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이 한데 모여 자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기 위해 봉숭아꽃과 잎을 작은 절구통에 모아 찧고 있다. 긴장할 수 있기에 행복한 우리의 아이들 ‘누군가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라고 내게 말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측가능한 길의 바깥으로 내려서야만,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져야만, 그리고 세상을 기회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으로 바라보아야만 진정 멋진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티나 실리그) 아이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가정이든 사회든 아이로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아이를 살리는 일은 가정도 사회도 살리는 일입니다. 아이의 목에 도금 가짜 금은동메달 대신 순금일 수 있을 희망의 목걸이를 걸어줘야 합니다. 아이의 가슴에 엉터리 스티커 대신 희망의 배지를 달아줘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제대로 멋지게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우리 아이들 앞에서 온전하고도 멋진 부모이길 바라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그렇게도 사랑한다면서 소홀하진 않았나? 지나쳐버렸다지만 과거라는 것은 회상하기에 언제나 현재입니다. 나의 추억은 대체로 ‘아픔’으로 떠오
▲ 김철수/ 우도면 새마을협의회장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생활은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내 자신의 성장하게 된다. 누구나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순간 누구나 만족스럽게 보내지 못 한다. 현재에 안전하게 존재하는 법을 알기만 해도 사람들은 행복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 속으로 간다.” 그것은 자연의 위치고 누구나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라고 생각하지만 살아가면서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고통과 고난에 대한 반응은 절망과 무기력이 아니라 인내와 배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어떠한 일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인내와 배움의 길은 누구나 거쳐 가는 길이다. 사람은 한없이 추락하다가 어느 순간 위를 향해서 떠오른다. 고통스럽거나 고난이 있는 상황이 일어날 때 저항하지 말고 그 상황을 긍정마인드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내 자신만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면서 화를 냅니다. 화를
▲ 임계영 제주도농업기술원 주무관 홍보(PR)의 사전적 의미는 사업이나 상품, 업적 따위를 일반에게 널리 알린다고 정의하고 있다. 1956년 개원이후 현재까지 제주특별자치도도농업기술원은 도내 최고의 농업기관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홍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지 않아나 싶다. 우리 원은 다른 기관과 달리 기술홍보담당부서를 두어 연구 성과를 비롯해 지도사업에 대한 성과를 보다 발 빠르게 홍보함으로써, 도민들의 알권리 충족은 물론 도민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흔히, 21세기는 참여와 소통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방통행적인 지식 전달이 아닌, 참여와 소통을 통하여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공동의 목표에 대한 초점을 극대화 하여 집중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우리 원에서도 이에 발맞추어, 최고의 농업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홈페이지를 운영하여 농업교육, 농업기술정보 및 영농상담, 병해충도감, 농산물 가격정보, 농업과학도서관 등 클릭 만 하면 무한한 유익한 농업정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대민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한, 모바일, 멀티미디어, 워크
▲ 강병철 논설위원 제주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점점 본래의 색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날마다 목격한다. 해녀문화와 함께 제주 특유의 문화중의 하나인 이어도문화가 제주도민들의 기억 속에서 상실되어가고 있다. 오죽하면 제주의 노인들에게 물어봤더니 이어도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서 이어도문화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겠는가! 제주 노인들의 ‘기억창고’에서 이어도라는 담론이 보편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고 제주 무가(巫歌)는 물론 제주 속담사전에서도 이어도에 대한 내용이 없어 이어도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어도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맷돌이 중요한 생활도구였다. 사람들이 곡식을 맷돌에 넣고 돌리면서 맷돌노래를 불렀다. 이 맷돌 노래 중에 이어도 노래가 있다. ‘이어도문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에서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이 맷돌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 날에는 이처럼 동영상에서나 맷돌 노래를 감상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들었던 노래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어도와 친숙하였고 이어도는 생활양식의
