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은 넌렘수면부터 시작된다. 사이클을 그리며 간간히 렘수면이 나타난다. 영아의 경우 렘수면은 잠의 80%를 차지한다. 성장하며 점차 줄어들고 성인이 되면 전체 잠에서 20-25%를 차지한다. 잠에서 깨기 직전 마지막 렘수면이 길다. 아침에 일어나 기억하는 꿈은 이때 꾼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는 밤새 꿈만 꿨다고 하지만 마지막 렘시기에 꾼 꿈을 기억하는 셈이다.[구글] 잠은 넌렘(Non-REM)수면과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아이가 곤히 자고 있을 때 조용히 그 녀석 눈꺼풀을 들고 눈동자 움직임을 관찰해 보세요. 엽기적인가요? 시기가 맞으면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때가 렘수면이죠.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많은 렘수면을 보이기 때문에 쉽게 관찰할 수가 있죠. 꿈이 곧 렘수면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꿈은 거의 대부분 렘수면(REM sleep) 때 일어납니다. 꿈을 먼저 이야기해 보죠. 프로이트는 꿈을 ‘소망성취’라고 했습니다. 꿈은 소망을 성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대게 소망은 거창한 게 아닐뿐더러 소망의 성취도 위장된 만족에 불
K씨는 50대 부인이다. 대인관계 공포가 있다고 한다. 작은 호텔 프론트 업무를 보고 있는데 내부 전화벨이 울리면 받기가 불안해진다. “네, ooo입니다.”라는 말도 제대로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덜덜 떨며 우는 둣한 목소리에 상대방이 의아하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최근 교회에서 작은 직책을 맡겼는데 걱정이 많다. 여러 사람 앞에서 성경을 읽는다거나 발표를 해야 할 때 보나마나 목소리도 그렇고 온 몸을 떨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말은 안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이상하게 봤을 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평소 친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아무 걱정이 없다.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 정도에선 목소리가 달라지고 심지어 몸을 떨기도 한다. 무섭다.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말하기 싫지만 요즘은 특별히 힘든 사람이 두 명 있다. 만날 때마다 불안하고 두렵다. 실제로 몸도 떤다. 둘 다 굉장히 억세고 냉랭한 사람이다. 친하고 싶어 다가가는데 번번이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나를 친하게 대해주었으면 하고 다가선다. 불안하고 두렵고 떨면서.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그 사람들에게 K씨가 잘못한 것도 없
예전에 장동건, 고소영이 결혼할 때 개그콘서트에서 개그 소재가 되었었죠. “그래. 세상은 언제나 잘난 것들끼리만... 에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두 배우의 우월한 외모를 인정하는 가운데 부러움을 승화시키는 투정개그였습니다. (스스로를 아주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사귀는 사람도 없는) 수많은 싱글들이 그 개그에 환호했지요. 이번엔 배우 원빈과 이나영이 결혼한다는 뉴스입니다. 청춘남녀 여러분. 제 자신이 결혼한 지 꽤 되는 중년이고 또 여러 부부상담도 해 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결혼생활 만족도에 외모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매우 짧고 미미합니다. 그러니... 휴, 아무리 이렇게 말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저 청춘 ‘불나방’들은 제 말을 귀담아 듣지를 않아요. 원빈은 2010년 영화 '아저씨' 제작 발표회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내게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다"라고 말해서 ‘망언 시리즈'에 동참했었지요. 흔히 콤플렉스를 "열등감"과 유의어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걔. 나한테 무슨 콤플렉스 있나 봐.” 자
2015년 8월에 미국의 저명한 뇌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Wolf Sacks, 1933-2015) 교수가 돌아가셨지요. 그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뇌에 문제가 생긴 P교수가 앉아있는 아내를 모자로 알고 머리에 쓰려는 장면에서 표제로 삼았어요. P교수 증상은 한 가지가 아닐 뿐더러 극단적이라 충격적이었지만, 친숙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증상이 인상에 남아요. 얼굴인식불능증(prosopagnosia)라고 합니다. ▲ [구글] 가령 절친한 친구 홍길동이 P를 찾아왔어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봅니다. 특징을 찾으려고요. ‘단추 눈구멍, 검은 뿔테 안경, 매부리코 옆에 큰 점, 순대처럼 두꺼운 입술... 아, 길동이군.’ 늘 이런 식이란 말이죠. 홍길동 얼굴이 뚜렷한 특징이 있는 얼굴이라면 모르지만 ‘평범한 얼굴’이라면? 그가 누군지 몰라요. 다른 힌트들, “P야. 오랜만이다."는 목소리를 들으면 즉시 그가 홍길동이란 걸 알죠. 목소리가 아니어도 절친 홍길동만의 독특한 행동, 태도 등 다른 힌트들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아마 다른 증상 전혀 없이 오로
