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현상금 사냥꾼’ 존 루스(커트 러셀 분)가 현상금 1만 달러가 걸린 데이지라는 여자 수배범을 자기 손목에 수갑을 나눠 차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호송하는 중이다. 요즘이야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온갖 복잡한 재판절차를 거쳐야 처벌이든 처형이든 할 수 있지만, 1870년대 ‘서부 개척 시대’ 미국에서는 ‘현상 수배범’으로 공지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서부 개척 시대 미국에선 현상 수배범으로 공지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938/art_17582409002019_1c3ab9.jpg?iqs=0.020415631909248777)
현상수배 전단에는 대개 ‘생사 불문(Dead or Alive)’하고 그 수배범을 잡아오는 자에게 상금이 약속된다. 죽여서 ‘가지고’ 오든 산 채로 끌고 오든 상관없다. ‘서부의 법(Law of the West)’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위는 없다. 오히려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요즘 무죄추정의 원칙을 악용하는 법기술자들이 창궐하다 보니 그 시절의 서부의 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모양이다.
당연히 현상금 사냥꾼들은 수배범을 발견하면 현장에서 죽여서 ‘가지고’ 가는 것이 상식이다. 수배범을 산 채로 호송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 생사 불문의 수배전단이 배포된 수배범은 산 채로 법정에 끌려가면 100% 교수형이다. ‘이판사판’에 몰린 수배범은 시한폭탄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껴안고 갈 만큼 불살생(不殺生)의 원칙을 고집하는 현상금 사냥꾼은 없다.
수배범을 죽여서 ‘가지고’ 가는 업계의 관행과 달리 존 루스는 수배범을 반드시 산 채로 데려가 교수대에 세우는 원칙으로 업계에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래서 업계에서 그의 ‘별호(別號)’는 ‘목매다는 자(Hangman)’다. 현상수배범이 산 채로 팔면 돈을 더 받는 생선도 아닌데 반드시 산 채로 데려간다.
같은 현상금 사냥꾼인 워런 소령(새뮤얼 잭슨)은 수배범 3명을 모두 죽여서 안전하게 운반하는 길에 루스의 마차를 얻어 탄다. 1만 달러짜리 수배범 데이지를 위험천만하게 산 채로 호송 중인 루스에게 죽여서 안전하게 운반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루스의 대답은 단호하다. “흉악한 범죄자는 단순히 죽음만으로 죗값을 모두 치르는 게 아니다. 교수대에 세워 ‘조리돌림’하고 ‘공개 처형’당해야 한다.”
루스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다. 현상수배범이 여자인데, 여자한테까지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페미니즘적’인 문제 제기에도 단호하다. “쏠 수 없는 총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자든 남자든 똑같다.” 실제로 루스는 조금만 기분 상하면 사냥총 개머리판으로 여성 수배범인 데이지의 이마를 후려치기도 하고, 팔꿈치로 얼굴을 찍어 피떡으로 만들기도 한다.
![미국은 2023년 트럼프의 머그샷을 공개하기도 했다.[더스쿠프|뉴시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938/art_17582408997246_aaba08.jpg?iqs=0.3325488715254783)
생사 불문이 아니라 ‘남녀 불문’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불만이 많은 남성분들이라면 후련해할지 모르겠다. 워런 소령은 ‘할많하않’ 표정으로 입을 닫는다. 루스가 전세 낸 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주제에 굳이 루스의 비위를 긁을 필요 없다.
어쩌면 루스는 단순한 현상금 사냥꾼이 아니라 서부 개척시대의 ‘엔터테이너’였는지도 모르겠다.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전근대(前近代) 시대까지 ‘공개 처형’이 있는 날은 해당 도시와 마을의 잔칫날이 되곤 했다고 한다. 멀쩡한 신사들이 도시락까지 싸들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장 가듯 처형을 구경하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분노에 찬 피해자의 가족친지도 아니고 ‘정의의 실현’을 지켜보겠다는 정의파들도 아니다. 요즘 ‘3S(SportsㆍSexㆍScreen)’라는 우민화 정책처럼 당시에는 공개처형이 주민들의 오락거리이자 불만을 잠재우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교수대를 단두대로 바꾸자 싱겁다며 사형수들이 목매달려 발버둥치는 처절한 모습(마지막 춤ㆍlast dance)을 다시 보게 해달라는 민원이 폭주해서 결국 다시 교수대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인간의 내재적 잔인성을 향해 더 이상 던질 말은 없다.
존 루스가 현상수배범을 묶어 마을로 들어서는 날은 마치 서커스단이 심심한 마을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 여자 사형수를 목매다는 일이라면 마을사람들을 더욱 들뜨게 한다. 중세의 악명 높은 ‘마녀사냥’이 그랬다. ‘조리돌림’과 ‘공개 처형’의 사회학이다.
요즘 내란혐의로 구속된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벌였다는 ‘속옷 저항’ CCTV 영상 공개를 둘러싸고 ‘국민의 알권리 vs 반인권적 조리돌림’ 논쟁이 벌어진다. 제아무리 패륜·흉악범이라도 신상과 사진 공개가 극도로 제한적인 우리네 법체계에서 구속된 대통령의 대단히 민망한 영상 공개가 조리돌림이라고 분개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2023년 현직 대통령인 트럼프를 ‘2020년도 대통령선거 결과 뒤집기’ 혐의로 기소해 ‘머그샷’까지 공개하는 미국의 경우라면 아마도 사정이 다를 듯하다. 믿기 어렵지만 미국에서는 현재도 음주운전이나 좀도둑질한 자들에게 자신의 죄목을 적은 팻말을 들고 하루 종일 길에 서 있게 하는 조리돌림이 존재한다.
우리 경찰은 범죄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일세라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싸서 데리고 다니지만 미국은 소위 ‘범죄(용의)자 포토라인 세우기(perp walk)’가 당연시되는 사회다. 특히나 1990년대 뉴욕시장으로 말썽도 많았지만 범죄율을 획기적으로 낮춘 공로만큼은 인정받는 루돌프 줄리아니(Rudolf Juliani)가 범죄대응에 애용했던 것이 범죄자 포토라인 세우기였다.
![전직 대통령의 CCTV 논란을 보고 있으면, 황망함이 느껴진다.[더스쿠프|뉴시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938/art_17582408991701_5abd55.jpg?iqs=0.8595435862703288)
대륙법의 전통은 ‘권리가 있는 곳에 구제책이 있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졌지만, 영미법은 ‘구제책이 있는 곳에 권리가 있다’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한마디로 구제불가능한 자(교화 불가능한 자)들의 권리(인권)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타인의 인권과 권리를 침해한 자는 자신의 인권과 권리도 제약받을 이유가 있다’고 규정한다.
내란이란 중대한 혐의로 구속된 대통령의 민망한 구치소 영상을 공개하는 것이 반인권적인 조리돌림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옳은지, ‘타인의 인권과 권리를 침해한 자는 자신의 권리도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영미법 정신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법의 기본정신과 체계가 대륙법과 영미법이 혼재돼 있어 더욱 혼란스러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공개되면 부끄러운 짓이고 국격까지 훼손될 정도의 짓이라면 애초에 하지 말았으면 이런 문제도 없었을 테니 안타깝다. 트럼프의 분노에 찬 표정의 머그샷 사진은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트럼프 홍보에 역으로 유효적절하게 사용됐지만, ‘속옷 저항’ 사진은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