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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모택동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그저 팽덕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새로운 업무를 주고 “명예를 회복시키고” 동산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어쩌면 팽덕회가 여산회의에서 잘못된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하여 그저 핑계의 입바른 말일 따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자신의 입으로 기본적이나마 누명을 벗겨주는 말이었다. 팽덕회의 무죄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에 대한 일, 보기에 과한 비판이었소. 잘못된 거지요. 몇 년 지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분명 모택동이 초보적이나마 팽덕회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모택동의 그런 고심은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화대혁명’도 어쩌면 최소의 소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은 누구도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택동조차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풍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모택동이 팽덕회를 서남삼선으로 보내어 보호하려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팽덕회의 불행한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마귀의 손아귀는 풍우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지역까지 뻗혀나갔다. 오래지 않아 ‘문화대혁명’이 어느 단계에 이르자 팽덕회는 여러 형태의 공격과 비판을 받게 된다.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는 요문원의 「평신편역사극評新編歷史劇 『해서파관海瑞罷官』」를 게재하면서 암암리에 팽덕회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1966년 중순, 서남삼선의 건위(建委) 간부들은 국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팽덕회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팽덕회를 “늙은 우경분자, 일관되게 모 주석을 반대하고 당을 반대하면서 서남으로 온 후에도 죽어도 회개하려 않았다”고 공격하였다.

 

더욱 비참한 것은 모택동이 중요한 시점에서 팽덕회를 서남으로 보낸 처음의 뜻(初志)를 바꿔버렸다는 점이다. 팽덕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발표한다. 진백달(陳伯達)과 면담하면서 처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였다.

 

“요문원의 글이 참 좋아. 이름을 거명해 희극계, 사학계, 철학계를 진동시켰어. 그런데 급소를 때리지는 못했어. 핵심 문제는 ‘파관(罷官)’이야. 가정(嘉靖) 황제가 해서(海瑞)를 파면했잖아. 1959년 우리도 팽덕회를 파면하였고. 팽덕회도 ‘해서’지.”

 

나중에 또 임표(林彪)와 강청(江靑) 무리의 현혹 아래 1966년 10월 24일 중앙보고회에서 팽덕회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고강(高崗), 요뢰석(饒瀨石), 팽덕회는 양면 수법을 동원하는데 팽덕회는 그들과 결탁하였다. ……팽덕회가 발동한 ‘백단대전(百團大戰)’〔1940년 8월 20일부터 1941년 1월 24일까지 하북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공산당의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 육군 사이의 전투. 팔로군이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서 광산, 수송 통로를 기습 공격했으며 120사단, 129사단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전투는 100개 연대가 참여했기에 백단대전이라고 부른다〕은 ‘독립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어. 미리 알리지도 않았지.”

 

모택동은 당시 공산당 내에서나 전국 인민들의 마음속에서나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말은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이는 갓 빛을 발하기 시작한 팽덕회의 서광을 끝도 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이로써 팽덕회는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광명을 찾을 희망이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위인’이라 함은 위대한 인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생각 하나의 잘못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위인은 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온 힘을 다하여 일을 진행했다손 생각 이외의 신기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음이니.

 

팽덕회의 운명은 여산회의(廬山會議)에서 갈렸다고도 할 수 있다.

 

팽덕회는 1955년에 군에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 고아로 자란 농민의 아들로 혁명전선에 뛰어들었던 노혁명가의 마지막에 얻은 영예였다. 그러나 1959년 7월에서 8월에 걸쳐 열린 여산회의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모택동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끝났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고향인 호남성 농촌을 시찰한 팽덕회는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에 따른 경제 피폐를 목격한다.

 

그리고 여산회의 기간 중에 모택동에게 서신 형식으로 그 정책의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하였다. 그 서신에서는 모택동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모택동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모택동은 그 자료에 비판을 추가해 회의 참가자에게 토론 의제로 채택하게 하였다.

 

그런 모택동의 배반적인 행동에 팽덕회도 회의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결국 팽덕회는 국방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해임된다. 이 해임은 후임 국방부장이 된 임표의 지위를 높여 문화대혁명의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해서파관海瑞罷官』이란, 명나라 청백리 “해서(海瑞)의 정신을 배우자”는 마오쩌둥의 요청에 호응하고 당시의 경극 배우 마연량(馬連良)의 권유로 역사학자이자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吳晗)이 창작한 신편 역사극이다. 베이징 경극단에서 처음 공연돼 각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해서파관』의 주요 갈등은 해서와 관료지주 집단의 상징인 서계(徐階)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두 사람은 서계의 아들 서영(徐瑛)의 처벌과 빼앗은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한다. 이 작품은 어떤 외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해서의 강직하고 청렴한 성격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당초 그저 하나의 공연에 불과하였던 『해서파관』이 문제 작품이 된 이유는 작품 자체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과도한 해석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강청(江靑)의 사주로 요문원(姚文元)이 작성한 「평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이 1965년 전국 일간지에 게재되면서 이 작품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파직한 황제를 모택동으로, 무고하게 파면된 주인공 해서를 팽덕회로 바꾸어볼 수 있는 풍자적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간주되면서 비판 대상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서파관』은 모택동의 사전 승낙 하에 집필된 것이었지만, 모택동도 결국엔 이 작품을 은연중에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만다. 작품에 대한 평론을 빌미로 오함과 그의 주변 인물에 대한 정치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강청 무리들의 의도에 말려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잘못은 모택동 자신에게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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