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됐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했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담았다. 새로운 나라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제주에서는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진 사건을 시작으로 제주 사회는 극심한 탄압과 갈등에 휩싸였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발생하면서 비극은 본격화됐다. 이후 5·10 단독선거를 둘러싼 충돌과 진압이 이어졌고, 헌법이 공포된 7월에도 주민들은 체포되고 고문당했으며 목숨을 잃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은 분명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선언했지만, 제주도민에게 그 헌법은 너무 멀리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다. 이후 제주4·3은 단순한 지역의 무력 충돌이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사건으로 규정됐고, 진압은 한층 강경해졌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됐고, 10월 17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사람을 모두 '폭도'로 간주해 사살할 수 있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주민 소개령과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됐다.
그리고 194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역사상 첫 계엄령이 제주에 선포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령 역시 그 시절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이었다. 헌법은 국가 비상사태를 대비해 계엄 제도를 두었지만, 제주에서는 그 권한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보다 주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대규모 희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헌법이 존재했지만 헌법 정신은 사라진 것이다.
1948년 4월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력 진압 대신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직접 만나 충돌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을 진행했고, 실제로 긴장 완화의 가능성도 보였다. 그러나 오라리 방화사건을 계기로 협상은 무너졌고 김익렬은 결국 제주를 떠났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훗날 미군정 정보보고서 등으로 밝혀진 바 우익단체의 소행이었다. 평화가 아닌 갈등의 촉매였다.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 진압을 추진했지만 같은 해 6월 부하 장병에게 암살됐고, 이후 다시 송요찬이 제9연대장을 맡으면서 초토화 작전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제주의 역사는 협상이 아니라 무력 진압의 길로 흘러갔다.
헌법은 국민의 생명권과 자유권, 적법절차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제주에서는 영장 없는 체포와 고문, 즉결처형, 소개령, 집단 학살이 이어졌다. 헌법은 분명 존재했지만 제주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에게 총을 겨눈 것이다. 그렇기에 제주4·3은 단순한 지역의 비극을 넘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헌법이 가장 무력했던 순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매년 7월 17일 제헌절이 되면 우리는 헌법의 탄생을 기념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이날을 조금 다른 의미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헌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헌법이 실제 국민을 지켜냈느냐는 질문이다.
1948년 7월, 대한민국은 헌법을 가졌지만 제주도민은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제주4·3은 헌법이 종이에 적혀 있는 것만으로는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역사다.
제헌절은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날인 동시에, 헌법이 가장 지켜지지 못했던 역사를 함께 되새기는 날이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제주4·3이 대한민국 헌법에 던지는 가장 무거운 질문이다. [제이누리=이기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