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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주 유배 생활 ... 세한도 그리고 추사체 완성

 

현대는 빠름의 시대이고 편리함의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현대는 느림의 시대이고 차의 시대이기도 하다. 차의 예절이 곧 차례이니, 이는 차를 조상신에게 올린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때 나는 다도 (茶道) 교사이기도 했다. 한라산 중턱 전망 좋은곳에 위치한 탐라교육원에서 중·고생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차를 다려 마시며 예절을 익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공수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살아있는 분에게는 왼손이 오른손 위로, 돌아가신 이에게는 오른손이 왼손 위로 포개어 예를 표한다.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표정에 아이들은 평소에 보지 못한 친구들의 표정을 훔쳐보며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절을 할 적에도 차를 다릴 적에도 여유로운 마음과 정성을 주문하였다. 바쁜 와중에도 여유로움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산중에 있는 탐라교육원에서만큼은 통하듯 했다.

 

한복을 차려 입고 차를 마시는 아이들은 옛 선비의 길과 풍류도 함께 배우려 했다.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우면서도 의젓하고 정성으로 차를 다리고 상대에게 권하는 표정에서 대견함을 떠올랐다. 당시 학생들과 함께 과거로의 차 여행을 떠나면서 소개한 선비로는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매계 이한우 등이다.

 

금석학·불교학·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학문의 체계를 수립했던 김정희(1786~1856)가, 1840년(헌종 6년) 제주로 유배된다. 유배 8년3개월 동안 추사는 제주에서 세한도를 그리고 추사체를 완성한다.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키운다.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권력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가 제주로 유배 온 까닭은, 윤상도 옥사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혐의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 현의 뒤에는 조선 후기에 있었던 세도정치, 즉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치열한 권력싸움과 갈등이 있었다.

 

추사는 1840년 9월, 중국 사신으로 가기 위해 행장을 꾸리던 중 헌종으로부터 유배명령을 받는다. 추사가 부인에게 제주에서 보낸 첫 편지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큰 바다를 지난 달 27일 하루에 쉽게 건너오니 무비왕령이오나 배 위에 모든 사람들이 멀미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나 혼자 멀미도 하지 않고 배 위에 의젓이 앉아 바람을 맞으며 밥도 잘 먹었소.

 

화북진으로 상륙한 추사는 적거지인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송계순 집으로 걸어야 했다. 이어 추사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위리안치에 처해진다.

 

2년 뒤 송계순의 집에서 인근에 있는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가 옮겨진다.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이라 이름 짓는데, 매화·대나무·연꽃·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 고을의 전유물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최고 학자의 제주 유배는 당시 제주 유림들에게는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더 없는 좋은 기회였다. 연일 제주 곳곳에서 추사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사공, 박계첨, 이시형, 이한우, 강도순 등이 추사의 제자들이다.

 

추사는 이들에게 학문을 전수해 주고 더불어 자신의 학문의 깊이를 더하면서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랬을 게다. 적거지 도처에서 꽃을 피우는 수선화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 준 벗과 같기도 했을 것이고. 모진 눈과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고매한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보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았으리라.

 

‘수선화는 천하의 구경거리요, 동네마다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다라고 편지에 전할만큼 지천으로 피어 추사의 마음을 달래 주었던 제주의 수선화. 다음은 추사의 시이다.’

 

한 점의 겨울 마음이 송이송이 둥글어 /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냉철하고 빼어나구나 /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뜰을 못 벗어나는데 / 해탈한 신선을 맑은 물에서 정말로 보는구나.

 

추사는 절해고도의 풍토병에 시달리며 음식을 먹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유배기간 자기성찰에서 오는 깨달음을 얻으며 제주의 소박한 밥상에 적응해 나갔다. 차와 독서가 그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특히 역관인 이상적은 권력을 읽은 스승에게 중국에서 얻은 책들을 보내주곤 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보냈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 온지 5년째인 1844년에 그린 것이다.

 

‘…날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라고 쓴 서문의 함축미는, 출세지향적인 이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경종이 되는 글귀이다.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 중 하나는, 차를 재배하여 달여 마시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500여 개의 호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중 ‘승설, 고다 노인, 다문’ 등 차와 관련된 호가 많다. 다음은 조선 제일의 차 마니아 추사 김정희가, 벗인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이다.

 

…차 시절은 아직 이른 게요? 아니면 따기 시작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햇차는 몇 근이나 따시었소? 남겨 두었다가 장차 내게 주시겠소? 우전차의 잎은 몇 근이나 따시었소? 언제 보내 주어 차에 대한 나의 욕심을 진정시켜 주시려오?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바란 다오. … 나는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몽동이 30방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료….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추사는 가장 절친한 벗에게 생떼처럼 보이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차를 애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추사는 세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하여 6살에는 입춘첩을 써 붙일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이를 본 박제가는 어린 추사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 역시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 칭송하며 스승을 자처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다도문화 3대 거성으로는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를 든다. 특히 정약용은 조선 초기에 거의 사라졌던 차문화를 부흥시킨 우리 차의 중흥조로 통한다.

 

초의선사(1786-1866)는 다산의 제자이다. 초의선사의 차는 중국 차밖에 몰랐던 양반들에서 큰 충격을 주며, 조선 차를 발전시켰다. 특히 초의의 차를 맛본 추사는 차 예찬론자가 되어, 이를 널리 알렸다. 그러던 중 추사가 윤상도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로 유배 오면서, 그의 다도생활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추사가 유배될 당시인 1840년대에는 제주에서는 차를 구경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는 차가 1900년 이후 재배되었다 한다. 추사가 차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벗인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것뿐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추사를 위해 초의선사를 비롯한 육지의 여러 지인들이 차를 보내왔다. 하지만 제주까지 오는 동안 상하기 일쑤였다. 결국 추사는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셨다. 추사가 만든 차의 이름을 ‘빈랑잎 황차’라 전한다. 녹차와 달리 황차는 소화기능을 좋게 하고 위를 보호하며 장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위장병과 풍토병에 시 달리던 추사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추사가 차를 만들어 마셨다는 빈랑잎은 열대 야자수다. 차 전문가들은 야자수와 흡사한 빈랑잎은 처음에는 딱딱하나, 발효과정을 거치며 진한 찻물이 우러나고 향과 맛이 은은하고 달콤하면서 맑고 깨끗하다 한다.

 

적거지 근처에 위치한 단산의 산세와 유배지에서의 고독과 고통은 이전 추사의 글씨체마저 바꿔놓았다. 추사의 글씨는 여러번 변했는데 제주에서의 유배시절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다. 그의 글씨는 본래 중국 고대의 비문 글씨와 옹방강의 글씨를 닮아 지나치 게 기름졌으나, 유배 후에는 특정 글씨에 구속됨이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한다.

 

적거지 인근에 있는 대정향교를 찾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도 했던 추사. 마천십연(磨穿十硏) 즉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매진했던 추사. 18세기 이후 제주의 문화·예술·교육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추사는, 1849년 1월 유배 8년 3개월 만에 유배가 풀려 제주섬을 떠났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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