▲ 진동협 제주농업기술센터 기계농업파트장 이제 간벌한 감귤 나무와 전정 등 본격적인 감귤목 파쇄 작업이 시작되는 시기다. 이 시기가 되면 농기계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서 안전사고 걱정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된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시기에만 파쇄기 등으로 작업자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전사고가 한 건도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파쇄 시기에 자주 발생하는 사고의 유형과 예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로 나무 투입 시 파쇄기로 손가락 등 신체가 상해를 입는 경우다. 이는 작업자가 투입구에 나무를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 할 때 또는 벌어진 나뭇가지를 집어넣을 때 투입구에 물려 들어가며 벌어진 나뭇가지가 좁혀지면서 손을 끌고 들어가 재빨리 손을 빼지 못해 또는 작업 주변 환경이 정돈이 안 되어 있어 발에 걸려 넘어지며 파쇄기에 손이 다치는 사고가 많이 발생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파쇄 작업 주변을 정리 정돈하여 작업하며, 잘 벗겨지는 목이 짧은 장갑을 착용하고 짧은 나뭇가지를 집어넣을 때는 다음에 넣을 긴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파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 마른 나뭇가지 투입 시 작업자의 눈 등
▲ 양기철 제주도 국제통상국장 중국은 1978년 개혁 개방 이후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오면서 세계경제의 명실상부한 G2로 등극했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고속 경제성장에 따른 중산층의 증가는 개인 소비력 급증으로 이어져 중국은 이제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닌 막대한 소비 잠재력을 갖춘 거대 소비시장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정부는 안정적 경제성장 속 내수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의 수출과 투자 중심의 고도성장 전략에서 소비 진작, 新도시화, 산업고도화 등 ‘내수' 와 ‘소비' 중심의 성장 패러다임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최근 중국 내 고소득층, 젊은 소비층이 등장, 고급재 및 서비스 수요가 대폭 확대되고 있다. 잦은 식품안전 사고 등으로 안전식품이 선호되고, 삷의 질 향상으로 건강식품, 웰빙, 친환경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정책변화와 중국 소비자들의 자국식품 불신으로 인한 수입품 선호 등 소비시장의 변화는 제주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제주가 가지고 있는 청
▲ 강민수 논설위원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는 원도심 뿐만 아니라 제주 역사를 아우르는 중심지다. 국가에서 각각 보물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러 볼 가치가 충분한데도 외면 받고 있다. 여기서 그 이유를 다 파헤칠 수는 없다. 다만 외국인들에게 좀 불친절한 것은 그럴듯한 영어 홈페이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브로슈어와 현장의 영어 안내문에 오류가 꽤 많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몇 가지만 추려 보겠다. 우선 관덕정 앞의 영문 안내판에는 the local officer(지방공무원) 신숙청의 지도 아래 관덕정이 세워졌다고 다소 엉뚱하게 써놓았다. 어떻게 일개 지방공무원이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자 보물로 지정될 정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한글에 그의 직위는 안무사(按撫使)로 되어 있는데, 왕의 ‘특사’로 지금의 제주도지사인 목사에 부임했던 것이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특수한 여건 때문에 왕이 직접 제주목사를 임명했으며 행정적인 업무 외에 군사적인 책임도 겸하게 하여 만호, 안무사, 병마수군절제사, 방어사, 절제사 같은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겼다. 따라서 the local officer는 행
그는 말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재임할 땐 그러지 않았는데 ···.” 지난해 말 우연히 전임 지사 중 한 사람과 점심 자리를 같이 했다. 화두는 연말 불거진 제주도정과 의회 간 ‘예산전쟁’이었다. 그와 필자 역시 도와 의회가 마치 힘겨루기라도 하듯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기싸움 하는 양상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팽팽하던 기싸움은 연말을 지나 연초로 넘어가며 봄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조기 추경’으로 가닥을 잡아가더니 시각차로 입씨름이 있는 듯 했지만 그래도 도정이 ‘응급복구’ 예산을 의회에 들이미는 데 까진 갔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돌연 ‘원희룡 지사의 중앙 인터넷언론 인터뷰 발언’이 의회의 심기를 건드렸다. ‘설 이전 예산통과’는 이렇게 물 건너갔다. 이해한다. 솔직히 필자가 봐도 원 지사의 발언은 거칠었다. 