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일 부산 현지 방문 일정을 소화하던 중 흉기로 습격당했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 27분께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남성으로부터 왼쪽 목 부위를 공격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이 대표는 현재 의식은 있지만 출혈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곧바로 이 대표를 공격한 남성을 검거했다. 이 남성은 주변에서 지지자처럼 행동하던 중 사인을 요구하며 접근하다가 소지하고 있던 20∼30㎝ 길이의 흉기로 이 대표를 공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사건 발생 20여분 만인 오전 10시 47분에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연합뉴스]
이형상 목사는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목사 중에 제주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기록화첩과 지도, 운문·산문·편지 모음집, 장계, 지리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처럼 많은 기록을 남긴 건 역대 그 어떤 목사보다도 제주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래 들어 이형상의 제주목사 재임 당시 주요 행적과 자취를 되새겨보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 사이" 이형상을 바라보는 제주의 시선'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이형상 목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 짧은 재임 기간 제주에 미친 큰 영향 숙종 28년인 1702년 3월 제주에 도착해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이듬해 3월 파직돼 6월 제주를 떠나기까지 15개월 가량 제주에 머물렀다. 실제로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은 1년 남짓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3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 목사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관심은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 전설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신당 파괴에 집중됐다. 학자들의 선행연구 역시 대부분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칭해지던 신당 철폐 등에 집중됐던 것이
숙종 28년(1702년) 제주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牧使)는 제주에서 '당(堂) 오백 곳과 절(卍) 오백 곳'을 파괴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제로 변방인 제주에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철폐'를 단행했다. 이 탓에 제주에선 이형상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형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에 미친 영향과 후대의 기억' 학술 세미나를 진행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2차례에 걸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 새로운 질서와 구체제의 충돌 이형상 목사가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도록 한 채색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화첩에 담긴 41개의 그림 중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다. 39번째 그림인 '건포배은'(巾浦拜恩)이다. 1702년 12월 20일 수많은 사람이 관덕정과 건포, 즉 건입포구에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의 절을 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한라산 중턱과 제주읍성 밖 마을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신당이 불타는 장면이다. 이형상에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 이날을 우리는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로 '경술국치일'이라 일컫는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 경제, 문화, 역사, 교육 등 다방면에서 집요한 침탈, 수탈, 왜곡 행위를 일삼았다. 무참하게 유린당한 치욕의 나날. 그 수치심과 모욕감은 식민지 백성들의 몫이었다. 우리나라 남쪽 끝 제주의 탐라 역사·문화,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란 주제로 특별전시를 하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소장 고영자)과 함께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본다. ◇ 옛 입춘굿 사진은 일제에 의해 연출된 것 1910년대 관덕정 앞마당에서 펼쳐진 입춘굿놀이 모습을 담은 12장의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사진 속에는 많은 제주도민이 관덕정 앞에 모여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들이 펼치는 입춘굿놀이를 구경하는 모습이 담겼다. 탈을 쓴 심방들이 춤을 추고 사설을 읊으며 흥을 돋우고, 어른과 아이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서서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 사진만 얼핏 보면 입춘을 맞아 입춘굿이 성대하게 펼쳐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제주 입춘굿은 탐라국의 왕이 풍년을
