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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기생충 (3)

기택네는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다. 우연한 기회에 부잣집 과외선생님으로 위장 취업한 아들을 필두로 딸과 아내, 그리고 기택까지 한집에 취업하면서 일가족의 사기 행각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기택네 가족이 악질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한집에 위장 취업하지만 그 집안을 말아먹을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재수·삼수 끝에 대학 진학을 아예 포기한 기택의 아들은 어느 날 친구의 부탁을 받고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해 부잣집 영어 과외선생님으로 사기 취업한다. 해보니 별거 아니고 사모님은 생각보다 헐렁하고 순진하다. 곧이어 그의 여동생 역시 학력·경력을 몽땅 위조해 미술치료사로 위장 취업한다. 그리고 백수의 우두머리인 원조 백수 기택은 그 집의 운전기사로, 아내는 가정부 자리를 꿰차고 만다. 그야말로 일가족 사기단에 금맥이 터졌다.

 

기택네 일가족이 대단히 악질적인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범죄에도 생계형 범죄가 있고 기업형 범죄가 있다면, 기택네는 다분히 생계형 가족사기단이다. 일가족이 한집에 위장취업하지만 그 집안을 말아먹을 생각까지 갖진 않는다. 그저 4가족이 모두 안정적 수입원을 확보해 돈 모을 소박한 꿈에 부푼다. 그들의 근무태도도 꽤 성실하다.

 

기택은 성심성의껏 젊은 사장님을 모시고 운전한다. 어느 날 뒷자리에 앉아 퇴근하던 사장님이 무료했던지 무심하게 자기 아내 험담을 한다. 기택을 대화 상대로 여겨 문제의 해법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독백에 가까운 불평이 분명한데 기택이 자신을 사장님의 대화 상대로 착각하고 감히 사장님네 ‘내실’의 일에 한마디 거든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기택이 대단한 말실수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그래도 사모님을 사랑하시지 않느냐’는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집에 돌아온 사장님은 아내에게 새로 온 운전기사를 잘라야겠다고 못내 찝찝해한다. 왜 그러냐는 아내에게 사장님은 ‘다른 건 괜찮은데 가끔 선線을 넘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해고 사유가 ‛선을 넘었기 때문’이 되는 셈이다. 사장님이 보기에 운전기사가 감히 사장님 부부의 사적인 관계를 언급하는 것은 마치 시위대가 폴리스 라인을 넘어 시설에 난입한 것과 같은 중대한 사안이다. 기택이 성실하고 수더분하고 운전 실력도 출중하고 모두 좋은데, 선을 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선(線)’이란 사회생활에서 항상 ‘문제적’이다. 구분과 구획, 분별을 하기 위해서 선이란 필수불가결하지만 그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 또한 단순하지 않다. 한국전쟁 당시 휴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전쟁 막바지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은 끔찍한 역사의 기록이다.

 

국경이나 휴전선처럼 철책으로 확실하게 구분한 선은 양호한 편이다. 의도하지 않은 월경(越境)의 위험성은 없다. 그러나 망망대해에 지도의 좌표상에만 존재하는 국경선은 참으로 난감하다. 고기잡이에 열중하던 고깃배들이 걸핏하면 끌려가고 선원들이 봉변을 당한다.

 

 

그러나 지도상 좌표에라도 존재한다면 그나마 낫다. 가장 문제적인 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명확히 획정되지도 않은 수많은 선들이다. 이 선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들이다. 다만 은선(隱線)으로 처리돼 있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침범하지 않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확실하게 고정돼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혹은 분위기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신분 사회를 타파했다고 모두 말하고 신분을 구분하는 명시적인 선은 모두 사라진 듯하지만, 그 선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은선으로 남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영화 속에서 기택이 침범한 선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분명히 존재하는 은선이다.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도 여전히 은선으로 남아 그 선을 밟거나 넘으면 곧바로 ‘싸가지’ 타령이 나오고, 직업의 차이에 따른 차별도 은선으로 남아 걸핏하면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요란스러운 갑질이 횡행한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차별적인 은선은 여전히 여자들을 기가 막히게 하는 모양이다.

 

각자가 취해야 할 행동규범이 차라리 매뉴얼에 명확하고 세세하게 규정돼 있다면 편할 텐테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매뉴얼에도 없고 지도에도 안 나와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은선들이 지뢰처럼 널려 있어 참으로 아슬아슬한 사회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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