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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남의 밭을 빌려 농사지을 수 있던 시절 이야기

 

1930년대 일본은 소화(昭和) 대공황으로 경제 전반이 송두리 째 휘청거리고 있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 역시 ‘블랙 먼데이’를 시작으로 경제 대공황(大恐慌)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제주도의 어느 한 마을에서는 멸치 풍년으로 인해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는 기사(記事)가 있다.

 

경제공황으로 방방곡곡에서 별별 참극이 연출되는 이때에 구좌면 월정리(舊左面 月汀里)에는 멸치(鰯)이 풍산(豐産)으로 외지로부터 약 삼만원의 돈이 드러와서 전무후무한 호경긔를 이루m다고 한다(동아일보, 1932년 11월 11일).

 

예전부터 멸치어업은 제주지역 수산업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19세기 이전 제주에서는 연안에 석제(石堤, 원담)을 쌓아 밀물 때 바닷물과 함께 들어왔다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원담 안에 남아 있던 멸치를 당망(攩網)으로 건져 올리는 방식으로 멸치를 어획했다. 원담은 고기가 올라 올만한 곳에 높이 5~6척(尺), 너비 2~3척(尺), 직경(直徑) 1척(尺) 가량의 돌을 올려 쌓아 담으로 둘러싼 것이다. 원담 안에 멸치가 들었을 때 마을 남녀노소 모두 구물을 어깨에 지고 원담 안에 들어가 직경 1장(丈)2척(尺), 깊이 5~6척(尺), 자루길이 2장(丈)2척(尺) 가량의 당망(攩網)으로 멸치를 건지거나, 표주박으로 구물 속 멸치를 건져 올렸다.

 

원담은 개인이 쌓는 경우도 있었으나(예를 들면, ‘모(某)생원원’이라 불리는 원담) 대개는 3~4명이 공동으로 쌓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원담 안에 고기가 많이 들었을 때 소유자 혼자 이를 어획하지만 평상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잡게 하고 그 어획고의 1/3만을 징수했다. 원담의 한쪽에 작은 입구를 트고 혹은 암석이 돌출하여 소만(小灣)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멸치가 들 때를 노려 그 입구를 구물로 막아 당망으로 어획했다. 구물은 면사(綿絲)로 만들고 너비 5~6심(尋, 1심은 여덟자), 길이는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은데, 암초가 많은 연안에는 이 어법(漁法)이 행해졌다.

 

본도에서 생산되는 멸치는 정어리, 샛줄멸, 눈통멸 등인데 그 중에서도 정어리 등이 가장 많이 잡힌다. 매년 무리를 지어 섬 동쪽으로 들어와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북안(北岸)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남안(南岸)을 따라 서하(西下)해 간다. 샛줄멸은 4, 5월에 눈통멸은 6, 7, 8월에 정어리는 8, 9, 10월경에 잡힌다. 치어(稚魚)의 포획은 가장 적고, 중간치 멸치는 가장 많으며 큰 멸치도 때에 따라 풍어를 이룬다.

 

도민들은 연안에 석재(石堤, 원담)를 구축, 만조시에 들어온 것들을 미명(未明)에 햇불을 밝혀‘족바지’로 건져 올렸는데, 내지인이 들어와서 마른 멸치를 사들이게 됨에 따라 차츰 규모가 큰 어구를 사용하게 되고 마침내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와 본도 어업의 으뜸을 점하게 되었다.

 

가장 성대했던 시기는 명치 40년(1907년)경에서 5,6년간으로 연안 곳곳에 내선인(內鮮人)이 멸치 착박공장(搾粕工場)을 건설했었으며 대지예망(大地曳網) 대형 방진망(防陳網), 선진망(旋陳網 )등을 보기에 이르렀다.

 

일본인 자본가는 조선인 어업자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어업을 하도록 해서 어획물 대신 취득, 이것을 착박(搾粕)비료로 제조해서 내지로 이송했다. 추자도민들은 젓갈류를 제조해서 육지로 다량 판매했으며 유명한 어장은 곽지, 함덕, 김녕, 월정 등이다(미개의 보고 제주도, 1924).

 

이처럼 1907년 이후 멸치를 수집하러 오는 일본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도민들은 원담 내 어획에서 벗어나 예망(曳網), 지예망(地曳網), 휘라망(揮羅網), 방진망(防陳網), 장망(帳網) 등을 이용하여 더 많은 멸치를 어획하기 시작했다.

 

휘라망(揮羅網)은 주머니를 갖지 않는 지예망(地曳網)으로 작은 것은 길이 20심(尋)으로부터 큰 것은 100심(尋), 너비는 양끝에 있어 1심(尋), 중앙에 이르러서는 약 5심(尋), 이에 길이 150심(尋)의 예승(曵繩)을 양쪽 끝에 달아 어군(魚群)을 둘러싸 바닷가로 멸치를 끌어들였다.