통상 마비라고 하면 신체마비를 의미한다. “저 분은 뇌경색으로 왼쪽 팔, 다리가 마비되어 잘 움직이지 못해.” “얼굴이 마비가 되었는지 만지는데 느낌이 어둔해요.” 사회 일반에서는 운동과 감각 구분은 물론 정도나 질적 특성을 나누지 않고 <마비>라고 통칭하지만 의학용어로는 마비 정도와 부위, 질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해서 기술한다. 그 부분은 이 글에서 다룰 게 아니다. 이런 여러 형태의 신체마비처럼 ‘감정이 마비되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만성 조현병(스키조프레니아, Schizophrenia) 환자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 둔화다. 감정 수용과 표현 모두에서 뚜렷하게 둔화된다. 무척 슬플 것 같은 상황에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 슬프지 않다고 말한다, 혹은 슬프다고 말은 하지만 부적절하다. 이 글은 그런 감정둔화보다는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에 대한 것이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 용어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정을 제대로 분화시켜 느끼지 못한다거나 어떤 감정과 신체
“언니 저 맘에 안 들죠?” 다 아시는 철지난 이야깁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고 하나요?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 예사롭지 않은 가운데 예원이 이 말을 하는 순간 태임은 폭발합니다. 정말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예외적 맥락에서 이건 남자들 대화의 “X같냐?”라는 어감이라고 평했다더군요. 저는 무엇보다 예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태임이 폭발했다고 봤어요. 핵심을 들켜버렸기 때문에요. 비록 논리적 정리는 안됐지만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분명한 자기 생각을 콕 집어 예원이 한 문장으로 말해버린 거라고나 할까요. 태임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은 내용이었지만 분위기나 말하는 타임이 아주 좋지 못했어요. <삼국지연의>에서요. 조조의 ‘계륵(鷄肋)’ 암호를 전해들은 양수가 그 속마음을 한 눈에 알아채고 부하들에게 철군 준비 명령을 내렸다가 처형당하잖아요. 과연 이튿날 조조는 전군 철수명령을 내리죠. 제갈공명은 양수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남보다 잘 알기는 어렵지. 하지만 남보다 잘 아는 것을 말하지 않기는 더
실험 대상자에게 최면을 걸어서 비의식(非意識) 상태를 만든다. 그리고 암시를 준다. “당신이 최면에서 깬 뒤에 시계가 2시를 치면 당신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엽니다.” 최면을 풀었다, 얼마 후 시계가 2시를 쳤다. 피험자가 자동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였다. “왜 창문을 여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그의 행동의 동기가 비의식에 있으므로 이유는 모르지만 암시받은대로 창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가 이무석 선생이 쓴 <정신분석의 이해>(1995, 전남대학교 출판사)에 나온 내용이다. 무의식(비의식)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여러 증례 중 하나로 최면을 예시했는데 암시(suggestion)는 직접 무의식에게 언어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피험자의 이성은 무의식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는지 모르고 있다. 이 증례에서 피험자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이라고 했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럴 듯한 이유를 대기도 한다. “음, 더워서...” 혹은 “방안 공기가 탁하게 느껴져서요.” 등. 사람의 이성은 생
기술(description)정신의학 역사에 에밀 클레펠린(Emil Kraepelin, 독일, 1856~1926)은 첫머리를 장식하는 이름이다. 그는 현재 사용하는 있는 정신의학 진단과 개념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 각 정신질환을 계통적으로 분류하여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다. ▲ 에밀 클레펠린(1856~1926) 그는 1899년 당시, 조현병(調絃病,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2011년 개명)의 증상과 경과를 밝히고 조발성 치매(Dementia Precox)라고 불렀다. 이 진단명은 이 병이 청소년처럼 비교적 이른(Precox) 생애에 발병한다는 의미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 증상은 환청과 망상이라고 했다. 클레펠린은 대게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는 병의 경과(longitudinal course)를 강조했다. ‘Dementia Precox’는 사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모렐( Benedict A. Morel, 1801~1873)이 말한 <démence précoce>를 번역한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겠지만 모렐은 「광기의 역사」(미셀 푸코, 나남출판)에 등장하는, 프랑스 혁
