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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 꼬마탐험대 증인 김두전 옹 ...부종휴 등이 발굴한 굴 스토리

 


1945년 가을 꼬마의 손에 횃불이 들렸다. 어두운데다 발 아래의 무언가 때문에 넘어지기도 수차례. 호루라기 소리와 선생님의 외침이 유일한 나침반이다.

 

어딘가에 있을 빛을 찾아 전진, 또 전진했다. 그러나 빛을 찾지 못했다. 그러기를 1946년까지 3차례. 드디어 빛을 찾았다. 이제 탈출이다. 만장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손에 횃불을 쥔 꼬마는 김두전(82)옹. 그는 1945년 스승 부종휴 선생과 함께 만장굴로 떠났던 꼬마탐험대원 중 한 사람이다. 꼬마의 더벅머리는 이제 멋스러운 백발이 됐다. 스승인 부종휴와 함께 했던 30명의 꼬마탐원대원 대부분은 이제 세상에 없다. 남은 대원은 4명 뿐이다.

 

“만장굴(萬丈窟)은 그냥 생겨난 이름이 아니에요. 꼬마탐험대원이 지은 이름이죠. 그 때 우리가 만쟁이거멀(만장굴 제3입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만장굴’이란 멋진 이름도 없었죠. 만장굴은 ‘만쟁이거멀’과 ‘대장군굴(꼬마탐험대와 부종휴 선생이 지은 만장굴의 가칭)’의 합성어니까요. 허허”

 

그는 백발을 긁적이며 더벅머리 시절을 읊기 시작했다.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부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요. 사상의 혼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던 시기였는데, 오로지 교육에 열중했었지요. 선생님께선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김녕초로 왔더랬죠. 그해 2학기부터 5학년 2반, 우리반을 맡았어요.”

 

과학반·음악반·탐험반. 5학년 2반은 그 안에 세개의 반이 또 존재했다. 아이들의 특기를 살리기 위해 부 선생이 만든 반이다. 주입식보단 자율 학습을 지향한 부 선생의 철학이었다.

 

그는 탐험반에 들었다. 다부진 체력에 호기심이 많던 그다. 탐험반은 그에게 딱 맞아 떨어졌다.

탐험반의 첫 자연학습장은 궤내기굴. 궤내기굴은 학교에서 1㎞ 떨어져 있다. 횃불 솜 묶음 10개와 등유 한 통, 20m 줄자, 측량노트 그리고 탐험반 학생 30명이 운동장에 모였다.

 

부 선생은 ‘책임 완수’를 주문했고 학생들은 ‘탐험 완수’로 답했다. 첫 동굴 탐사는 성공적이었다.

“첫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지. 지금(나이가 들고 난 뒤) 생각해보니 그것은 개척정신이었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지.”

 

이듬해인 1946년에도 그는 부 선생과 함께 탐험에 나섰다. 6학년 1학기 첫 탐험지는 한라산. 등산 전날 관음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하늘이 허락하지 않아 오를 수 없었다. 일기예보가 없어 하늘을 보고 날씨를 관측했던 시절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1946년 4월 20일 오전 9시, 횃불과 등유, 줄자, 연필, 도시락을 챙긴 학생들이 다시 운동장에 모였다. 2차 동굴탐사의 날이자 김녕초 6학년생들의 봄소풍 날이다. 평소 부 선생을 응원했던 교장선생님은 김녕초 6학년생 봄소풍을 '동굴탐사'로 정했다.

 


“본래 계획은 김녕사굴과 무명(無名)굴 탐사였지요. 김녕사굴은 6학년생 전원이 들어갔지만, 무명굴에는 선택된 10명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 중에 저도 포함됐었죠. 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낙석으로 뒤범벅돼 있었고 굴 안으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질 않았죠. 겨우 낭떠러지 돌 바위틈을 찾아 아슬아슬하게 길을 만들었더랬죠. 그리곤 추가로 20명의 학생을 불렀고 30명만이 굴에 들어갔죠.”

 

선두 횃불 2개를 시작으로 측량반의 횃불 2개와 후미 횃불 2개가 천천히 행진하기 시작했다. 2시간쯤(약 700m) 걷다보니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 선생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빛이 비추는 곳을 향해 올라갔다. 다시 돌아온 부 선생은 “오늘은 이만 철수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2차 탐사는 끝났고 탐험반은 휴식기를 맞았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놀랄까봐 선생님께서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당시 선생님께선 빛이 들어오던 장소(제2구간 입구. 지금의 만장굴 입구)에서 변사체를 발견했더랬지요. 이웃마을 월정리에 살던 지적장애인이라던데..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 분이셨더라구요. 다행히 선생님의 발견으로 유가족에게 인계될 수 있었던 거죠.”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1946년 10월 5일 최종 탐사 계획이 잡혔다. 그는 들뜬 마음에 도시락과 짚신, 횃불 등을 챙겨 운동장으로 갔다. 맡은 준비물을 챙긴 학우들이 보였다. 출발 전 ‘꼬마탐험대’의 정식 명명식을 거행했다. 교장선생과 부 선생, 그리고 탐험대원들만 참여한 소소한 명명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정식 탐험대원으로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션을 수행한 날이기 때문이다.

