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다습한 기후를 갖는 제주도에서는 어떤 시설이나 구조물, 형상을 나무로 만들 경우, 목재 부분이 쉽게 부식되어 1~2년마다 한 번씩 새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모든 걸 돌로 만들자, 주의였다. 제주도 각 마을 중요한 곳에, 세워지는‘거욱’이나 읍성 취락 입구에 세워졌던 돌하르방 역시 그랬다.
제주도의 대표 캐릭터 돌하르방의 주요 기능은 수호신적 기능, 주술 종교적 기능, 위치 표식 및 금표 기능 등이다.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옹중석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그중에서도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완옹중 석상에서 유래했다 해서 옹중석(翁仲石)이라는 이름이 많이 통용되었다.
북촌 돌하르방공원에서 만난 김남흥 돌하르방 장인(1967년생)은 먼저 인문학적 소양 얘기부터 꺼내 들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15년 전 돌하르방에 인생을 걸면서 처음 매달린 일이 돌하르방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였다. 돌하르방이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년)에 제작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때문에 김남흥 장인은 몇 년간 도서관을 찾아 관련 사료를 발굴하여 탐독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의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 돌하르방 장인 김남흥 관장은 15년간의 열정과 노력으로 창조한 그의 ‘상상의 나래’를 알아듣기 쉽게 풀어 줬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는 1754년 김몽규 제주 목사가 옹중석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 때 흉노족 등 북방 이민족을 물리쳤다는 거인 완옹중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은 후 진시황이 그의 동상을 아방궁 앞에 세웠다.”
“김몽규 목사는 본토 사람으로 막상 제주에 와보니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당시 전염병이 돌아 800여 명이 죽어 나갔다. 이 상황에서 흩어진 민심을 모아야 했던 김몽규 목사 역시 완옹중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이 든든해지기를 기대하며 관 주도로 옹중석을 만들어 동·서·남 성문 앞에 상징적 문지기를 세웠다. 우석목, 무석목 등으로 불리다가 1971년 제주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제주 목성을 지키던 돌하르방은 우락부락하고 무장을 한 모습으로 키가 크다. 반면 정의현성(서귀포시 성읍리)이나 대정현성(서귀포시 대정읍) 돌하르방은 각각 12기로 제주목 절반에 불과하며 키도 작다. 제주 목사가 주도했고 정의현과 대정현에서 따라 했다. 당시 지역마다 부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돌도 달랐기 때문에 석수들의 표현이 다르게 나타났다. 다만 돌을 가장 적게 깎아내면서 형태를 끌어낸 기법은 같았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문득 고등학교 시절, 당시 월남 참전용사 출신인 미술 선생님이 “돌하르방은 주변 현무암을 가져다가 대강 파놓은 예술적 가치가 별로 없는 싸구려 관광 공예품에 불과하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그 때문에 여태껏 내가 '제주 돌하르방을 희화화하고 평가 절하했었구나'하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제주의 돌인 검은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은 그 재질을 잘 살려 입체감을 더하며 조금씩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툭 튀어나온 부리부리한 큰 눈, 자루 같은 코, 다문 입, 넓게 뻗는 귀 등 해학적이면서 인정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벙거지를 눌러쓴 머리는 약간 옆으로 비스듬하여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다. 하체는 옷자락으로 발이 보이지 않고, 배 중심에 위아래로 골이 있다. 두 손은 배에 올려놓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돌하르방은 손의 위치에 따라 상징하는 인물이 달라진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위에 놓인 돌하르방은 문인(文人)을 상징하고, 왼손이 위에 놓인 돌하르방은 무인(武人)을 상징한다. 오래된 돌하르방이 쓰고 있는 모자는 보통 버섯 머리 혹은 벙거지 모양으로 남근 모양과 흡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한때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남자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막연한 기대로 혹은 재미 삼아 돌하르방 코를 만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돌하르방의 코 부분을 부수고 가루 내어 물에 타 마시는 풍습도 있었다.
2007년 작고한 제주도 마지막 석장(石匠) 고 고흥옥 옹은 돌 깨는 일을 하다 독학으로 동자석과 문인석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무덤에 동자석을 세우는 사람들이 줄었고 찾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더 이상 동자석을 만들지 않았다.
동자석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 모습을 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형상이다. 동자석은 동제석, 동ᄌᆞ석, 동주석, 동제상, 애기동자, 자석 등으로 부른다. 제주 민묘(民墓)는 부등변 사각형의 산 담으로 둘러 있고, 그 속에 둥근 봉분이 있으며 묘주(墓主)의 시중꾼이라 할 수 있는 아담한 동자석이 쌍으로 마주 서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작고 귀여운 동자석은 제주의 대표적 석상이다.
무덤을 지키고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를 지닌 제주 동자석은 현무암이나 화산암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지역 동자석과 다르다. 제주 동자석은 손에 홀, 부채, 문자, 수저, 붓, 칼, 술병, 술잔, 부채, 뱀, 새, 음양의 성기 등 다양한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다이아몬드형, 타원형 등 기하학적 무늬도 있다.
2024년 고 이건희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제주 동자석과 문인석 55점이 국립제주박물관 옥외정원에서 선보였다. 이 동자석과 문인석은 2021년 4월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만1000여 점 작품 가운데 일부다.
2006년 제주문화의 뿌리가 되어온 돌 문화를 집대성한 제주 돌문화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제주 지역 최초의 예비타당성 사업으로 지금도 여전히 조성 중이다.
제주 돌문화공원은 곶자왈 지대에 있는 326만9731㎡(100만 평) 부지에 야외 전시장뿐만 아니라 제주 돌 박물관, 설문대할망 전시관, 오백장군갤러리 등의 다양한 실내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야외 전시장을 제외하고 실내 전시실만 합쳐도 4만2900㎡에 달하는 전시시설이 들어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공간 3만7719㎡를 넘어서는 규모다.
푸른 자연과 어우러진 돌 문화와 오랜 시간을 견뎌낸 제주 사람들의 지혜와 저력을 느낄 수 있는 돌 문화공원 야외 전시장에는 48기 돌하르방, 사악한 기운과 액운을 몰아낸다는 방사탑, 제주의 상징인 정주석, 무덤 주위에 세워 망자의 한을 달래준다는 동자석 등이 망라돼 있어 제주의 풍성한 돌 문화를 흠뻑 느낄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