강준만 교수는 <오버하는 사회>(인물과사상사, 2003년)를 쓴 바 있다. 지금도 시의적절한 지는 좀 더 따져봐야하겠지만 여전히 좋은 책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은 이렇다. “지금 대한민국이 정치, 사회, 언론, 문화 영역 가릴 것 없이 오버(Over)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을 그럴 듯한 명분으로 미화하지만, 그 열정의 이면과 표면에 어른거리는 오버의 실체에 대해서는 둔감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사회와 개인에 필요한 열정이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열정을 넘어 과도한 오버로까지 치닫는 자기독단과 아집에 대해 비판한다. 크게 바뀐 환경에서도 '오버'를 요구하는 반(反)독재 투쟁의 심성이 남은 것을 지적하는 정치의 '오버'를 비롯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오버'를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 등을 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대’는 사춘기로서 족하다. 물론 엄마들은 “내가 미쳐...”하겠지만 사춘기의 오버는 한편 귀하고 예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성인이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선배
요전에 간호사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며 TV를 보는데 다중인격 장애를 다룬 드라마를 하더라고요. 재방송이겠죠. 제목이 <킬미,힐미>던가요? 과거에는 다중인격 장애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라고 합니다. ‘정체성 해리장애’가 더 좋은 번역 같은데요. 아무튼 dissociation을 해리라고 번역한 것도 아마 일본 학자일 거예요. 경의를 표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니 ‘해리(解離): 풀려서 떨어짐 또는 풀어서 떨어지게 함’이라고 나와 있네요. 해리성 정체성 장애는 딱 한번 경험한 바 있습니다만 이 병에 대해서는 인터넷 여러 군데에서 충분히 소개되었기 때문에 제가 보탤 것까지는 없는 것 같고요. 어쭙잖지만 한자에 대한 감상평이나 그려볼까 합니다. 제목만 보고 들어와 실망하셨다면 제가 이른바 낚시질에 성공한 겁니다. 한자 풀 해(解)를 보면 전 <장자>에 나오는 그 예술가 레벨의 백정을 떠올립니다. 소를 잡는데 절도 있는 춤 동작과 설겅설겅 음률에 맞는 칼질 소리에 살과 뼈가 척척 떨어져 나오며 물 흐르
세상을 살다보면 어느 선택만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는 많은 도덕적 딜레마를 만나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김영사. 2009)에도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 유명한 딜레마들이 나온다. ‘전차 딜레마’도 그 중에 한 가지다. “탈선한 전차가 다섯 사람을 향해 달리고 있다. 현재대로 계속 간다면 모두 죽게 된다. 이들을 구할 방법은 스위치를 눌러서 전차의 방향을 다른 선로로 바꾸는 것뿐이다. 이 경우 다섯 사람 대신 한 사람이 희생된다. 한 사람을 희생시키더라도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하나?” 이 상황에서는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20만 명 이상의 사람 중 89%가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철학적으로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떠오른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른 딜레마다. “전차가 다섯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당신은 선로 위를 지나는 육교 위에 덩치 큰 낯선 사람과 함께 서 있다. 앞에서는 전차가 다가오고 있고, 아래 선로에서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몸집이 큰 낯선 사람을 육교에서 밀어 선로로 떨어
우울병은 자기경과가 있습니다. 한번 오면 평생 계속 우울병 상태로 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르락내리락 몇 개월 지속되다가 ‘저절로’ 좋아집니다. 극단적으론 한번 수개월 앓고 다신 재발하지 않고 사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울병은 재발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저절로 호전되어 잘 지내다 재발하면 병의 기간이 더 오래고 정도도 심할 수 있습니다. 드문 경우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수많은 재발과 호전을 겪으면서도 운이 좋아 아무런 ‘사고’ 없이 평생을 살았다고 칩시다. 우울병으로 점철된 삶이죠. 삶의 본질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이 있지만 다른 사람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해(苦海)의 인생입니다. 하물며 결국 자살로 매듭 짖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울병이 ‘질병’으로 규명되고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밝혀지기 전에는 ‘누구나 인생은 어차피 고독해’ 테마에 묻혀갔을 겁니다. 세간에선 뭉뚱그려 말하지만 진단분류학에선 우울병도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임상에선 이런 분류도 중요합니다. 치료 접근에 있어서 미묘하지만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