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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산다] 35년 8개월 '사진기자' 최재영씨의 '인생 2막' 新귀거래사

 

“숙성된 와인이 더 맛나죠? 사진도 그래요. 사진도 숙성돼야 제 맛이죠!”

'사진숙성론'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한 마디로 '내공'이다. 더운 날 송긍송글 땀이 얼굴에 맺혔지만 눈빛이 한 마디로 '포커스 렌즈'다.

 

중앙언론사 기자로 35년여 재직하며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사진작가 최재영(65)씨. 그는 지금 제주에 터를 잡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물론 카메라에 역시 손에 꼭 쥔 '신귀거래사'(新歸去來辭)다.

 

그의 사진경력은 무려 50년. 기자생활 35년을 보탠 그의 인생기록이다.

 

그는 16살 시절 카메라를 처음 잡았다. 그리고 35년간 사진기자로 활동해 왔다. 그리고 현역 기자생활을 떠났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언제나 카메라.

 

그는 1952년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시절 별명은 ‘가시나(여자아이)’.

 

뭇 사내와는 달리 남 앞에 나서지도 못했고 몸도 허약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다보니 그는 점점 더 '가시나'가 되어갔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1967년 어느 날,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카메라 한 대를 쥐어주고 집밖으로 떠밀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카메라클럽 회원으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터라 집 안에 카메라가 여러 대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넨 것이다.

엉겁결에 카메라를 들고 집밖으로 나왔다. 매일 보던 카메라였지만 카메라를 쥔 손은 어색했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레 뷰 파인더에 눈을 갖다 댔다. 또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그 세상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셔터를 눌러 필름에도 새겼다.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날 이후, 카메라와 외출하는 시간이 늘었다.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매 순간 순간을 필름과 마음속에 새겼다. 그리고 인화한 사진을 보며 그 때를 되새겼다.

“저는 그렇게 사진과 사랑에 빠졌어요. ‘사진이 왜 좋으냐’란 이유는 묻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어요. 그냥 카메라를 잡으면 힘이 나요. 그리고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고교 입학후에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늘 함께였다. 교내에 ‘사진반’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71년 대학신문 사진전에 두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진 한장을 출품했다. 그리고는 ‘금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사진 사랑은 나날이 커져갔다. 고교 2학년때 그는 ‘사진기자’라는 꿈을 마음속에 그렸다. 그리고 중앙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사진을 좋아하는 그로써는 행운과도 같은 일이였다. 사진학과가 첫 입학생을 맞는 해였다.

“엄청난 우연이자 행운이죠. 사진에 ‘천직’이라는 단어를 감히 사용할 수 있는 이유죠.”

1976년 1월 그는 동아일보에서 ‘사진기자’라는 명함을 새겼다. 소년의 꿈이 이뤄졌다. 동아일보에서 일한 지 2년 남짓 됐을 무렵 그는 중앙일보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렇게 1978년 5월부터 중앙일보 명함을 가졌다. 이후 잠시동안 국민일보 창립멤버로 활동한 이력을 제외하고는 은퇴 전 까지 중앙일보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덧 그의 면면이 달라졌다.

 

눈은 카메라 렌즈보다 더 정확하다. 다리는 삼각대보다 더 튼튼한 균형잡이다. 때로는 두 귀로 방향을 잡고 느낌이란 타이머로 순간을 포착해낸다. 갓 짜낸 포도즙이 오랜 시간을 거쳐 와인이 되는 것처럼, 반 백년 동안 사진을 거쳐 온 그는 어느새 ‘카메라’가 돼 있었다.

35년 8개월 동안 사진기자로 일해 온 그의 별명은 ‘오리’. 그는 그의 별명인 ‘오리’와 진짜 사랑에 빠졌고 집안 곳곳이 ‘오리 컬렉션’으로 가득하다. 병따개부터 조각, 오리캐릭터 피규어 등 ‘오리’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은다.

“별명이 왜 오리냐구요?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보다시피 제가 키가 그리 크지 않아요. 젊은 시절엔 배도 툭, 엉덩이도 툭 튀어나왔죠. 이런 제가 사진을 찍겠다고 사방팔방 바삐 돌아다니는 걸 보고 ‘오리’라는 별명을 지어주더라구요. 오리가 물 위에 떠있을 때 오리발은 그 밑에서 바삐 움직이잖아요. 그 모습이 오리랑 닮았다나 뭐라나...”

그렇게 얻은 ‘오리’였다. 지금은 그의 마스코트가 돼 버린 ‘오리’. 살아있는 오리를 빼곤 모두 모은다. 산 오리는 자기 자신 하나면 된다는 그다.

 

그는 사진기자 일을 하며 권력무상과 세월무상을 느끼곤 했다. 그의 카메라 앞을 9명의 대통령이 거쳐갔다. 8·9대 박정희 대통령부터 19대 박근혜 대통령까지. 그는 한국사의 격변기를 몸소 겪어왔다.

유신독재부터 오늘날의 대한민국까지.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이들 옆에서 그들을 담았고 버스에 날아들어 온 최루탄도 담았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도, 88올림픽도,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1997년 외환위기에 따른 구제금융(IMF) 사태도 모두 다 담았다.

