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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모택동(毛澤東)이 세상과 하직할 때 등소평(鄧小平)은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활동공간이 자신의 집으로 한정돼 있었다. 대문을 벗어날 수 없는 자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친히 중공중앙에 설치된 조문식장에 가 자신이 존경하였던 위대한 영도자이며 지도자에게 무한한 슬픔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집안에 모택동을 애도하는 빈소를 마련하였다. 조화를 헌상하면서 모택동에 대한 자신의 참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시종일관 존경의 태도를 보였다.

 

비록 모택동과 등소평 사이에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가 사이에 항상 존재해왔던 현상이 아닌가. 등소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택동을 위대한 영도자요 지도자로 보았다.

 

 

1980년 10월 25일, 등소평은 『건국 이래 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초안을 작성하고, 중앙 책임자들과 담화하면서 모택동의 공과와 모택동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적절(?)하면서도 깊이 있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등소평이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얘기했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등소평의 관점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

 

모택동 동지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모택동 사상에 대해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써야 할지 무척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나는 경위국(警衛局)의 동지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들의 얘기는 이렇다.

 

나를 찾아오기 며칠 전에 이탈이아 기자 팔라치(Fallaci)와 대담한 내용을 전사들에게 낭독하고 토론하였다. 간부, 전사들 모두 이렇게 하면 좋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

 

모택동 사상을 얘기하지 않으면서 모택동의 공과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노동자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토지개혁 때의 하층 농민들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연관된 간부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모택동 사상이라는 기치는 버릴 수 없다. 그 기치를 버리면 우리 공산당의 찬란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총체적으로 말해 우리 공산당의 역사는 빛나는 역사다. 비록 우리 공산당의 역사에 있어, 건국 이후의 30년을 포함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심지어 ‘문화대혁명’과 같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우리 공산당은 어쨌든 혁명을 성공시켰다. 세계에서 중국의 지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대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세계 속에 일어섰고 터전을 잡았다.

 

역시 모택동 동지의 “중국 인민이여 여기에서 우뚝 서라”는 그 말처럼. 국내의 인민이나 국외의 화교나, 이 점을 긍정적으로 감득할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없었다면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제도를 건립할 수 없었다.

 

현재 우리 국가는 여전히 옛 중국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중국공산당 영도, 모택동 영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를 우리의 많은 청년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택동에 대한 평가, 모택동 사상에 대한 명확한 논술은 모택동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공산당, 우리 국가의 모든 역사와 떼놓을 수 없다. 전반적인 국면을 봐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결의 초안을 만들 때 반복해서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의 원고 중 모택동 사상을 자세히 논술하는 부분은 없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것은 그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 문제, 국제 국내의 커다란 정치 문제다. 만약 이 부분을 쓰지 않거나 잘못 쓰면, 모든 결의는 하지 않음만 못하다. 물론, 어떻게 써야 좋을지는 모두의 의견에 대하여 진지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어떻게 쓰던 간에 모택동의 공로, 모택동 사상의 내용, 모택동 사상이 우리의 현재와 이후 사업에 대한 지도적 작용에 대하여 명확하게 써야 한다. 우리는 삼중전회 이후 모택동의 그런 정확한 것을 회복하였지 않은가. 정확하게 전체적으로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고 운용하지 않았는가.

 

기본점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현재의 우리 역시 모택동이 일찍이 제시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을 하여야한다. 그가 반대한 잘못을 고쳐야 한다. 그가 하지 못한 일을 계속적으로 해내야한다. 이후 상당한 기간 내에 그 일들을 이룩하여야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발전하여야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한다.

 

모택동사상은 공산당의 지도 사상이라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공산당은 모택동사상을 가지고 온전히 한 세대를 교육하면서 혁명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분명 커다란 잘못이다. 그러나 우리 공산당은 그래도 임표(林彪), ‘사인방(四人幇)’이라는 두 반혁명 집단을 쳐부수고 ‘문화대혁명’을 끝내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이러한 일은 역시 모택동사상이 교육한 제1세대 사람들이 이룬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린 것을 말하고 있다. 바로 임표, ‘사인방’이 파괴한 난국을 바로잡고 모택동이 만년에 저지른 잘못을 비판해, 모택동사상의 정확한 궤도 위로 되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모택동사상을 쓰지 않거나 견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에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된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많은 문제를 모택동 개인의 자질로 귀결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개인 자질을 가지고 적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인품이 좋은 사람도 어떤 상황에서는 오류를 피하기 어렵지 않던가. 홍군(紅軍)시기 중앙 혁명 근거지에서 ‘AB단(團)’을 진압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AB단’을 진압한 사람의 자질이 모두 나쁘다는 말인가? ‘AB단’ 진압을 시작할 때 모택동도 참가했었다. 단지 모택동은 다른 사람들보다 문제가 있음을 일찍 알아차렸다.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연안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도 죽이지 않도록 대부분은 붙잡지 않도록” 제시하였다. 지극히 불안한 전쟁이라는 환경에서 내부에 나쁜 자가 발견되면 경계심을 제고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화를 내고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하면, 한 사람의 자백을 듣고 믿어버리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객관적으로 얘기해서 당시 환경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주관적으로 말해서 경험이 없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 중 모든 노간부들을 정리하고 타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하룡(賀龍), 임표(林彪)는 시작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정리하려고 했지만 모택동은 어느 정도 보호하려고 했었다. 비록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정리할 생각을 품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혁명의 정풍의 바람이 거세지고 손쓸 수준이 넘어서버렸다.

 

모택동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한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도 없다. 어떤 부류는 임표, 사인방이 이룬 세계가 기정사실화 됐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등에 업고 움직이기도 하였다. 어떻든 간에, 많은 간부들이 타도된 것은 모택동이 만년에 저지른 최대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택동은 만년에 사상이 그렇게 일관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말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면서 말하길 30%의 잘못이 있고 70%의 성과가 있는데 30%의 잘못이 있으면 바로 “타도일체(打倒一切), 전면내전(全面內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여덟 자와 70%의 성공을 어떻게 연계시킬 수 있겠는가?

 

모택동의 잘못을 포함한 발생하였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어떤 모호함도 없이 비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필히 실사구시 하여야한다. 여러 가지의 상황을 분석하여야한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자질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모택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 공산당의 영수였다. 모택동의 잘못에 대하여 과도하게 써서는 안 된다. 과도하게 써서 모택동에게 먹칠한다면 우리 공산당, 우리 국가에 먹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역사 사실을 위반하는 것이다.

 

 

위에 글은 등소평의 “모택동 동지의 역사적 지위와 모택동 사상”의 일부분이다. 중국 혁명과 사회주의건설 중 모택동의 역사적 위치에 대하여, 중국 혁명과 중국 사회주의건설 중 모택동사상이 중요한 지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전후를 아무리 살펴도 “모택동이 없으면 중국공산당도 없고 중화인민공화국도 없다”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등소평이 모택동에 대한 평가가 이렇다. 개혁개방을 이끌고 새로운 중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던 등소평이 내린 평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이전의 오류를 바로잡지 못한 채 이제까지 공산당 중심 국가로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환경은 바뀌었지만 역사의 주류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끝>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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