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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세월 너머 ... 제사 '반'에 꼭 낀 '삼미빵'

기사승인 2019.09.05  09: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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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14) ... 제주 원도심 무근성-용담코스(4편)

□구름다리

   
▲ 용연 구름다리 입구

다소 위험하게 출렁이던 용연의 작은 구름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만든 구름다리다. 출렁이는 정도가 스릴 넘치던 예전만 못하나 더 안전해 보인다.

   
▲ 예전의 구름다리 (1967~1985)-출처. 사진으로보는 제주 옛모습,제주시

야간엔 조명시설을 해 놓아 꽤 볼만하다.

입구엔 연인들의 사랑의 징표로 유행이던 자물쇠를 걸어둘 수 있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자물쇠를 걸어둔 연인 중에 백년해로 할 커플이 과연 몇 프로가 될지 궁금하다. 괜한 심술을 부리면서 구름다리 입구에 자물쇠 자판기나 하나 설치하면 잘 팔릴까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중년에게 더 이상 낭만은 사치인지 헛 웃음만 나온다.

□부러리마을

   
▲ 향교와 부러리마을 일대 옛길

무근성에서 배고픈 다리를 건너면 용담에서 꽤 큰 마을인 부러리와 이어진다.

   
▲ 병문천을 지나 부러리로 가는 길 입구
   
▲ 부러리 일대-부러릿동산엔 아파트가 서있다
   
▲ 부러리 일대 풍경

구도심이긴 하나 시내일진데 부러리 일대엔 아직도 제주의 정취를 가진 옛 골목이 남아있다.

제주시내에서 살아 왔어도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옛길을 걷는 기분좋은 설렘은 나들이를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른 풍경이 반긴다. 그것이 즐겁다.

□구한질(구한길)

1910년대에 향교 앞에 지금의 신작로가 생기면서 예전에 한질(한길,큰길)이 구한질이 되어 버렸다.

   
▲ 서문과 정드르(지금의 비행장)로 이어진 구한질(빨간색길)

구한질은 서문에서 부러리마을을 지나 정드르를 거치는 주 도로였다. 제주읍의 서쪽을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길이다. 이형상 목사도, 추사 김정희도 일반 백성들도 이 길을 지나다녔다. 확실하다.

1901년 신축교란 때 이재수는 이 길을 따라 하얀 말을 타고 입성했다.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질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길도 직선으로 나 있다.

   
▲ 구한질

이 길은 병문내의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건너면 들물거리이다.

   
▲ 구한질 입구의 태광식당 뒷면지금은 한치불고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태광식당은 과거 70~80년대 삼미빵집

지금은 한치불고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태광식당은 과거 70~80년대 삼미빵집 자리이다. 지금도 그때 그 건물이다. 제주시내에서 성장한 40대 중반 이후는 다 기억한다. 애월 출신들도 빵 사러 왔던 추억을 얘기한다.

제주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반'이라고 해서 작은 접시에 한사람씩의 몫으로 제사음식을 나눠 주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반'의 음식종류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웬만하면 '반'에 꼭 삼미빵이 한개씩 들어 갔다. 삼미빵은 찐빵 비슷한데 모양이 아몬드처럼 갸름했다. 팥 앙금은 많지 않았다. 삼미빵은 사올때 꼭 구덕에 넣고 왔다.

반접시엔 삼미빵 하나에 지름떡 하나, 순대, 돼지고기 적갈, 가끔 사과 같은 과일이 들어 있었다. 물론 다 한쪽씩이다. 기억이 아련하다.

좀 사는 집엔 팥앙금이 가득하고 때깔도 고급진 '고급빵'이 들어 갔다. 그나마 반개 이상은 어림없었다. 지금은 왜 그 맛이 안 날까. 제주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던 그 삼미빵이 보고싶다. 심부름 갔을때 하얀 김을 뿜어내며 찜기에서 막 꺼내 구덕에 삼미빵을 채워 넣던 그 장면이 40년 세월을 너머 선명히 떠오른다.

□새과양

새과양은 과양(광양의 제주식 발음)에 있던 제주향교가 1827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오면서 새로운 마을이 생긴데서 연유한다. 새로 생긴 과양이라는 뜻이다. 향교와 구한질 사이의 마을이다. 아마도 향교와 연관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 향교에서 새과양으로 가던 옛길

향교에서 새과양으로 가던 옛길을 만났다. 폭이 1.5m가 안되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1914년도 지적도에 표기된 길이고 아직도 살아 있다. 감사한 일이다. 개발의 논리로 무지막지하게 옛 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어 왔음에도 이런 길이 제주시내엔 많이 살아 있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차가 다닐 수 없으면 건축법상 도로가 아니다. 그래서 폭이 4m이상이 되어야 도로로 인정한다. 도로는 도로일 뿐이다. 좁든 넓든 우리에겐 살아있는 길이 있다. 새과양 사람들이 향교에 갈 때 지나던 좁은 이 길처럼.

내가 길을 중심으로 제주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룡못

   
▲ 비룡못이 있던 자리

비룡못은 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던 연못이다. 맑고 시원한 물이 용솟음쳤다고 한다. 이름으로 보아 용과 연관된 전설이 있는 듯 하다.

   
▲ 1914년도 비룡못 일대 지적도

1914년 지적도에는 비룡못 자리에 지목이 연못을 뜻하는 지(池)로 되어 있다. 위그림의 파란색 부분이다.

   
▲ 1960년대사진-비룡못이 어렴풋이 보인다

70년대까지만해도 이곳에 물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물이 말라버려 지금은 아예 메워버리고 작은 공원이 되었다. 그나마 중간에 새 도로가 나서 두 동강이 난 채로.

   
▲ 비룡못 가에 자라던 벚나무

비룡못 물가를 지키던 몇 그루 벚나무가 사라진 연못을 그리워하며 옛날 그 자리에 서있다.

비룡못은 없어졌지만 그 일대에 비룡길이라는 도로명으로 남았다.

□생굣질(향교길)

   
▲ 지금의 지도에 입힌 생굣질(녹색표시길)

목사가 향교 대성전에 제를 지내러 갈때 이 길을 통해서 갔다. 위 그림에 녹색으로 표시된 길이다. 병문내를 건너 향교로 향하던 이 길은 신작로가 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일부가 없어졌지만 비룡못 아래에서부터는 남아 있다.

   
▲ 생교질이 끝나는 부분
   
▲ 김승욱

생굣질 서쪽 끝에는 현재 제주중학교 담벼락으로 막혀 있다. 이 곳이 예전엔 향교의 정문자리다. 제주중 교정은 예전 향교의 명륜당터다. 제주의 유림들이 명륜당터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 자리 앞 길은 다른 옛길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간이 넓다. 관덕정이나 이아 앞길처럼 사다리꼴 형태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만 차갑게 서 있을 뿐 이정표도 없고 자료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아쉬울 뿐이다.

   
▲ 제주중 안쪽에서 본 향교 정문자리

필자가 이 학교를 다닐적엔 운동장이 지금보다 2m정도 낮았다. 지금은 성토를 해서 높여놨다.

   
▲ 생교질
   
▲ 제주향교 정문-상상도

관청이나 향교, 서원등의 정문 앞에는 홍살문을 세웠었다. 예전 향교 정문은 이런 모습일거라 상상하면서 그려보았다.(윗 그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김승욱 kswinner@naver.com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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