제주의 옛 명칭 '탐라'(耽羅). '섬나라'란 의미를 지닌 탐라는 서기 3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약 천 년 동안 제주도에 존재했던 고대 독립 국가로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 탐라 건국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문헌 기록이 발견돼 눈길을 끈다.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란 주제로 특별전시를 하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탐라의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 본다. ◇ 탐라 건국을 노래한 서사무가(敍事巫歌)와 역사기록 "영평(永平) 팔년 을축 삼월 십삼일 자시에는 고을나, 축시에는 양을나, 인시에는 부을나 고양부 삼성(三姓)이 모흥혈(毛興穴, 지금의 삼성혈)로 솟아나서 도읍한 국가입니다. … (후략) …." '신들의 고향' 또는 '신들의 나라'라 불리는 제주. 그곳에서 펼쳐지는 '굿'을 보면, 첫머리에 1만 8000여 신을 청해 들이는 '초감제'(初監祭)라는 절차를 행한다. 초감제는 첫 순서로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이 천지자연의 탄생 과정과 국가의 발생 등을 신에게 설명하는 '배포도업침'을 행하고, 굿을 벌이는 '날'(시간)과 '국'(공간)을 신에게 고(告)하는 '날과국섬김'의 순서로 이어진다. 이때 심방이 말과 노래로 영평 8년인 서기 65년에
탈진한 채 발견됐던 멸종위기야생동물인 벌매가 회복돼 자연으로 돌아갔다. 한국조류보호협회 제주지회는 26일 오전 서귀포시 성산읍 제주자연생태공원에 벌매를 방사했다고 밝혔다. 이 벌매는 지난달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도에서 구조된 개체로 한 달간 한국조류보호협회 제주지회에서 치료받았다. 한국조류보호협회 제주지회는 국가철새연구센터와 함께 방사 전 이 벌매에 위성 위치추적기를 부착, 앞으로 신호를 받아 정확한 이동 경로를 분석하게 된다. 맹금류인 벌매는 전국 전역의 숲 가장자리나 초지에서 볼 수 있는 수리과 조류로, 봄과 가을에 우리나라를 지나는 나그네새다.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에는 '돌챙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돌을 쌓아 집이나 밭, 무덤의 경계를 표시한 집담·밭담·산담을 만들고, 마을의 재앙을 막는 방사탑(防邪塔), 제주의 상징과도 같은 돌하르방 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 흔히 옹기장이, 칠장이, 대장장이와 같이 단어 뒤에 '관련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장이'가 붙는 것과 같다. '화산섬' 제주 지천으로 널린 돌. 이를 옮기고, 깨고, 다듬고, 쌓아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사람들의 생활을 이롭게 만드는 이들이 그들이다. 한때 천하게 여기며 '돌챙이'라 낮잡아 불리던 이들을 우리는 이제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장인'(匠人)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 제주 역사·문화 녹아든 돌챙이의 삶 지난 2008년부터 15년간 돌담 쌓는 일을 해온 '돌챙이' 조환진(50)씨. 그는 최근 제주 돌문화를 대표하는 장인들을 만나 인터뷰한 책 '제주 돌챙이'(제주도문화원연합회. 비매품)를 펴냈다. 돌담 장인 안기남, 원담 장인 이방익,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송종원, 비석돌 장인 조이전, 비석에 글을 새기는 비석 각자 장인 고정팔, 초가장 축담 장인 김창석, 돌창고 장인 홍의백, 방사탑 장인 현태성, 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이로써 이 대표는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게 됐다. 국회는 21일 본회의에서 이 대표 체포동의안을 표결한 결과 찬성 149명, 반대 136명, 기권 6명, 무효 4명으로 가결했다. 체포동의안 표결에는 재적의원(298명) 중 295명이 참여했다. 입원 중인 이 대표를 비롯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수행 중인 국민의힘 소속 박진 외교부 장관, 수감 중인 무소속 윤관석 의원 등 3명을 제외한 전원이 표결에 참여했다. 체포동의안 가결 요건은 출석의원 과반(148명)으로, 이번 표결에서는 찬성표가 가결 정족수보다 1명 많았다. 이 대표는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200억원 배임), 쌍방울 그룹 대북 송금 의혹(800만달러 뇌물)으로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앞서 이 대표에 대해선 위례·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성남FC 불법 후원금 모금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바 있지만, 지난 2월 27일 본회의에서 찬성 139명, 반대 138명, 무효 11명, 기권 9명으로 부결된 바 있다. [연합뉴스]
