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중세유럽 수도원에서 호르헤와 윌리엄이라는 당대 최고의 수도사들이 웃음에 관한 서로 다른 정보(information)와 지식(knowledge)을 놓고 벌이는 비극적인 소동극이다.
영화 속 도서관장인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은 사악한 것이라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간직하고 있다. 호르헤에게 웃음이란 인간들에게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설파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론’은 끔찍한 불온문서일 수밖에 없다. 호르헤는 당연히 「시학」을 ‘이단의 문서’로 분류해 도서관 가장 깊은 방에 봉인해 버린다.
이는 우리가 다름과 낯섦을 대하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웃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사악하지 않다’는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한 프란치스코 교단의 윌리엄 수도사가 마침내 그 「시학」을 봉인해제하기 위해 들이닥친다.
웃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습득한 정보와 지식이 너무 낯설고 다르다. 호르헤와 윌리엄은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웃음의 정보와 지식을 모두 동원하면서 ‘최후의 담판’을 벌인다. 불행하게도 각자 간직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에서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신학계의 거물들은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
결국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등불이 쓰러지고,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한다. 그러나 「시학」 단 한권에 꽂혀버린 윌리엄이나 호르헤 모두 일단 화해하고 불부터 끄려는 기색이 없이 그 책 한권에 집착할 뿐이다.
그사이에 불은 번지고, 마침내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원본을 한 장씩 찢어 씹어 삼키면서 스스로 불에 타 죽는 길을 택한다. 도서관 지하실 가장 깊은 방에서 화재가 시작했으니 도서관 전체로 불이 번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중세 유럽 최대ㆍ최고의 ‘지식의 요람’이라 자부했던 수도원 도서관에 보존돼오던 인류의 지식의 정수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돼 사라진다.
호르헤와 윌리엄 모두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답게 수많은 ‘웃음 지식’으로 무장했지만, 그 많은 것들을 지혜(wisdom)로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우리가 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의 습득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이지만, 호르헤나 윌리엄은 그들이 습득한 정보와 지식을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태워버리는 데 사용한다.
호르헤의 모습을 통해 이 영화의 원작자 움베르토 에코가 고발하는 것은 14세기 수도원의 광기다. 하지만 정보와 지식이 폭증하지만 지혜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 시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천재시인’ T.S 엘리엇(Eliot)도 100년 전에 이미 지식정보와 시대의 난맥상을 예견한 듯하다. 그의 시 ‘바위(Rockㆍ1934년)’의 한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knowledge we have lost in information? Where is the wisdom we have lost in knowledge?).” 정보와 지식은 넘쳐나는데 정작 그 열매인 지혜는 찾을 길이 없다는 개탄인 듯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1327년 11월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설정해 놓고, 인류의 가장 소중한 지적 유산이 황당하게 사라지는 참상을 그려낸다. 영화 속 수도원 장서각 화재사건은 허구지만, 에코가 소환한 사건은 영화의 시대상황과 거의 동시대였던 1258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실재했던 도서관 화재사건의 오마주에 가깝다.
중세학문의 세계적 중심이었던 바그다드에 존재했던 ‘비트 알 히크마(Bayt al-HikmaㆍHouse of Wisdomㆍ지혜의 집)’는 인류역사상 최대최고의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이 도서관이야말로 이슬람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지혜의 집은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철학과 과학이란 이질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이단’으로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아랍어 번역사업을 펼쳤던, 당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혜의 용광로였다고 한다.
지혜란 서로 다른 지식과 정보를 한데 녹여낼 때에만 생산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역사가 비트 알 히크마(Hikmaㆍ지혜)의 역사다. 아랍어 ‘히크마’는 단순히 정보를 습득을 넘어, 삶의 이치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의미한다. 이 지혜의 집이라는 용광로가 제 기능을 발휘했던 400여년간 바그다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58년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 칸(Hulagu Khan)은 바그다드 함락과 동시에 비트 알 히크마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불태워 버린다. 비트 알 히크마가 생산한 모든 지혜도 사라진다. 수많은 지혜의 기록들을 강물에 처박아 그 잉크가 녹아 티그리스강이 검은색으로 흘렀다는 야사野史까지 내려온다. 훌라구 칸은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호르헤와 같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장서각 화재를 통해 인류가 쌓아올린 찬란한 문명이 광기나 편협함 때문에 얼마나 허망하게 한줌 재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지 고발하는 듯하다. 또한 ‘다른 생각과 관점들’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봉인해버리거나 아예 불태워버렸던 인류의 만행을 고발한다.
관객들은 에코가 고발하는 기괴한 몰골의 호르헤 수도사의 광기와 편협함을 어이없어하거나 조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지식과 정보들도 수용해 지혜를 생산할 수 있는 관객들만 호르헤 수도사를 조롱하고 비난할 자격이 있다면, 과연 관객 중에 호르헤 수도사를 비난할 수 있는 관객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본사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