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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 '해안 쓰레기' 소재로 도자공예 '산호요' 박도연 도예가
"어린시절과 다른 바다 안타까워 ... 건강한 마을 위한 나만의 몫"

 

전복, 소라, 성게 등 철 따라 나오는 어패류는 해녀 작업장이나 횟집 주변에 널려 있다. 손질만 하고 껍데기만 해안가에 버려진다. 쉬 썩지도 않지만 악취까지 풍기기도 한다.

 

서귀포시 모슬포에는 이렇게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패각을 일부러 찾아 줍는 도예가가 있다. 쓸모 없고, 보잘것 없는 조개 껍데기가 그의 손에 들어가면 은은하게 빛나는 도자기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전통문화대에서 전통미술공예를 전공하고, 중국 경덕진도자대 교환과정, 중국미술학원 공예미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박도연(28) 작가.

 

그는 제주에서 비치코밍(Beachcombing)으로 점토에 해안가 자연폐기물과 제주 고유의 흙을 접목, 도자공예를 하고 있다. '산호요'란 특이한 작품이 그의 주제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예술곶 산양’ 입주작가인 박 작가는 제주의 전통과 현대, 미술과 공예의 조화를 중점에 둔 작업을 하고 있다. 

 

 

박 작가는 어릴 때부터 바다에 나가 노는 것을 좋아했다. 바다수영을 하다 눈길을 돌릴 때 보이는 수평선, 다이빙 찰나의 몸을 감싸는 바다의 품을 사랑했다. 해녀 삼촌들이 저 편에서 물질을 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구경하며 보말과 소라, 성게 등을 채집하곤 했다. 바다가 아닌 곳에선 어떤 그림을 그리면 좋을지 정해진 건 없었어도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남들과 다를바 없이 소소하게 지내던 그가 도예의 길에 접어들게 된 건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갔던 한낮의 체험 때문이었다.

 

폐교된 산양국민학교(현 예술곶 산양)에서 도자기 체험에 참여했던 그는 흙을 만질 때의 촉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시간 자체가 재밌었다. 

 

“도예체험 몇 차례로 막연히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되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도자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진건 중학생 때 가족여행으로 떠난 경기도 이천에서의 기억이었어요. 숙소 맞은 편에 마침 도예가가 살고 있어서 또 도예체험을 했거든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경기도 이천이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그 선생님이 이곳에 도예를 배우는 학교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모두 별거 아닌 것 같은 우연이었죠.”

 

제주를 떠나 한국도예고에 입학한 그는 다양한 흙의 물성에 대해 배웠다. 도예를 배우면 식기 그릇을 만드는 일 말고도 공학, 재료학, 순수미술, 교육 등 여러 갈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건 ‘재미’였다.

 

“흙을 만지는 게 좋아서 도예고를 가긴 했지만 어느 학교를 가던 제가 재밌어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고고생 때는 '10년 뒤에 어떤 걸 작업하는 사람이 되면 좋을까’ 미래를 고민하면서 학교를 다녔죠. 도예도 입시미술처럼 입시도예가 있는데, ‘입시’라는 타이틀이 빈껍데기 같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학교생활에 녹여낸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대로 이뤄졌죠.”

 

대학생땐 백자와 청자, 옹기, 분청사기 등 전형적인 한국도자를 깊게 공부했다. 한국적인 색감과 문양이 화려한 고려청자, 절제된 품위가 느껴지는 조선백자, 해학적인 분청사기 등 한국전통문화대에서 배웠던 도자수업은 박 작가를 매료시켰다.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의 작업에는 모두 한국 고유의 멋이 드러났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좋은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내 도자작업도 예쁘지만 다른 과 친구들의 작업도 다 아름다웠어요. 한국적인 것이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이 길을 걸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굳어졌어요.”

