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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날-인사이드제주] 이귀경 평화의마을 원장 ... 소록도 간호사 스토리
개성 품은 '소시지맘'과 14명이 일구는 행복 삶터는?

 


“장애요? 뭐랄까요. 약간은 다른 개성? 신체 건강한 사람에게 맞춰진 사회구조와 잘못된 편견으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여지는 개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애(障礙)의 정의를 물었다. 이귀경(58·여) 평화의마을 원장은 “키가 큰 사람이 있는 반면 작은 사람도 있듯 장애는 약간 신체, 정신이 불편한 사람들이 가진 개성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을 짓지 않았다. 단지 동료일 뿐이었다.

 

소싯적 그는 우연히 책 한권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그의 가슴 한켠엔 뜨거운 무언가가 자리했다. 이후 그는 간호사의 꿈을 품게됐다. 소록도를 향한 꿈이었다.

 

“그 시절 전 소록도 나병 환자의 삶을 그린 책을 읽었어요. 그 책이 제 삶의 전환점이 됐죠.”

 

그렇게 그는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꿈이 있던 그에게 간호공부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기만 했다. 여행을 좋아하던 그는 대학 2년 시절 방학이 되자 달랑 배낭 하나를 매고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는 충남 천안에 내렸다.

 

그는 시내버스에 몸을 맡겼다. 목적지가 없던 그를 태운 버스는 도심지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멈춰섰다. 눈 앞엔 한적한 시골길이 펼쳐졌다. 그가 소망을 품게된 때였다.

 

그는 예닐곱 정도 돼보이는 한 아이와 마주했다. 평소 장애인을 사랑하던 그의 눈엔 아이의 장애부터 보였다. 뇌성마비에 시각장애까지, 작은 체구의 그 아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었다. 울음이 났다. 마음이 아팠다. 소싯적 느꼈던 뜨거운 무언가가 굳어져가는 느낌도 받았다.

 

 

“그 때 그 아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정말 충격이었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구속 없이, 아무런 장애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왜 그런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그 때 전 결심했더랬죠. 그 분들의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걷겠다고.”

 

그렇게 그는 간호사의 꿈을 이뤘고 소록도에 갔다. 나병 환자를 돌보며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뭍으로 나왔다. 어릴적 품었던 ‘장애복지’의 꿈과 함께 나왔다.

 

그는 광주의 한 장애인학교에서 양호교사로 일했다. 자라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지원체계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10년 정도 양호교사를 하다 그는 또 다른 걸음을 내디뎠다. 장애인복지시설을 향한 걸음이었다.

 

1997년 어느 날 그는 남편과 함께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를 종착지로 삼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시 제주엔 장애인복지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의 '궨당'(친척의 제주사투리) 문화는 이주민이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장벽이었다. 낯선 이주민에 주민들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 때마다 그에게 힘이 된 것은 장애인들의 미소였다.

 

3년 후 그는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에 사회복지법인 '평화의 마을'을 일궜다. 평화의 마을은 중증장애인들의 직업재활소다. 장애인들과 함께 빵을 만들어 팔았다. 개당 500원이다.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장애인 근로자들에게 월급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부가가치 높은 사업이 뭘까 궁리했다. 그렇게 장애인 복지가 잘 돼있는 독일로 떠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소시지였다. 돼지고기가 유명한 제주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그는 독일 소시지 마이스터로부터 석달 간 소시지 기술을 전수받았다.

 

소시지 기술을 전수 받았지만 육가공 상품 제조는 까탈스러웠다. 빵과는 달랐다. 법규도 까다로웠고 크고 작은 경쟁사들이 많아 판로 확보도 쉽지 않았다.

 

겨우 도내 한 마트에 소시지를 팔 수 있게 됐다. 어렵게 확보한 판로였지만 돌아오는 건 손가락질이었다. “장애인이 만든 소시지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는 등 따가운 시선은 계속됐다.

 

 


그는 눈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로.

직접 텃밭에서 키운 채소와 직접 담근 장을 사용, 가장 자연에 가까운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첨가물도 넣지 않았다. 재료와 부재료는 모두 제주도산으로 로컬푸드를 지향했다.

2007년에는 농림수산부로부터 HACCUP 인증과 제주도지사 품질인증인 FCG를 받았다. 2008년에는 제주도 1호 사회적기업이 됐고 식품경영안전시스템을 인증 받았다.

그 결과 2012년에는 축산물 HACCUP 운용 최우수작업장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로하스어워드 health food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독일육가공박람회(IFFA)에서 국내 최초로 금메달을 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평화의마을 소시지는 사회의 편견을 벗게 됐다. 오히려 평화의마을 소시지를 원했다. 소시지도, 평화의마을도, 장애인 종사자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평화마을 소시지가 여러 곳에서 인정받은 것은 장애인 종사자분들이 사회로 한발 내디딘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 그들은 더욱 더 당당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거에요.”

 

현재 평화의마을에는 14명의 장애인 종사자가 있다. 연령도 다양하다. 20대 초반부터 40대 까지다. 얼마 전엔 만 60세가 돼 정년 퇴임한 분도 있다. 그러나 아직 퇴직 후의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기간을 연장해서 근무하고 있다.

 

평화의마을 설립 초기 종사자들은 통근차를 이용하거나 마을 내에서 숙식했다. 하지만 이 원장은 그들에게 통근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통근차를 없앴다. 1년 동안 장소를 정해 모인 다음 인솔자가 동행하며 사업장을 오갔다. 그 다음 1년은 토요일만 혼자서 오게 했다. 힘들었지만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에 계속해 나갔다. 이제 종사자들은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 스스로 출.퇴근을 한다.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대중교통 이용 뿐만 아니라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썼는지를 금전관리도 교육하고 있어요. 또 담당 파트를 정해 승진제도를 운영하고 있죠. 직급을 부여함으로써 책임감과 일의 동기를 부여하죠. 특급호텔에서 송년회도 하고 사내 동아리도 있어요. 평화마을엔 노조도 있답니다.”

 

그는 다음 단계로 삶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도 추진중이다. 종사자들에게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주고 가정을 이뤄 남들과 같은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들에게만 맞춰진 사회구조를 탈피, 우린 모두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아요. 사람마다 가진 개성만 다를뿐이죠. 장애인이 살기 불편하다고 생각하죠? 사회구조가 그들에게 맞춰진다면, 그 이후에도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존재할까요?"

 

그는 그들에게 일자리 그 이상의 가치를 주고 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즐기며 살 줄 아는 능력. 진정 그가 바라는 세상이자 그가 주고픈 선물이다.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단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그들이 자유롭게 삶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될테니까요.” [제이누리=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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