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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국 할머니, 4.3생존수형자 재심 판결 1년 후 ... "애들에게 안긴 멍에 벗었다"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70년을 따라다녔다. 사람들이 모이면 흉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들에겐 전과자의 자식이란 멍에를 안긴 것 같았다.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억울함을 안고 살 순 없었다. 아이들에게 짐을 맡길 순 없었다.

 

그렇게 뜻이 맞는 사람들과 싸움터로 나섰고, 마침내 아무리 부딪혀도 부서질 것 같지 않았던 거대한 ‘거짓의 역사’는 2019년 1월17일 무너져 내렸다.

 

그 날 오후1시30분,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는 18명의 4.3생존수형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4.3관련 군법회의 재심청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기각했다.

 

71년 전 있었던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법부가 사실상의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4.3과 관련된 사상 첫 재심이었다.  그 역사적인 판결에서 18명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승리했다. 마침내 억울함을 벗어던졌다.

 

 

그로부터 1년, 다시 만난 김평국 할머니(89)의 모습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처음에는 재판을 한다고 해도 실감이 안났다. 70년이 넘은 일이기도 하고, 사실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다니다보니 끝까지 재판을 받고, 이기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그렇게 미소지었다.

 

1948년이었다. 당시 제주읍 아라리에 살던 김 할머니는 고작 17살 나이에 그해 가을 난리를 피해 내려 온 삼도동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매만 죽게 맞았다. 별 기억도 안나고 매 맞은게 아프기만 했다. 맞기만 죽게 맞았지 죽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때 매 맞은 곳이 아프다.”

 

김 할머니는 그해 12월 5일 불법 군사재판에서 형법 제77조(내란죄)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70년 이상이 지나면서 그 때의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흉을 보는 것만 같았고, 자식들에게도 미안했다.

 

4.3도민연대와의 만남이 우연히 찾아왔다.

 

“4.3도민연대에서 일을 잘 시작해줬다. 그 분들이 시작해서 4.3을 건드려 줬고, 재판도 시작됐다. 덕분에 우리들도 죄를 다 벗고,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 할머니는 “이것을 그냥 뒀으면 4.3을 거치며 제주에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많은 사람들이 모른 채 흘러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만남 이후 이어진 일련의 재판과정, 그리고 승리, 그 이후 김 할머니의 삶은 겉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사실 몸이 아프기도 하고, 거동을 하는 것도 힘들다. 젊은 사람이라면 밖으로 나가 이런 저런 활동도 하고 하겠지만, 이제는 그게 힘든 나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늙은 사람이 죽어서 후대 족보에 징역을 살았다는 표시가 없어지게 됐으니, 그게 기뻤던 기억이 난다. 족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서 내가 수형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데, 자식들이 그것을 어떻게 풀겠는가.”

 

김 할머니는 그러면서 “그런 것이 없어지게 되고, 족보에 어지러운 것이 없어지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세 사람만 모여 있어도 나를 보고 징역쟁이라고 흉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랬는데, 재판을 걸어서 억울함을 풀고 해서 아주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해진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주 웃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억울한 옥살이의 멍에는 벗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소송에 들어간 상태다. 김 할머니를 포함, 18명의 수형자 및 유족들이 청구한 국가배상 금액은 모두 103억원이다.

 

그는 “이게 언제 마무리가 되서 언제 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국가가 보상을 반드시 해줘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김 할머니는 그러면서 “수형생활을 했던 사람들 중 안 힘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라며 “그렇지만 이제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을 흐리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난 재심 과정에서 공소기각 판결과는 별개로 자신이 받았던 선물에 대해 이야기 했다. 재심 청구 이후 한 기자가 찍어서 보내줬다는 사진이다. 사진은 방 안 선반 위 할머니와 마주보는 자리에 있었다.

 

“4.3 재심 청구를 한 후 여기저기 다니는데, 어느 방송국에서 한 기자가 ‘할머니, 사진 찍어서 잘 나오면 가져다드릴게요’라고 했다. 나는 그걸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들었는데, 어느날은 정말 사진을 만들어서 주더라. 사진 속에 모습이 내꼴인데, 내꼴이이더라도 험상궂지 않더라”

 

김 할머니는 그 사진을 자신의 영정사진으로 해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말했다.

 

“사진을 보면 내가 봐도 품위있는 사람이구나 싶다. 저 사진을 매일매일 본다. 저 사진을 보고 있으니까 이제 내 모습을 다 알 것 같다.”

 

김 할머니는 그렇게 억울함을 벗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진을 바라봤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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