 

 

◆ “힘든 작업 지속가능 이유? 돈·명예 아닌 '순간'” ... 신창현 도공과의 인연도 

 

도자기하면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흔히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자기 중엔 시대와 상관없이 계속 이어지던 옹기도 있다. 과거 옹기를 만들 수 있는 가마터는 다른 전통도자기와 달리 전국 곳곳에 민간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돼 있었다. 그래서 ‘옹기’라는 글자에는 시대가 아닌 지역이 붙는다. 제주에도 지역색을 띈 옹기가 있었다. 물이 부족했던 화산섬에 살고 있는 가정이라면 하나쯤은 갖고 있었던 ‘물허벅’이다.

 

박 작가는 대학에서 '전통옹기 보존·전승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방학기간 동안 제주옹기를 꼭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박 작가는 아버지와 함께 제주도무형문화재 제14호 허벅장 신창현 도공을 찾아가 옹기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고교생 시절에도, 대학교를 갓 입학한 신입생 시절에도 그의 작업실 문을 몇 차례 두드렸지만 다시 돌아가라는 답만 듣기 일쑤였다.

 

“신 선생님이 초반에는 ‘체력적으로 얼마나 힘든데 여자가 옹기를 만드려고 하느냐, 게다가 돈도 안되고, 써먹을 데도 없다’면서 거절하셨어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찾아뵙고, 명절마다 인사드렸어요. ‘저는 아직 20대 초반이라 체력도 좋고, 아직 학생이라 돈이 안돼도 좋다. 배우고 싶다’고 끈질기게 연락을 하니 결국 받아주셨죠.”

 

신 도공은 그에게 물허벅을 어떻게 만드는지, 제주도내에서 옹기를 만들기 좋은 흙이 많은 위치, 제주 특유의 흙을 다듬는 법 등을 알려줬다. 과거 옹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래동화처럼 들려주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밀도는 높아졌다.

 

“도예작업은 물리적인 힘이 많이 들어요. 특히 전통옹기는 더더욱이요. 발로 물레를 돌리는 동시에 손으로 작업하는 ‘목물레’를 쓰면 몸이 고단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신 선생님이랑 작업이 끝나면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직행했던 날도 있었어요. 얼마 전에는 백신 접종을 하러 갔더니 병원에서 저를 신 선생님 손녀로 적어뒀더라고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펑’ ‘펑’ ‘펑’ …

 

목물레를 돌리면 반복적으로 나는 소리를 들을 때면 기분이 묘하다. 작업을 끝내고 나면 지치지만 감수할 정도로 재밌다. 돈을 벌려고, 제주옹기의 장인이 되어 명예를 얻으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한건 단지 배우고 싶다는 마음, 작업하는 순간 그 자체다.

 

 

“한국 도자는 어려워. 중국의 흙과 다르고, 작업하는 과정도 달라.” 

 

학부시절 필수과목이었던 ‘대학한문’를 두 차례 재수강할 정도로 한자나 중국어에 관심이 없었던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 유학생의 이야기는 박 작가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그 마음은 다섯 달만에 중국어능력시험(HSK) 5급을 딸 정도로 강렬했다.

 

그렇게 교환학생 신분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 박 작가는 경덕진의 특유의 쾌활함, 셀 수 없이 다양한 중국도자에 푹 빠졌다. 차(茶)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도자로 차를 진중하게 대하는 법도 배웠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항저우 중국미술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기도 했다.

 

“유학시절 어딜 가든 차를 대접받는 문화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차와 도자의 관계를 많이 탐구했어요. 도자기에 따라 향과 색, 맛이 달라지거든요. 그때 재밌었던 일화 중 하나는 당시 배운대로 중국식 전통도자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네가 만든 도자기는 전부 다 한국작가가 만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좋죠.”

 

그렇게 즐거운 유학생활을 보내던 중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났다. 졸업을 앞둔 터라 아쉬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가 타국까지 온 이유는 학력이 아닌 배움 때문이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타 지역, 타국이 아닌 고향에 장기간 머무를 수 있는 시기는 이 때가 제격이었다. 위기는 기회였다.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온 박 작가의 눈에 산호나 전복, 성게, 보말껍데기가 들어왔다. 바다에서 모래알 두꺼비집을 만드는 시간 좋아했던 유년시절, 단순히 예뻐서 하나 둘씩 모아둔 것들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삶의 일부이기도 했다.

