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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5)...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다섯째 황자 윤기(胤祺)는 심성이 선량하고 사람됨이 온후해 강희가 무척 좋아해 항(恒)친왕에 봉했다. 이는 강희가 그에게 봉한 왕이 영원히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황태후가 부양했다. 황태후가 병환이 위급하자 그는 요리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자청했지만 강희는 허락하지 않고 윤지(胤祉)와 옹정(雍正) 등에게 일을 맡도록 명했다. 이는 윤기가 능력이 없어 중용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황태자의 지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경쟁을 하지도 않았고 결당하지도 않았다.

 

다른 황자 윤도(胤祹)는 48년(1709)에 버일러에 봉해졌다.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받지 못했다. 이후 강희가 출행할 때 자주 시종을 했기 때문에 윤도도 강희 심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강희도 그를 재능이 있는 아들로 보았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강희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대상은 두 명밖에 남지 않는다. 넷째 황자 윤진(胤禛)과 열넷째 황자 윤제(胤禵)다. 군사 방면에 강희는 일찍이 열넷째 윤제를 대대적으로 기용한 적이 있다.

 

강희 57년(1718), 강희는 파격적으로 버이저(beise, 패자(貝子), 버일러(Beile,貝勒)의 아래 관작) 윤제를 무원(撫遠)대장군에 임명하고 정황기독(正黃旗纛)을 이용하도록 해 친왕제제를 구축하고 대장군왕(大將軍王)이라 칭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서정(西征)했다.

 

출병 행사도 대단히 성대하게 치렀다. 강희가 친히 청해(靑海) 오이라트(Oirats, Ūlet, 액로특(厄魯特)) 각 부에 “대장군은 내 황자다. 분명 훌륭한 장수라 대군을 이끌고 간다. 군대를 통솔할 재능을 갖추었기에 생사를 관장할 중임을 맡겼노라. 그대들은 군무나 크고 작은 사항 모두 대장군왕의 지시를 받들어 따르라. ……나를 대면한 것과 다름이 없이 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강희는 그의 단순하고 정직하며 갖춰진 능력을 높이 사 키우고자 하는 뜻은 분명 있었다. 물론 황태자로 선택하려는 의도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어렸다. 그리고 윤사(胤禩) 그룹이 황태자 지위를 찬위하려는 모의에 참여한 전력도 있었다. 이런 일들이 강희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임은 하지만 강희가 고려하는 황자 중 하나였을 뿐 결코 이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처럼 모든 아들 중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사람됨이 신중하고 노련하여 강희가 비교적 만족했던 인물은 바로 넷째 황자 윤진(胤禛)이었다. 강희가 태자를 선택하려는 원칙을 가지고 넷째 윤진 즉 옹정(雍正)을 분석해보니 황태자 자리를 노리며 결당하지 않았다.

 

부자 사이도 강희는 만족했다. 옹정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우러러 섬기는 마음이 있었고 정성스러우면서도 신중한, 효도를 아는 아들이었다. 이 점이 강희가 태자를 선택하는 조건에 딱 맞았다. 강희 마음속의 옹정은 참을성이 있는 효순한 아들이었다. 분명 황태자의 후보자로 삼을만했다. 그렇다면 ‘다크호스’ 넷째 황자 윤진의 성공 비결을 한 번 찾아보자.

 

첫째, 강희를 만족시킨 것은 옹정의 일처리 능력이다. 옹정의 일처리 특징은 성실함과 책임감에 있었다. 일이 크던 작던 강희가 맡긴 것은 신중하고 진지하게 처리해 완벽하게 마무리 했다.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엄숙하게 법을 집행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상벌이 엄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을 위반하고 매직하는 자는 사정을 두지 않고 들추어내 처벌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법과 기율을 바로잡고 관리의 품행과 치적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만들어 행정 효율을 제고시키려 했다. 이 점에서 옹정과 윤사 두 인물의 태도와 정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사는 총명한 옹정에 미치지 못했다. 옹정은 재덕을 겸비했고 인자함과 엄함을 함께해 다스리려 했으며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윤사는 인의를 강령으로 했으나 인의를 강조하는 것은 대부분 현상을 유지하는데 국한됐고 진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옹정은 윤사와는 정반대였다. 인자함과 엄함을 함께하여 실행했지만 실질은 고질적인 습관을 정리해 활기를 찾는데 있었다. 그만큼 미래지향적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황태자 자리 다툼에 있어 다른 파벌의 황자들 중 다른 정치적 강령이 존재했다. 이는 황태자 투쟁이 정치 투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말을 원점으로 다시 돌려 이야기하면, 옹정의 강온 정책은 자신만의 특색이 있어 유위한 관료들에게는 격려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관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 점이 대중의 바람을 주의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둘째, 옹정의 정치 강령은 강희와 일부 관료들의 지지를 받았을 수 있었다. 강희 만년에 쌓인 폐단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 졌다. 국가는 준엄한 정책을 실행할 것을 주장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하여 국면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황실과 정부, 사회 각 방면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강희는 만년에 자각했을 수 있다. 퇴락한 국면을 전환시킬 재능을 가진 인물이 옹정밖에 없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사실 강희는 관용 정책을 실행했던 황제다. 그렇다면 관용을 주장하는 인물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이치상 맞다. 그러나 윤잉을 폐위시킨 후 인의를 주장하는 윤사도 택하지 않은 까닭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 상황에 맞는 황태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옹정은 건륭(乾隆)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줬다. 건륭은 즉위하자마자 공정과 인정을 아울러 행하는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선포했다. 조부의 깃발을 내걸면서 부친의 강력한 정책을 수정했다. 이 또한 정치 형세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옹정의 강력한 정책을 실행한 이후 관용의 정책을 펼쳐야만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옹정도 아들의 사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승계자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옹정의 정치적 안목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용을 주장했던 강희가 만년에 강력한 정책을 주장한 옹정을 선택한 것도 그가 명철한 정치가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옹정은 인간관계를 맺는 책략을 명석하게 구사했다. 영명한 강희에게 옹정이 우둔하게 보였다면 눈에 들지 못해 한쪽에 방치됐을 것이다. 만약 똑똑하다는 것을 너무 드러내면 야심이 많다고 생각해 타격을 입었을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자신이 황태자 자리에서 멀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재능을 발휘하면서도 부황(父皇)을 두렵게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하면서 윤사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여러 형제들에게도 포악했던 윤사를 거울로 삼아 우호적으로 대했다. 재능을 가진 형제들에게 질투를 유발시키지도 않았고 재능이 없는 형제들은 의지처로 삼게 만들었다.

