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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아픔을 간직한 폐허 ... 곤을동(고놀개)

기사승인 2019.10.04  10: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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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17) ... 제주역사나들이 2차 화북 탐방코스 (2편)

■애기 업은 돌

   
▲ 애기업은 돌

바위형상이 애기를 업은것처럼 보인다.

흔히 사자바위등 바위를 동물 형상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애기업은돌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만큼 우리 제주인의 정서가 녹아든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바위에서 바다쪽으로 30미터정도에 솟아 있는 바위가 그 유명한 자살바위이다. (예전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고 한다)

애기업은돌은 나를 업고 키운 어머니 또는 업고 키우는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은 안된다고 암시하고 서 있는건 아닐까. 무언의 메신저로서 삶을 포기하려 이곳까지 온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곤을동으로 가는 길 입구

사진에 보이는 가로등 좌측으로 난 샛길로 가야 곤을동으로 이어진다. 무턱대고 올레길 리본만 따라가면 오현고 뒷길로 이어진다. 이정표 하나라도 제대로 세워주는 행정을 기대해본다.

   
▲ 곤을동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샛길. 비올땐 조심
   
▲ 곤을동 초입에 조성된 돌포장길

■곤을동

   
▲ 곤을동마을 전경
   
   
▲ 화북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안곤을 마을터

4.3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직도 폐허로 남아있어 화창한 봄날에도 그 처연함과 안따까움, 슬픔이 가득 묻어난다.

곤을동은  '고놀개'라는 옛명칭을 한자로 차음한 것이다. 제주어로 '개'는 포구를 의미한다.

고놀개 즉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데서 유래한다.  화북천이 곤을동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지는데(위 지도 참조) 하천 서쪽을 안곤, 가운데를 가운데 곤, 동쪽을 밧곤이라 불렀다.

안곤은 용천수 안드렁물을, 가운데곤과 밧곤은 덕수물을 식수로 썼다.

1949년 4.3의 광풍이 한창인 때 1월4일과 5일에 걸쳐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고 주민 24명이 희생된다.

당시 무장대가 화북일대 도로를 돌로 차단하고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수많은 군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군인 중 생존자가 무장대 한명이 곤을동 마을로 도주하는 것을 보고 상부에 알렸고, 이로인해 아무 죄가 없고 평화로웠던 곤을동 마을에 보복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토벌대의 주민 학살은 주로 중산간지대에서 일어났으나, 북촌리와 더불어 곤을동 같이 해안마을에서 발생한 것은 4.3중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다시는 이런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알아야하는 이유다.

   
▲ 안곤을을 지나 화북천을 건너 가운데 곤으로 가는 길 - 비가 많이 올 때는 주의해야 함
   
▲ 가운데 곤으로 올라가는 계단. 여기를 올라서 우측으로 가면 비석거리로 가는 길이다

■화북비석거리

   
   
▲ 화북비석거리의 13개 비석. 원래 화북일대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아 화북동사무소 근처에 있던 것을 도로 계획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

제주에 왔던 목사나 판관등 관리들은 화북포를 거쳐 들어왔다가 다시 육지로 나가곤 했다.

원래는 관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나 조선후기에는 너도나도 자기 자랑질하려고 선정비,공덕비,거사비등의 명목으로 세운듯 하다. 예로 임헌대라는 목사는 본인의 폭정으로 민란이 일어나자 화북포에 숨었고 귀환후에 파직당한 인물인데 버젓이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셀프 비석(?)이 아닌가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 및 민씨 척족들의 매관 매직으로 들인 돈을 회수하려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제주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했다고 한다.  대부분 자기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을 가지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 화북의 비석거리의 비석뿐만 아니라 제주도내 이런 비석들에 새겨놓은 이름이 훼손된 곳이 많다.

당시 민심을 대변하는 방증일 것이다. 특히 이름 석자 중 성에 훼손을 많이 했는데 가문을 중시했던 우리 사회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나와있던 13개 비석을 일일히 비교하고 희미한 글자를 확인하여 순서대로 누구의 비석인지 맞추어 보았다.(여기에 이의가 있는분은 언제든지 지적바랍니다)

좌측으로부터 첫번째
목사 심상연 청덕비(1683.6~1685.9재임)
아마도 제일 오래된 비석일듯.
재임시 조정에 청원(계청)하여 문관이 제주목사로 부임시 해마다 제주사람 두명을 과거시험 볼 수 있게 하는 선정베품

두번째
목사 홍공규 거사비(1884년 전후 재임)
1884년 연희각 중수

세번째
불망비(알아볼수 없음)

네번째
목사구공재룡거사비(구재룡 1839.3~1841.3파직)
부역과 추렴을 가벼이하고 선정을 베품.
당시 모슬포에 영국선박이 출현했는데 두려움에 대응 않다가 파직당함.
도남과 일도동에도 비석이 있는데 아마도 후에 동생이 제주목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보임.