 

 

◆ 돌고 돌아 도착했지만 과거와 다른 제주 바다 … “마을 건강하게 지키고파”

 

“바다숲이 옛날 같지 않아. 바닷속에 감태가 없어." 

 

집 근처 해녀 작업장에 자주 놀러가던 박 작가에게 털어놓은 해녀 삼촌의 고민이다. 바다에서 채취하던 해조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는 것.

 

이는 대형 해조류 군집이 사라지고, 무절석회조류가 암반을 뒤덮는 ‘갯녹음’ 현상 때문이다. 해조류가 사라지면 그를 먹이로 삼는 성게 등도 피해를 본다.

 

고유의 모양과 색이 있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알아봤던 어린 도연이었다. 당시 쉽게 볼 수 있었던 성게, 소라 등을 줍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해녀 삼촌들도 바다생물을 줍는 그와 친구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제주로 돌아온 지금, 그에게 보석같은 존재들은 채집이 어려울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일정 부분은 법률상 채집이 불가능해지기도 했다.

 

“해녀 삼촌들의 고민을 들을 때 이전과 다른 바닷속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슬프게 들렸어요. 알맹이만 빼고 버려지는 껍데기도 안타까웠고요. 이는 제 작업의 영감으로 스며들었어요. 자연스럽게 마을 주변에서 비치코밍(바다 표류물이나 쓰레기를 주워 이를 활용한 작품을 만드는 환경보호운동)을 했죠."

 

그는 처음부터 자연환경을 생각하고 도예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도예작가로서만 무언가를 만들려고 했다면 단순하고, 일반적인 작품활동을 할 터였다.

 

“마을은 제게 준 영향이 분명히 있어요. 마을 해녀 삼춘, 동네 삼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곳은 결국 제가 사는 곳이기도 해요. 전 다 함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지키고 싶어요. 이 마음은 제가 시골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패각을 도자기 소재로 실험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매 순간이 기다림과 실패로 이뤄진다. 특히 자연물 재료는 일정하지 않아서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가 어떤 결과로 나올지는 미지수다. 

 

도자기는 만들고 나서 가마의 불을 때는 작업에서 성공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1250도 불에 굽는 과정 중 결과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기껏 만들어둔 도자가 가마에 들어갈 때마다 녹아내려 값비싼 가마 도구들을 많이 버리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결과는 우리 삶과 닿아있다.

 

“작업은 재밌지만 실질적인 선례가 없다보니 한계에 부딪힐 때는 답답할 때도 많아요. 확실한 데이터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자연물이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어쩌면 자연의 모양은 모두 다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이 부분이 산호요가 갖고 있는 하나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일정한 데이터가 있었으면 하나의 공장이 됐겠죠. 저는 대량 생산을 꿈꾸지 않아요. 버려지는 아이들을 주워 담아서 도자기를 매체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이니까요.”

 

일부 도예가들은 백자면 백자, 옹기면 옹기 등 한 가지만 깊게 탐구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학생 때 모든 도자기의 본 모습인 흙을 다양하게 꾸릴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를 토대로 한 형식에 매몰되지 않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바람은 현실로도 이뤄지고 있다. 

 

“큰 작업들은 작품이라고도 흔히 말해요. 반면 작은 작업들은 작품이라기 보다 쓰임이 있는 도구이자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오브제(objet)에요.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때 자연의 이야기,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이야기가 도자기에 담겨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몫을 다해 작은 마을을 지키려는 청년의 마음은 이 마을에 천천히 뿌리내리고 있다. 자라는 속도는 느리지만 하나의 군락을 이뤄 바다를 건강하게 만드는 산호처럼 말이다. [제이누리=박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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