕심 많고 사악하기 짝이 없다. 막시무스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의 ‘공공의 적’으로 자리매김한다. 코모두스를 향한 막시무스의 사무친 원한에 모든 관객이 공감한다. 코모두스를 죽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는 복수심도 수긍이 간다. 막시무스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살해하고 자신의 처자식마저 불태워 죽인 원수가 코모두스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내 처자식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카메라도 막시무스의 영웅적인 전투와 일편단심 로마와 황제를 향한 충절, 그리고 막시무스의 아내와 아들이 나무에 매달려 불타 죽은 모습에 막시무스가 처절하게 절규하는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로마의 심장 콜로세움에 노예검투사로 등장한 막시무스는 한순간에 코모두스 황제를 정치적 곤경에 빠트린다. 코모두스는 황제의 권능으로 노예검투사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다. 권력이란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것이다. 뒤집어지는 바다에서는 항공모함도 견딜 수 없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막시무스가 등장하자 잔잔하던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권력을 받치고 있는 원로원에도 거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코모두스가 못마땅했던 로마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루실라 공주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노예 검투사 하나를 처형해버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이 시민들이 열광하는 노예검투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마도 민심의 바다가 뒤집힐 것이다. 헌법 위에 있는 것이 ‘국민정서법’이다. ‘절대적’으로 보였던 역사상 수많은 권력들이 그렇게 무너졌다. ‘절대권력’이란 없다. 교도소장도 수감자들이 뭔가 빈정 상해서 모두 들고 일어나면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국민정서법’에 걸리지 않고 막시무스를 제거해야 한다. 코모두스가 찾아낸 방법은 ‘결투’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아이디어이다. 아직 로마에 ‘결투’라는 제도가 도
막시무스의 등장으로 촉발된 코모두스 황제의 정치적 위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 좋은 책사 팔코 의원의 계략에 따라 로마 북부군과 원로원, 누이 루실라까지 가담한 쿠데타 음모를 겨우 막아내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는 한 파도는 계속 밀려올 수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코모두스. 이제 어느 파도에 그의 배가 뒤집힐지 알 수 없다.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이고, 바람은 곧 민심이다. 콜로세움에 모인 군중들의 목소리가 민심을 대변한다면 민심이라는 바람은 이미 그에게서 돌아선 것이 분명하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명쾌하게 정리한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한시외전(韓詩外傳)」은 권력과 민심의 단순명쾌한 관계를 이렇게 규정한다. “임금은 백성이 함께하면 편안하고, 백성이 도와주면 강해진다. 그러나 백성이 얼굴을 돌리면 위태로워지고, 백성이 등을 돌리면 끝이다(百姓與之卽安 輔之則强 非之則危 背之則亡).” 민심을 얻으면 모든 걸 얻을 수 있고 민심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뜻이다. 지금 코모두스를 향한 로마의 민심은 얼굴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지금이야 얼굴 정도지만, 언젠가는 완전히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럴 땐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