다섯번째
찰리사이공규원청덕비(이규원 1891.9~1894)
김지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하자 찰리사로 와서 안정시킴
1892년 오현단을 귤림서원 옛터에 축조.1984년 갑오개혁에 의해 각종폐단 혁파(?).

여섯번째
목사 윤공구동청덕선정비(윤구동, 1815~1817재임)
재임시 이양선표류시 민폐를 없애려 공피전 1800냥조성, 공피창운영.
후에 1817년 흉년시 이 자금으로 전라도에서 구휼미 구입하여 도민구제.
외도동 월대, 성산읍 수산리에도 공덕비가 있음

일곱번째
목사이공원달휼민선정비(이원달, 1837.11~1839.3)
재임중 세금감면, 환곡의 폐단 방지.
당시 표류를 가장하여 풍랑속에 배를 띄웠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와중에 상습적으로 의도적 표류행위를 한 제주인 고한록 처형

여덟번째
목사장공인식휼민선정비(장인식,1848~1850)
제주의 환곡이 과하다고 비변사에 고해 절반으로 줄게함.
공진루 중수.
상현사를 영혜사로 개명하고
당시 유배중인 김정희의 글씨를 받아 편액설치.
삼성사에 숭보당을 건립, 학업장려
북성안에 무사 사격훈련장 심고당을 건립.
남학당, 서학당, 우학당을 거설하여 학문장려.
용담동 향교, 삼성혈에도 선정비 있음

아홉번째
목사이공현공휼민선정비(이현공,1850~1851)
1850년 관덕정중수
1851년 제주향교에 서재를 건립하여 학문장려.
삼성혈에 삼성혈 사우를 개건한공로로 삼성혈에도 거사비 있음

열번째
판관고공경준거사비(고경준,1883.8~1885.4 제주판관재임)
제주출신
제주의 지역 및 유학발전에 힘씀.
흉년에 백성이 부담할 환곡을 자신의 녹봉으로 감해줌.
한경면 두모리에도 선정비 있음

열한번째
목사백희수휼민선정비(백희수,1851.7~1853.12  재임)
귤림서원개건.
1851년 별저미와 내탕전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진휼.
1852년 충암 김정의 적거지에 김충암적려 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직접 씀

열 두번째
목사 임공헌대거사비(임헌대, 1862.2~1863.1파직)
1862년 진주민란의 여파로 제주민심이 흉흉하던때 세금포탈로 임술농민항쟁 발생.
강제검, 김흥채가 세금때문에 민란을 일으키자 도민들이 호응하여 제주읍성 점거.
임헌대는 화북으로 도주했다가 달포후 귀환했으나 파직되어 평북초산으로 유배됨.
비석거리비석은 셀프비석(?)일 듯.

 

 

 
▲ 김승욱

열세번째
조방장홍공재우거사비(홍재욱)
내용없음ㅡ화북진성을 보수할때 공을 많이 세운 기술자

이상 열세개의 비석의 뒷조사(?)를 해봤다. 비석의 주인공이 훌륭한 분이든 아니든 그 분들이 있어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게 아닌가한다. 

   
▲ 비석거리를 지나 바닷가로 향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길로 가면 됨
   
▲ 가는길 중간에 포구에 위치한 고즈넉한 옛길
   
▲ 여기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다시 옛길이 나옴 (맨위 지도 참조)
   
▲ 화북의 옛길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거닐었을 이 길은 새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버려진 듯 무심하기만 하다. 지금 발끝에 채이는 그 돌을 과거에도 수많은 이가 밟고 다녔으리라.

   
▲ 새로 확장된 해변도로를 따라가다가 보이는 우측길로 직진하면 다시 옛길이다.
   
▲ 금돈지 입구에 있는 용천수 큰짓물

아마도 옛날 큰길가에 있다고해서 큰질물이 큰짓물로 된게 아닌가 추측한다. 제주읍의 한질골이 한짓골로 불리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반듯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은 아니지만 솟는 그 물은 여전하다.

   
▲ 해안에 면한 가옥의 돌담

큰짓물 바다쪽에서 좌측으로 보면 바다에 면한 가옥의 담이 보인다. 아마도 환해장성의 일부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러한 구조의 주택은 신촌, 조천, 북촌 일대에서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김승욱 kswinner@naver.com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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