하지만 언론에 몸 담은 처지에서 <머니투데이> 기사를 찬찬히 훑어보면 원 지사의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영화 국제시장이 2월 들어 누적 관객 수 13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 통계에 의하면 이는 역대 휴먼드라마 장르 중 흥행 1위의 기록이란다. 영화평론가들이 10점 만점에 5점을 부여한 ‘보통’ 영화가 요새 말로 대박을 친 셈이다. 그 덕택에 영화 속에서 영자 역을 한 여주인공이 어린이재단에 기부금을 낸단다. 영화 관람객 수에 비례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다. 이처럼 국제시장이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람객들의 반응에 관한 자료를 짚어보면, 전문가들이 ‘신파적 스토리’라고 비평하는 영화의 흐름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소통되기 때문이란다. 6.25의 흥남철수작전으로 비쳐지는 국가의 무능함, 전쟁과 폐허에서 전개되는 가난의 뼈저림, 생존을 위해 독일의 탄광과 베트남 전선에서 사투하는 개인의 몸부림, 이산가족을 찾아서 분단의 비극을 부둥켜안는 범국민적 눈물 등이,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사회의 아픔으로 공감되어서다. 사실, 오늘도 변함없이 국가는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 호남향우회의 '사랑의 김장나누기' 행사 재 제주호남향우회(이하, 호남향우회)에서 제주도민들께 2015년 을미년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소원하시는일 이루시는 뜻 깊은 한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제주도에 살고있는 호남민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주도에 삶을 꾸리기 시작한 이후 오늘날까지 그 숫자가 수십만으로 제주도 인구의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세대 이주민을 시작으로 현재는 3세대까지, 호남향우들은 제주와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주로 이주해온 호남향우들은 지난 세월동안 지역적 특성에 맞춰 농업, 수산업, 축산업 뿐 아니라 관광, 유통, 호텔, 건설, 금융업까지 탄탄한 기반을 구축해 가고 있으며,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향우들은 호남향우회를 구성하여 상부상조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향우들이 향우회를 구성하여 상부상조 하며 살아가는 것은 향우회의 기본이치 입니다. 하지만 호남향우회는 제주도 인구비율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제주를 통해 호남향우들이 얻게 된 발전과 결과물들을 생각한다면 제주도 호남향우회의 역할은 단순한 향우모임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호남향우회는 이런 고민을 시작으로 제주도민
1611년 3월 어느 날 보물선이 제주 바다에 나타났다. 독립왕국이던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이 일본에 먹힌 후였다. 24개월 전 유구국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왕과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갔다. 제주에 나타난 보물선에는 유구국 왕자가 타고 있었다. 기록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며보면 다음과 같다. ▲ 해상왕국 유구의 무역을 주도했던 아지 계층. 1879년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옛날 어느 큰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의 산지 바닷가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높은 이가 관가에 불려 갔을 때 사또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옷을 잘 차려입은 젊은이가 대답했다. “저는 유구국의 왕자입니다.” 사또는 먼 곳에 있는 왕자가 이곳까지 온 게 궁금했다. 왕자가 말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왕이신 제 아버지를 잡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슬퍼서 보물을 갖고 일본에 들어가 왕을 풀어 달라고 하려 배를 타고 떠났다가 이 곳으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사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1597년 음력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은 한 달여 간 심문을 받던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경남 초계(합천군)에 있던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8월 2일까지 네달 간 백의종군했다. 백의종군은 군인이 계급 없는 백의(白衣) 신분으로, 군대 일에 종사(從軍)하는 걸 말한다. 권율의 군사자문 역할을 한 걸로 보면 된다. 석방 첫날부터 술을 들고 인사 오는 지인이 많았다. 이순신은 연일 취했다. 난중일기에 “정(情)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몹시 취했다…술병째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줬다”고 적었다. 낮술도 했다. “일찍 길을 떠나 오산에 이르니 술을 준비해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났다.” 원수 같은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제 역할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백의종군길(路)이 지난달 말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의해 고증됐다. 한양을 떠나 충남·전남북·경남에 이르는 640㎞, 긴 여정이다. 경남(161㎞), 전남(123㎞) 구간은 3~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