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 ‘4대 도적(寇)’과 앉은뱅이 거지 모탄자(毛癱子)

  • 등록 2025.08.06 13: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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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58) 거지와 강호의 여러 부류 ⑥

광주(廣州) ‘4대 도적(寇)’

 

반대로 많은 거지들은 장걸아와는 달랐다. 심지어 도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청패류초』 기록이다.

 

“4대 도적은 광주에 있는데 거지다. 거지이면서 도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흉악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4명이 발기했기에 사대구(四大寇)라 불렀다.

 

월(粤, 광동 광서)지역 출신이 아니고 모두 외지 사람이다. 월에서 관직에 있던 관원의 자손으로 가난해져서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양성(羊城)으로 흘러들어가 구걸하며 지내는 자들이다.

 

그런데 구걸하는 방식이 일반 거지하고는 달랐다. 꼭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는 부잣집을 골라 구걸하였다. 순서에 따라 결손 된 인원을 뽑는 ‘사우(私寓)’1)는 어느 외지인인지를 불문하고 동향으로 여겼다. 그곳에 가면 수판을 내밀며 행하를 요구했다. 수판에 성명, 원적을 쓰고 위에는 선대의 품계 명호를 붙였다. 예를 들면 ‘원임 남해현 모모 자, 모모의 아들, 모 처, 모모이다’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개 장삼을 두르고 절뚝절뚝 신을 지르신었다. 결당한 자가 많으면 수십 명에 달했다. 은화 수십 원을 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았다.

 

그중 관리의 자손이 분명 존재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사칭하는 자들이었다. 그중에 표준어를 할 줄 아는 광동사람이 끼어들어있다.”

 

이런 무리들은 분명 거지가 아니라 불량배요 무뢰한들이다.

 

앉은뱅이 거지, 모탄자(毛癱子)

 

다시 청나라 초기에 살았던 거지 모탄자(毛癱子)를 보자. 기록은 이렇다.

 

모탄자는 천장(天長)현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다. 나중에 두 손으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하며 걸었다. 평상시에는 앉아서 구걸하였다. 그는 의협심이 있었다고 전한다.

 

순치(順治) 16년(1659), 해적이 강녕(江寧)을 공격하자 천장현도 염효(鹽梟,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사염업자) 유택(劉澤)에게 점령당했다.

 

현령은 거리에서 목매어 죽었고 버려진 시체들은 수일이 지났는데도 거둬줄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모탄자가 지나다가 보고는 연무청(演武廳)에서 울며 시체들을 염해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새로 온 현령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령이 죽판을 써서 모탄자를 양제원(養濟院) 원장에 임명하여 표창하였다.

 

이때부터 모탄자가 오고갈 때는 다시는 땅을 짚고 다니지 않고 다른 거지의 어깨에 올라타서 다녔다.

 

모탄자가 관방이 임명한 거지의 우두머리가 된 후, 현에서 매년 재물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시에서도 선례대로 매월 공물을 바쳤다.

그러자 모탄자는 3칸 초가집을 짓고 1처 1첩을 두었다. 매년 생일 때면 처첩이 술자리를 마련하면 여러 거지들이 모여 생일을 축하하였다. 사치스럽고 안일한 현귀 생활을 즐겼다.

 

명나라 때에 의협을 행한 거지 장이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공을 탐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보면 분명 무뢰한 무리에 속한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백 년 전의 ‘사우(私寓)’는 경성(京城)에서 비교적 고급스런 성애(性愛) 업소였다. 경영자는 대부분 이원항(梨園行, 옛날 경극에 종사하는 사람들) 인사들이었다. 종사자는 ‘상고(相姑)’라 부르는 미소년이었다. 근 백 년 이래로 경극의 남단(男旦) 명가들은 이 화제를 대부분 피했다. ‘사우’와 관련된 속사정은 역사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시 말해 ‘사우(私寓)’, ‘가랑(歌郎)’, ‘상고(相姑)’ 등은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쉬이 접하기 어려운 성애와 관련된 어휘다. 중국 명청(明清)시대 북경 ‘이원항’이 유행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일례로 ‘상고(相姑)’는 ‘남기(男妓)’, 즉 남창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leeac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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