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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36) ... 8차 세화-하도 탐방코스 (1)

 

제주역사나들이 8차 탐방코스는 해녀박물관을 출발하여 해녀항일기념탑을 지나 숨비소리길과 올레21코스 일부를 지나 아름다운 하도리 마을 안길을 거쳐 토끼섬, 별방진, 세화도구리통을 거니는 13Km 길입니다.

 

■제주 해녀박물관

 

제주의 해녀는 제주에서의 삶을 대표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이유가 크겠지만 화산섬에서의 척박한 토양은 그들을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바다 역시 녹록치 않아 삶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녀들의 땀과 눈물이 더해져 갔지만 바다는 여전히 더함도 덜함도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어준다. 해녀는 아니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는 해녀들이 있지만 점차 줄어 들어 안타까움이 들게 한다. 세상의 변화를 그 누가 거스를까.

 

해녀분들과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제주해녀문화'가 한국에서 19번째로 등재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해녀박물관은 2006년도에 개관하였다.  8만6556㎡의 넓은 부지에 해녀항일기념탑과 함께 한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게된다. 원래 제주에서는 잠(潛)자의 제주식 발음이 아래아가 들어가 "ᄌᆞᆷ"인 '좀녀(ᄌᆞᆷ녀) 또는 좀녜(ᄌᆞᆷ녜)'라고 불렀다.

 

다만 '위백규'의 [존재전서](1791)에 완도에서 '해녀'가 전복을 따는 모습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널리 쓰인 표현은 아니지만 해녀라는 용어가 전근대시기에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41면 중 <병담범주>(1702년)에는 용두암 부근에서 물질하고 있는 해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1702년~1703년 기간 동안 1702년 10월 29일~11월19일까지 21일 동안의 순력과 재임기간 중 참여한 행사의 장면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 그림으로 남긴 서문 2면과 41면의 화첩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형상 목사가 1703년 5월에 이임하였으니 병담범주에 표현된 장면은 늦가을에서 초봄의 시기일 것이다.

 

병담범주는 이 추운 계절에 변변한 장비와 의복이 없이 차디 찬 바다에서 물질하는 좀녀들의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의 작업을 보여준다. 병담범주는 용연계곡에서 경치를 즐기며 양반네들이 기생을 끼고 노는 풍류를 묘사했으나 그 옆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좀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좀녀가 전복을 따는 수고로움을 애처럽게 여겨 조선 초기 세종때 제주로 부임한 '기건'목사와 같이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밥상에 올리지 말라한 선량들도 간혹 있었지만 관리와 양반들의 가렴주구는 근세까지 내내 제주 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러면 왜 힘든 물질을 제주에선 여자가 도맡아 하고 있을까.

 

조선시대 기록에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들이 전복을 채취해 진상해 온 것으로 나와 있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남자인 포작인들이,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는 여자들이 미역같은 것을 채취하였다.

 

그러나 포작인들에게는 과도한 진상과 공납이 부여된다. 남자는 20필, 여자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한다. 또한 포작인들에게는 군역으로 잠수부와 격군의 의무도 부과했다. 무리한 작업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단신으로 또는 가족들을 데리고 섬을 떠나는 이가 많아지자 급기야 조선정부는 인조6년(1629년) 제주인에게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이로 인해 섬사람들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장거리 항해를 위한 선박의 건조도 금지하니 제주인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항해술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몰래 도주하는 포작인들이 속출해서 포작인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자 아예 숫자가 많은 좀녀들에게 포작의 의무를 다 떠넘긴다.

 

제주의 해녀는 이런 슬픈 사연으로 탄생된 것이다.

 

 

부산에도 천여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잠수기업가들을 동원해 제주 바다자원을 싹쓸이 해갔다. 물질을 해도 나올 게 없어지자 멀게는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해서 경상도, 전라도, 일본, 중국 등지로 많은 해녀들이 생계를 위해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많은 사연을 안고 진출했다. 이들을 출가해녀라고 부른다.

 

부산 해녀의 경우는 영도에 집중된다. 조선말 단발령으로 인해 말총으로 만든 갓이나 탕건의 수요가 없어지고 일제에 의해 바다자원이 고갈되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해녀들이 부산 영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주은행의 도외 지점이 서울말고는 육지부에서는 부산 영도구가 유일하다고 하니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해녀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상군, 중군, 하군이 그것이다. 상군해녀는 수심 15m가량의 바다에서 2분정도 숨을 참고 작업하는 베테랑이고 중군은 10m정도, 하군은 얕은 바다에서 작업한다. 나이가 들거나 어린 해녀는 기량이 적어 하군 해녀일 수 밖에 없다.

 

 

뇌선.

 

바다에서의 물질은 늘 고통이었다. 잠수병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었고 고단한 작업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육체를 한없이 갉아 먹었다. 물질 전이나 후에 복용하던 약이 뇌선이다. 비마약성 진통제로 육신의 고통을 이 약으로 잠시나마 달래고 또 바다로 들어갔다.

 

 

 

해녀의 고무작업복은 80년대 들어서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얇은 천으로된 물옷 즉 소중이를 입었다. 목숨만큼 소중해서 물옷을 소중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차디찬 바다에서 그녀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어떻게 그 고통을 견디고 가족들을 먹여 살렸을까. 해녀의 노래는 그 아픔을 녹아낸다.

 

요물 아래 은과 금이 쌩였건만(깔렸건만)

 

높은 남(나무)의 열매로다

 

요영 하멍 악담 부담 벌어서

 

없는 부모 한생활을 시킬거멍

 

어느 동생 글공부를 시킬거냐

 

만날 천날 벌어도 내 먹기가 바빠진다.

 

일본서도 들어온 새여

 

오늘 가져 넬 가젠 하난

 

청새 밭디 첫 이슬 노령

 

놀개(날개) 젖언 못 놀암더라

 

물도 뱅뱅 돌아진 섬에

 

삼시 굴멍 물질 호영

 

한푼 두푼 모은 금전

 

정 든님 술 값에 다 녹아 간다.

 

악하고도 모진 것은 임이로다

 

임이라고 만났더니 임은 아니 원수로다.

 

보름달 같은 요 내 얼굴 어딜 가고 아니오다

 

안동 같은 요 내몸이 철대같이 몰랐구나

 

수덕 좋은 선왕님아

 

앞발로 해어 치멍

 

뒷발로 거더 차멍

 

고등 생복 좋은 여로

 

得達하게 해여 줍서

 

숨비소리는 물속에서 나올때 일시에 폐에 가득찬 이산화탄소를 내밷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이다. 지금도 바닷가에서 작업하는 해녀들을 만날 때 들을 수 있다.

 

 

물숨이라는 말이 있다. 해녀를 주제로한 다큐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숨을 쉰다는건 공기를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숨을 쉴때 공기가 아닌 물을 마신다는건 즉 죽음이다. 최근에도 고령의 해녀들의 작업 중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간간히 들린다. 고통스러운 일상의 작업과 고단한 삶 끝에 물숨은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들은 강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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