 

제주도내 어장 대부분이 모래사장이며 너비가 좁아, 대개 5~6정보(町步) 이내이며 10정보(町步)를 넘는 곳이 드물다. 이렇게 좁은 어장은 1조(組)가 1개소(開所)를 독점하는 곳도 있고 여러 조합(組合)이 공유하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일시에 다수의 구물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리 협의하여 순서를 정해 작업했으며, 각자 순서없이 투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방진망(防陳網)은 그 구조가 휘망과 다르지 않고 단지 예망이 없을 뿐으로 연안에 바위가 많아 휘망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쓴다. 어획 방법은 고기떼를 확인한 다음 구물을 던져 물속에 원형(円形)을 만들어 이를 둘러싼 다음 서서히 조여 고기를 건져 올린다. 그러나 풍어 때에는 구물의 안쪽을 풀어 고기떼를 나누어 싸고 서서히 바닷가로 끌고 가 처리했다. 이때 반쪽은 여전 물속에 방치에 두고 있어 마치 활어조(活魚槽)를 수중에 두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망(帳網)은 일종의 부망(敷網)으로 구조는 깊이 15심(尋), 너비 10심(尋)의 장방형 구물의 네 귀에 길이 10심(尋)의 예승을 붙인 것이다. 방법은 4~5인승 어선 4척이 어장에 이르러 투망하는 데 그 상단은 항시 수면에 뜨고 하단은 물에 가라앉혀 고기떼를 i아 구물을 조정, 때를 봐서 구물의 한쪽 끝을 들어 올린다.

 

이러한 휘망이나 방진망은 개인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고 대개 수십명으로 구성되는 조합에서 한다. 대부분의 조합은 평상시 어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멸치잡이 때만 참여한다. 어획물은 ‘도가’라고 불리는 조장의 지시에 따라 조합원에게 분배하거나 또는 건조한 후 상인에게 팔아 그 소득을 조합원에게 균등하게 나누는 주었다. 도가와 부조장인 ‘소임’은 조합원 몫의 소득과 1인 반의 몫을 추가로 얻는다.

1명 또는 2명이 소유하는 구물은 망자(網子, 일종의 구물 契員)를 쓴다. 망자들 사이에는 조장을 두고 그 지휘 하에 작업한다. 그런데 망주(網主)는 단지 어획물 판매의 일만을 관장할 뿐 분배의 방법은 망주와 망자 간에 반분(半分)하고 망자들 사이에서는 조합의 경우와 같았다.

 

멸치 망대(網代)(網主에게 배당되는 수익금)는 도민 독점의 어장으로서 10명 내지, 20명의 주식 조직이다. 1910년대 1개소 1어기(漁期)의 수확은 8만근(萬斤)을 밑돌지 않았다. 제주군의 자포, 곽지포, 금성포, 귀덕포, 협재포, 배령포, 별방포, 무주포, 김녕포, 함덕포, 대정군의 모슬포, 정의군의 표선포 등은 1어기 20만근(萬斤) 이상의 수확지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의 멸치 어획물은 일부만 젓갈 등 부식(副食)으로 충당되고 대부분 마른 멸치로 가공되어 목포 등으로 수송하거나 마관(馬關)으로 수출했다. 일본인이 경영한 성산포 한국물산회사(韓國物産會社)에서는 도민들로부터 원료를 사들여 착박(窄粕)을 제조했으며, 일본인 아라카와(荒天)씨도 곽지를 본거지로 협재 및 함덕에 지장(支場)을 마련하여 마른 멸치와 착박 제조에 종사했다고 한다.

 

한편 화학비료가 없었던 제주지역 전통농업시대에는 주로 ‘돗거름’과 ‘재’를 거름으로 사용하거나 감태나 몰망 등 해조류와 멸치, 정어리 등을 어비(魚肥)로 사용했다. 월정리는 도내에서 멸치가 가장 많이 잡이는 지역으로 유명한데, 예전 많이 잡일 때는 180고리 정도 어획했다고 한다.

 

한 고리는 보통 40말을 기준으로 하며 한 고리 정도면 삼백 평 땅에 시비(施肥)할 수 있었다. 월정리 멸치잡이는 구접(40명)이나 신접(38명)등의 신설망으로 조직되었으며 보통 그물배 2척, 당선(唐船) 2척 태우 6척이 바다에 나가 방진망을 펴 잡았다.

 

멸치잡이는 대개 5월에 이루어 졌고, 잡은 멸치는 젓갈로 자가(自家) 소비하거나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건조시켜 어비(魚肥)로 사용했다. 이게 다 ‘거름 허쿠다’라고 해야 남의 밭을 빌려 농사지을 수 있던 시절 이야기이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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