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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인들은 주은래(周恩來)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주은래(1898~1976),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전문가, 외교가, 당과 국가 주요 영도자 중 한 명, 중국인민해방군 주요 창건인 중 한 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원 원훈, 모택동(毛澤東)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의 제1대 중앙 영도 집단의 중요한 성원이다.

 

신중국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은 반세기 동안 ‘신성(神聖)’이 있었다고, 신(神)은 모택동(毛澤東)이요 성(聖)은 주은래(周恩來)라고. 그래 좋다, 모택동은 신단(神壇)을 세우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였던 것은 인정하자. 그럼, 주은래는? 성단(聖壇)을 만들려고 했거나 만들 수 있었을까?

 

‘단(壇)’을 만들어 그 둘을 초청한다면 인간세계로 내려와야 할 것인데. 그들의 위대함, 고명함, 영명함은 바라볼 뿐 결코 가까이 할 수는 없으리라. 그 둘은 살아있을 때 인민들과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죽어서는 민중과 융화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인민들이 예배하고 숭배하는 우상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중국 오천년 문명사에서 ‘선양(禪讓)’은 가장 찬미를 받는 대공무사의 성인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선양을 한 사람이 몇일까? 그래서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주은래를 연상하면서 확실하게 혹은 함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주은래는 제1인자(원수)가 되려 하지 않았고 2인자(후계자)도 되려 하지 않았으며 달게 3인자가 되었다. 이것은 위대한 겸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실례를 든다. 예를 들어 준의회의(遵義會議)같은 것이다. 20세기 20년대에서 30년대 초, 주은래는 공산당 내의 명망과 직무가 모택동보다 높았다. 주은래는 양쪽 사이에서 한쪽으로 조금만 치우쳐도 세력의 균형이 깨질 정도의 자신의 지위와 명망을 이용해 모택동을 지지하였다. 그렇게 주은래는 홍군(紅軍)과 당 중앙에서 모택동의 영도적 지위를 확립시켰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의 조수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그런 겸양의 정신은 일생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주은래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 봐야 할까? 물론 주은래가 겸손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의 태도를 봐도 그렇다. 주은래는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길 좋아하였다. 민주적 풍격도 있었다. 군중의 의견을 즐겨 들었다. 그는 자아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주은래가 1인자가 되려 하지도 않았고 2인자가 되려 하지 않았던 풍격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겸손”이라고 평가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명철보신(明哲保身), 용기부족”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심지어 ‘소흥문화(紹興文化)’의 영향이라 귀결할 수도 있다. 소흥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과거도 보지 않았고 현령도 되지 않았으며 그저 사야(師爺, 막료〔幕僚〕)만 되어서 중국의 “소흥이 없으면 아문(衙門)을 이루지 못한다”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사야’를 사야라 부르지 않고 ‘소흥 사야’라고 불렀다. 주은래의 조부, 외조부 모두 사야 출신이다. 그들의 처세 철학이 주은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주은래는 1인자도 아니었고 2인자도 아닌 ‘재상’의 위치에서 공손하고 신중하며 온힘을 다하여 27년을 모택동 곁에 있었다. 홍군 전쟁 시기까지 소급해보더라도, 그때부터 주은래는 주로 보좌의 위치에 내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君師)’라 비유한다. 실제 ‘총참모장’이었다. 이것이 어찌 위대한 겸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아는 능력이며 사람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

 

주은래는 현명하게 “나는 통솔력을 갖춘 인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명하다는 것이 명철보신은 결코 아니다 ; 현명하지 않은 것은 필부의 용기일 따름이다. 필부의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경솔함이며 어리석음이다. 위대한 용기, 용감함은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실사구시다.

 

왕명(王明), 장국도(張國燾)는 통솔할 능력을 가진 인재도 아니면서 우두머리가 되려고 하였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한 명은 소련으로 달아나 남에게 얹혀살았고 ; 또 한 명은 국민당에 투항해 늘 남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지 않았던가. 이를 어찌 용기라 할 것이며 영웅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주은래는 통솔력을 갖춘 인재가 아니었다.

 

모택동이 전 공산당 전국인민을 이끌고 개천벽지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의 능력을 잘 파악해 적재적소에 썼다는 데에 있다. 신중국이 건립되고 나서 중국 권력의 정점에 있던 영수들를 당시 중국 국민은 간략하게 “모류주주진림등(毛劉周朱陳林鄧)”으로 줄여 간단히 불렀다. 무슨 말인가? 중앙위원회 주석 모택동,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 국무원 총리 주은래,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덕(朱德), 중앙위원회 부주석 진운(陳雲), 중앙위원회 부주석 임표(林彪), 국무원 부총리 등소평(鄧小平)을 가리킨다.

 

모택동은 자신의 전우이면서 동지들을 어떻게 대했고 평가했을까? 신중국이 성립되고 3년의 대재난을 당했던 시기에, 모택동은 진운을 생각하며 “국가가 어려울 때 훌륭한 장수가 생각나고 가정이 빈곤할 때 현처를 그리워한다”고 말하면서 조조(曹操)가 적벽대전에서 패하자 곽가(郭嘉)를 그리워했던 고사를 이야기했다. 모택동이 임표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 줄 때 “귀신을 잡으려면 종규(鐘馗)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의 권력을 빌어 적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문화대혁명 때 임표가 모택동 대신 악역을 맡지 않았는가. 그리고 죽임을 당했고. 그밖에 모택동은 모스코바 방문 때 4명의 전우들에 대하여 평가한 적이 있다.

 

 

그때가 1957년 11월이었다. 모택동은 모스코바에서 세계 공산당대표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국가 공산당과 공인당 대표회의였다. 이 회의의 주요 활동은 회의 전에 양자간, 다자간 접촉하면서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주로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이 담판을 벌여야했다. 협의가 되어야 대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흐루쇼프(Khrushchev)가 네 번째로 모택동을 찾아와 식사하고 있을 때였다. 식탁에서의 얘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식당을 벗어나 응접실로 나왔을 때 모택동은 화제를 돌렸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제쳐놓고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국가주석의 직을 사임할 준비를 마쳤소.” 모택동은 흐루쇼프를 보면서 말했다. 말투에 위엄이 있었다.

 

흐루쇼프는 이외라 생각하지 않았다. 1954년에도 모택동은 국가주석을 맡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은 여러 국가의 원수를 접대하고 환송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각국 대사의 외교문서를 받는 것과 같은 국가 활동을 싫어하였다. 반년 전에 보로실로프(Voroshilov)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모택동은 재차 국가주석 자리를 사직할 결심을 표명했었다. 보로실로프가 귀국 후 보고하였을 것은 자명하고.

 

“누가 인계받지요?” 흐루쇼프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있지요. 우리 당내의 몇 명의 동지들은 모두 다 나 못지않지요. 완전한 조건을 갖추었지요.” 모택동이 종합적으로 평가를 내린 후 손가락을 접으면서 가보를 세듯이 말했다. “첫째는 유소기. 그는 북경과 보정(保定)에서 5.4운동에 참가했었죠. 나중에 우리에게 와서 학습하고. 1921년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능력은 물론 경험이나 명망 모두 완벽한 조건이지요. 그의 장점은 정치적으로 확고부동하고 원칙을 지키는데 강하지요. 약점이라면 융통성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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