옛 제주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구덕과 차롱. 구덕과 차롱은 대나무를 주재료로 만든 '대그릇'(竹器)으로, 오늘날 바구니 또는 그릇 용도로 쓰였다.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쓰임새로 인해 구덕과 차롱에는 제주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옛 전통을 잇는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라지고 있다. ◇ 구덕 장인의 삶과 죽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3살부터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제주의 대표 생활도구인 구덕과 차롱을 만드는 장인(匠人)인 고(故) 김희창(1941∼2021) 선생은 지난 2018년 제주도무형문화재보유자 신청 제출 자료에서 자신의 삶을 이같이 덤덤하게 풀어냈다.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3년, 집안 사정이 여의찮았던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나무를 베고 다듬어 구덕과 차롱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죽세공 장인은 서귀포 토평에 30여 가구, 호근에는 10여 가구가 있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구덕과 차롱을 살) 돈이 없으면 쌀, 고구마(감자), 보리와 바꾸는 물물교환으로라도 우리 가족의 생계를
옛 제주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구덕과 차롱. 구덕과 차롱은 대나무를 주재료로 만든 '대그릇'(竹器)으로, 오늘날 바구니 또는 그릇 용도로 쓰였다.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쓰임새로 인해 구덕과 차롱에는 제주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잊히고 사라지는 구덕과 차롱에 얽힌 생활문화와 전통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구덕 없이는 아기 키우기도 힘들어 "웡이 자랑 자랑 자랑 우리 애기 잘도 잘다 어서 자랑 어서 자랑 자랑 자랑 저래 가는 검둥개야 이래 오는 검둥개야 우리 애기 재와도라 느네 애기 재와주마 (중략) ᄒᆞᆫ저 먹엉 ᄒᆞᆫ저 자랑 ᄒᆞᆫ저 먹엉 자불어사 니네 어멍 물질 가곡 니네 아방 밧디 가곡 헐꺼 아니가"(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제주민요 중 일종의 자장가라 할 수 있는 '애기구덕 흥그는 소리'의 일부다. 애기구덕에 아기를 눕히고 흔들어 잠재우는 모습은 옛날 제주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었다. 애기구덕을 지고 밭이든 바다든 어디에든 나가 일을 하며 아이를 돌봐야 했던 제주의 여인들. 지나가는 검둥개에게조차 아기를 재워달라 부탁하고, '얼른 먹고 자야 너의 엄마 물질 가고 너의 아빠
제주시 원도심에 탐라국(耽羅國) 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성대'(七星臺) 유적이 최근 발굴됐다. 옛 도심 일대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곳에 세워진 칠성대 중 하나로 추정되는 유적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항해가들의 길잡이가 된 북두칠성처럼 베일에 가려진 탐라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탐라국에 세워진 일곱개의 별 '칠성대' '칠성도(七星圖)는 주성(제주읍성·현재의 제주시 원도심 일대) 안에 있는데, 돌로 쌓았던 옛터가 있다. 삼성(三姓)이 처음 나왔을 때 삼도(三都, 일도·이도·삼도)로 나눠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대(臺)를 쌓아 분거했다. 이 때문에 칠성도라 부른다.'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편찬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칠성대에 관한 첫 기록이다. 칠성대는 이후 선조 34년(1601) 왕명을 받아 안무어사(安撫御史) 신분으로 제주에 온 김상헌의 기행문 '남사록', 효종 4년(1653) 이원진이 제주목사로 부임할 당시 기록한 '탐라지' 등에도 나온다. 이외에도 임제와 홍천경, 김상헌, 이형상, 김정 등 제주에 부임한 지식인과 관료의 개인 시문(詩文)에도 등장한다. 옛
적갈색 또는 흑갈색으로 고급스러운 빛깔을 자아내는 갈옷. 가끔 멋스럽게 디자인된 갈옷을 보면 꽤 대중적이어서 젊은 사람들이 입어도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오늘날 누구나 즐겨 입는 청바지가 옛날 서양 광부들의 작업복이었다는 걸 떠올리기 쉽지 않듯 갈옷이 제주 사람들의 노동복이었다는 사실도 10대 청소년들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하다. 제주의 자연과 제주 선인들의 땀과 정성이 빚어낸 갈옷을 들여다본다. ◇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 갈옷의 계절 '凌雨枾染衣 冒雪皮爲帽'(릉우시염의 모설피위모) '장맛비 올 때 옷에 감물 들이고, 추운 겨울에는 가죽으로 모자를 만드네' 조선 후기 문신인 윤봉조가 1728∼1729년 제주에 유배됐을 당시 남긴 한시 '도중잡영'(島中雜詠)의 일부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 '凌雨'(릉우)는 시(詩)에서 '장맛비'를 통해 '제주의 여름'을 비유하는 단어로 쓰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마가 끝나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을 일컫는다. 장마가 물러가고 가마솥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바로 이맘때쯤이면 제주에선 옷에 감물 들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갈옷을 만들기 위함이다. 갈옷은 목면 등의 천을 제주 토종 풋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