 

“한 5시간 정도 걸었죠? 측정치를 보니 만장굴 제1입구부터 7000m(정밀 측정 결과 7416m)를 온 거에요. 만쟁이거멀에 다다른거죠. 만쟁이거멀 천장에서 비춰오던 햇빛을 잊을 수 없어요. 정말 황홀했더랬죠. 그날의 그 감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부 선생과 꼬마탐험대는 무명의 굴 탐사를 마쳤다. 부 선생과 꼬마탐험대는 무명의 굴에 ‘대장군굴’이라는 가칭을 지어줬다. 탐사를 마친 굴을 더이상 무명(無名)으로 부를 순 없으니까.

 

이후 김녕중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만쟁이거멀의 육상과 동굴에서 “야호”를 외쳐가며 천정이 뚫려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947년 2월 24일 ‘만장굴’이라는 멋진 이름도 지어줬다. 그렇게 부 선생과 꼬마탐험대도, 만장굴도 지상으로 빠져 나왔다.

 

"부 선생님은 만장굴 발견 직후 김념초등학교를 떠나셨죠. 제주·부산·서울 등지를 오가며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서울대 연구원으로 재직하시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부종휴 선생은 그러나 만장굴과 꼬마탐험대원들의 탐험기를 남겼다. "제 인생에서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소중한 인연이자 우연이죠.  선생님 덕분에 세계 최초 '동굴 결혼식'도 참석해봤는걸요? 많은 추억들을 만들어주셨죠."

 

1969년 부 선생은 인생의 반려자와 만장굴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세계 최초의 동굴 결혼식이었다. 만장굴을 사랑하던 부 선생 다웠다.
 
“꼬마 탐원대원의 경험을 백발의 노인이 풀어간다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요? 어린 날의 추억을 그 나이의 후세들에게 전할 수 있어 행운이죠. 그러나 아쉬움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만장굴’이 제주 최고의 관광지로 부상한 것에는 만족한다. 그러나 만장굴을 알지만 이를 발견한 부종휴 선생을 모르는 관광객이 무색했다. 그보다 만장굴 발견의 공(功)을 몰라주는 제주도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는 “부종휴 선생님의 업적을 알려야 한다”며 신구범 지사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주도에 '기념비 사업 추진'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제각각의 이유로 우근민·김태환 지사도 모른척 했다. 그러다 2014년 원희룡 지사에게 호소문을 전달했다. 원 지사는 ‘만장굴 탐험 70주년 기념 행사’로 답했다. 20일 만장굴이 행사장이다. 오전 10시 만장굴 탐험 7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제막식을 갖는다.

 

조형물은 만장굴의 시작(제1입구)과 끝(제3입구)을 형상화해 부종휴 선생이 꼬마탐험대를 이끌고 동굴을 탐험하는 일련의 과정이 담겨져 있다. 만장굴의 상징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기존의 안내판도 함께 정비됐다.

 

제막식에는 꼬마탐험대 생존자(김두전, 김시복, 원장선, 홍재두 등)와 부종휴 선생의 유가족, 부종휴 선생 기념사업회(이사장 고민수), 김녕초등학교(교장 양인자) 교직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제주지역 언론사들과 제주도의회 홍경희 의원이 만장굴 기념 사업을 실시하는데 크게 도와주셨어요.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더불어 우리 꼬마타험대원들까지 알려지게 됐으니까요.”

 

행사를 앞둔 그는 마치 더벅머리 12살 소년처럼 해맑았다.

그에게는 아직도 목표와 꿈이 있다. 만장굴과 부종휴 선생을 더 알리는 목표와 만장굴 관광지구를 만드는 꿈이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는 만장굴인데, 비공개구간까지 공개된다면 더 늘지 않을까요? 또 만장굴 제1구간에 영상 전시관을 만들고 만쟁이거멀에 레포츠 시설을 만들어 종합 만장굴 관광지구를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오늘도 그는 감귤밭을 일구며 만장굴 관광지구를 꿈꾼다. 마음만은 아직 12살 더벅머리 꼬마 탐험대원이다.

 

부종휴 선생과 꼬마탐험대의 만장굴 이야기는 동화와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제이누리=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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