 

옹정은 부자, 형제, 조정의 관리, 속국 등 여러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 비범한 책략을 구사하면서 여러 방면의 호감과 지지를 얻어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여러 관리들과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좋은 관계를 맺었다. 권신, 조관, 시위, 한인(漢人) 누구를 막론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여론을 좋게 만들어 황제에게 영향을 미치게 했다.

 

사실 옹정이 결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결당이 늦었고 활동도 미미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을 뿐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면작전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강희 면전에서는 기분을 맞춰 주면서 효심과 우애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쉽사리 노출시키지 않았다.

 

강희는 옹정이 성년이 된 후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의 결당에 대해 경계심을 갖기는 했으나 그가 윤사의 당에 참여했다고 의심하였을 뿐, 그 스스로 조그마한 단체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마침내 마음을 놓고 정권을 그에게 넘겨줬다.

 

옹정의 청정 담백한 외모와 형제들과 우애를 나누는 태도는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윤잉에 대해 이익을 갖도록 함으로써 윤잉조차도 그가 의리를 중시한다고 여기게 만든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가 윤사의 병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을 보면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는 심리를 갖췄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상대의 눈을 속였다. 목적은? 강희 앞에서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나쁜 사회 여론을 형성하지 못하게 만들어, 여유롭게 황제의 자리에 앉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 사람들을 마비시킨 후 침착하게 정치 활동을 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옹정의 결당은 늦었고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중용한 시점에서 큰 힘이 됐다. 고명대신 롱코도는 무력으로 그의 등극을 보호하고 도성의 치안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면서 옹정이 순조롭게 중앙정부를 접수하도록 만들었다. 윤제(胤禵)가 통솔하는 서북(西北) 원정군은 지방에서 사변을 일으킬 유일한 힘이었다.

 

그러나 천섬(川陝 : 사천, 섬서)총독 연갱요(年羹堯)의 방어에 막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지방에서도 어떤 소요도 발생하지 않았다. 옹정이 순조롭게 즉위하면서 사람들의 걱정도 일소했다. 조선(朝鮮) 사람들의 재난과 변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도 틀렸음이 확인됐다. 옹정 그룹은 중요한 보호막이 됐던 것이다.

 

사서 기록을 보면 기타 황자들 보다 강희와 옹정 사이의 감정은 비교적 친밀했다. 『청성조실록』 기록을 보면 46년 11월 옹정은 부친을 자신의 거처에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다음에 윤지(胤祉)도 부친을 모셨다. 『실록』의 통계 자료를 보면 강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옹정의 원명원(圓明園)과 열하사자원(熱河獅子苑)에 11차례나 임행했고 61년에는 3차례나 됐다. 그중 한 번은 여러 황자들의 공동 초청이었지만 원명원을 빌렸다. 이렇게 보면 옹정의 거처가 강희가 즐겨 찾는 장소였음이 확실하다.

 

강희가 옹정이란 왕작(王爵)으로 하사한 ‘옹(雍)친왕’ 중의 ‘옹(雍)’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돼 있지만 대반은 화목(和睦)의 의미로 쓴 것으로 그들 부자 관계가 좋았음을 나타낸다. 물론 조그마한 응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쉽게 해결됐다. 서로의 감정은 친밀한 방향으로 발전해 강희의 만년에 더욱 깊어졌다. 61년 건륭(乾隆)이 강희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 후에는 더더욱 친밀해졌다.

 

건륭은 강희 50년에 태어났다. 옹정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 위 3명의 형들은 어릴 적에 죽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둘째였다. 강희 61년 3월에 옹정은 원명원에서 강희를 모시고 연회를 베풀었다. 건륭이 경전을 남 못지않게 숙달했다고 판단하고 조부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강희는 건륭을 보자 무척 기뻐하며 창춘원(暢春園) 담녕당(澹寧堂)에 거주하도록 하사했다. 여름에는 궁으로 데리고 가 무양하다가 열하까지 데리고 가 피서산장(避暑山莊)에 거주하기도 했다.

 

강희는 사자원에 임행할 때 건륭을 데리고 집으로 가 건륭의 생모를 만나기도 했다. 건륭은 만년에 그 일을 추억하며 강희가 자신의 생모를 만났을 때 끊임없이 “복 많은 사람”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모친이 복이 많은 상이니 그녀의 아들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강희는 황위를 옹정에게 전해주고 나중에 건륭으로 하여금 승계토록 한다는 뜻이다. 옹정과 건륭 부자는 강희가 건륭을 사랑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는 강희가 확실히 옹정에게 황위를 물려줬다는 말이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넷째 황자 윤진(胤禛)은 기타 황자들처럼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지만 실력과 부황 마음속의 인상으로 얘기하자면 황위를 계승할 자격을 가장 잘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정말 강희 황제의 분명한 의지였는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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