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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학자의 서술을 원용하면 팽덕회(彭德懷, 1898.10~1974.11)는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이다. 덕망이 높은 무산계급혁명가요 군사전문가이며 정치가이다. 중국 개국 원훈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팽덕회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모택동 만년의 성격은 호둣속 같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200년 인생을 자신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과거 행동에 대해서도 회의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1959년 여산회의와 그 이후 자신이 팽덕회에게 한 행위가 과했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요문원(姚文元) 등이 시작한 오함(吳晗) 등을 비판하는 운동이 결국은 팽덕회를 총알받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해 진솔하면서도 자신과 수년을 생사고락을 함께하였던 전우를 보호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택동은 팽덕회를 서남삼선(西南三線,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3개성 전역이나 대부분, 호남〔湖南〕 서부, 호북〔湖北〕 서부) 업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예측하지 못할 군중의 핍박을 피하도록 안배한 것이라 좋은 평가를 내리는 부류도 있다. 과연 그럴까?

 

1965년 9월 어느 날, 중공 중앙 정치국 상위를 맡고 있던 팽진(彭眞)은 인민대회당에서 팽덕회를 만난 자리에서 모택동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성도(成都)로 가서 서남삼선 사업을 담당해 완수하라는 말을 전했다. 팽덕회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팽진에게 하면서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결연히 모택동의 호의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후, 팽덕회는 며칠 동안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였다. 마음속으로 깊은 갈등에 빠져 있었다. 팽덕회는 당시 중국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해 전쟁이 심화되고 있고 소련은 북방 변경지역에 군대를 집결하고 있었으며, 인도 접경지역에서 충돌이 생겼고 대만도 대륙회복을 이야기하며 공격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물론 ‘삼선(三線)공작’(중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실행하는 경제 사업)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였다. 자신이 서북삼선으로 가면 만년에 다시 공을 새워서 자신에게 씌워진 죄명을 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면 망설여지기도 하였다. 군사전문가인 자신이 해보지 않은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산회의 이후 국방부장 직에서 쫓겨났고 지금까지도 “조국을 배반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 않는가. 역겹다고 비판을 받는 사람이 업무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잖은가. 이런 생각이 들자, 팽덕회는 외지의 국영농장으로 내려가 남은 인생을 농민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편지로 써서 모택동에게 보냈다.

 

 

팽덕회가 모택동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전체적인 국면과 개인의 능력,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 결정한 진심이었다. 일시적 충동이나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모택동을 만난 후 억누르기조차 힘든 기쁨을 느꼈다는 것에서 증명된다.

 

모택동은 팽진의 보고를 듣고 나서 얼마 후 팽덕회의 편지를 받는다. 9월 23일 아침, 친히 팽덕회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전했다. 팽덕회는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아 모택동을 만나러 중남해(中南海) 이년당(颐年堂)으로 갔다.

 

중남해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않게 모택동이 이년당 밖에서 직접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팽덕회는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였다. 급히 달려가 모택동의 손을 잡았다. 오래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니 정이 더 깊어졌다는 듯이.

 

모택동이 익살스레 말을 건넸다. “이 사람아, 평상시에는 오지도 않더니. 편지 안 쓰면 안 썼지, 쓰더니만 몇 만 자나 써서 보내고.” 한 마디 말로 그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긴장의 분위기는 일시에 씻은 듯 없어졌다. 둘은 마음을 터놓고 박장대소하였다. 서로의 손을 잡고 이년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택동과 팽덕회는 새벽부터 오후 3시반 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긴 편지를 읽고 둘 사이에 깊은 오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팽덕회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 사이, 모택동이 꺼낸 말 중에 팽덕회에 대한 중요한 관점이 노출된다. 특별히 몇 마디를 소개한다.

 

삼선(三線)건설의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 모택동은 말했다.

 

“당신이 서남으로 가는 게 최상이오. 나중에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치르게 되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게 아니오. 우리 몇 십 년을 같이 일해 왔잖소. 여산에서 한 번 헤어졌다고 영원히 헤어진 것은 아니잖소. 우린 지금 70살이 넘었소. 응당히 후대를 염두에 두어야 하잖소. 여산회의는 이미 과거요, 지난 역사요. 지금 보니 어쩌면 당신이 옳았던 것도 같고.”

 

팽덕회는 “나는 이미 역겨운 인물이 되어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삼선건설 참여를 거절하자 모택동이 말했다.

 

“진짜 역겹게 됐다고 해도 향기를 피울 수 있소. 당신에 대한 일, 보기에 과한 비판이었소. 잘못된 거지요. 몇 년 지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난 결코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지내보아야 아는 것. 우리 다시 앞을 향하여 나갑시다! 당신을 서남으로 보내자는 것은 당의 결정이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직접 얘기하라 할 거요. 내가 과거 팽덕회 당신을 반대한 것도 진취적인 입장에서였소. 지금 내가 당신을 지지하오, 모두 성심성의에 의한 것이오. 당신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고 생각한 결과요. 내 자신도 응당히 그렇게 하여야 하고. 어찌 사람이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여야 한다는 말이요? 당신은 군대에서 오랫동안 지냈소. 경험이 많소. 삼선건설은 군사 방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소. 서남삼선으로 당신을 보내어 부지휘관에 임명할 거요. 아무런 숨김도 없소. 당신이 살피러 가고자 하는 곳이 있으면 마음대로 보러 가면 되오.”

 

마지막으로 재차 팽덕회에게 서남삼선으로 가라고 권하면서 모택동은 말했다. “서남으로 가소! 유소기와 등소평이 서남구의 관련 동지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할 거요. 상황을 확실하게 정리해 줄 거요. 만약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직접 와서 얘기하도록 할 거요. 내 당신께 몇 마디 부탁하려 하오 : 과거의 잘못은 묻지 말라, 의견을 보류하라, 열심히 일하라, 성과를 내라. 필요할 때랑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시라.”

 

회담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당부한다. 회의를 개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공고문을 발표해 팽덕회 동지가 유관 방면의 동지들과 만나게 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업무환경을 만들어주라는 내용이었다.

 

모택동이 어떤 예감이 들었던지 재차 정중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확실하게 밝히고, 만약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나를 찾아와 얘기하라 하시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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