그가 담은 모든 것을 펼쳐놓으니 대한민국의 35년이 펼쳐졌다.

“제가 사진도 숙성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거에요. 사진을 찍은 당시는 큰 빛을 발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똑같은 사진을 꺼내 보았을때, 그 사진의 제 맛이 우러나오기 시작하죠. 제가 연 백남준 작가 사진전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전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숙성’을 거쳤기에 가능한 것이였지요.”

그 세월동안 에피소드도 많았다. 1994년 여름, 그는 제주도로 출장을 왔다. 함덕 해변가에 숙소가 있었다. 바다에 갔다가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그는 우연한 기회로 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 해 입추날 그의 사진은 중앙일보 1면을 장식했다. 사진이 보도되자 사진조작 논란으로 시비를 겪기도 했다. 나뭇가지에 일렬로 붙어있는 잠자리들 때문이다.

“허허. 그때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사진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드문 기회죠. 아니 기적이죠. 준비가 만든 필연이였다고 할까요? 당시 남들에게는 없지만 저에게 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카메라’입니다. 제 손에는 항상 카메라가 들려있었죠. 그 장면을 여러 신문사 동료들과 같이 봤지만 저만 담을 수 있었어요. 언제 어떠한 것을 만날지 몰라요" 그가 항상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다.

그는 사람을 향해 렌즈를 들이대는 걸 좋아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큰 그다. 그는 ‘세상 만물 중 가장 신선한 것이 사람’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사람은 가도 사진은 남는다는 그.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을 사진으로 담아낸다는 소리가 따라 붙었다.

 

그는 故 천경자 화백과 故 김기창 화백 등 유명 인사들은 물론 시민들의 사진까지 담아냈다. 그의 사진에서는 찍힌 이의 삶과 애환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들꽃을 좋아하는 천경자 화백이 있었고,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김기창 화백이 보였다. 또 힘겨운 삶을 지고 가는 서민의 모습도 보였다. 사진 한장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사진이라는 것이 그래요. 백 마디 말을 한 장의 사진이 대변하죠. 즉 '울림'이 있는 거죠. 사진이라고 다 같은 사진이 아니에요. 진정한 사진은 '울림'을 주죠."

 

그런 그의 기자생활에 한국보도사진전은 그에게 금·은·동상을 모두 안겨줬다. 1998년 제17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에서 '다정한 속삭임'이란 작품을 출품해 대상을 거머쥐었고, 1999년 한국기자협회 보도사진전에서 'IMF극복 돌반지까지'를 출품, 은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한국보도사진전에 시사기획부문에 '아, 대한민국'을 출품, 금상을 받았다.

그는 사진을 ‘진실’되고 ‘정직’하다고 말한다. 사진은 현장을 가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세월을 사냥해왔다. 그리고 2011년, 비록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담당 부국장이란 다소 긴 직함이었지만 '사진기자' 명함을 살포시 내려놨다.

 

그리곤 전시회장으로 내달렸다. 2011년 '백남준 굿' 사진전을 시작으로 2012년과 2013년 2회에 걸쳐 '대한민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전을 열었다. 지금도 그는 남몰래 새로운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그의 뒤를 섭섭지 않게 아들이 잇고 있다. 그가 강요한 게 아니다. 아들 최원석(35)씨는 고교 시절부터 아버지와 같은 꿈을 꿨다. 부전자전이다. 원석씨는 미국에서 사진학과를 나와 지금은 코리아타임즈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다 그는 조용히 뭍을 떠났다. 초등학교 교사를 은퇴한 부인과 카메라 1000대를 들고 조용하고 따사로운 한라산 중턱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터를 잡았다. 신혼여행을 왔던 곳이자 잦은 출장지였던 제주섬에 정착했다.

 

제주생활 2년이 흐른 지금, 그는 제주의 자연을 닮아가고 있었다.

“제주요? 그냥 좋아서 왔죠.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니깐요? 1978년에 신혼여행으로 처음 제주의 땅을 밟았어요. 사진기자이다 보니 제주 출장도 잦았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제주에 물들었어요. 평화로운 천혜의 자연환경에 반한거죠.”

그는 이주하기 10년 전 지금의 집 터를 마련했다. 18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교래리 이장의 말을 듣고 교래리의 매력에 푹 빠졌다. 뭍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엇다.

경기도 과천에서 33년간 살아오던 그에게 제주란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겨울엔 눈이 많이 오고, 제주시 지역보다 4℃ 가량 낮은 중산간 지대지만, 바다보다 산을 좋아하는 그에겐 안성맞춤이였다.

제주 이주는 즉흥적인 선택이 아닌 계획이었다. 그리곤 제주 이주를 꿈꾸며 제주에 잠깐씩 내려올 때마다 나무 한그루씩, 돌담 하나씩 쌓았다. 그렇게 집이 완성됐고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제주에 내려오니 딸 최영미(38)씨 부부가 그와 아내를 반겼다. 1년 전 먼저 터잡은 딸 영미씨는 그의 제주 이주 계획을 듣고 뭍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2013년 서귀포시 남원읍 한 감귤밭에 터를 잡았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던 영미씨와 일식집 요리사이던 사위는 감귤 농사를 지으며 오는 9월 일식집 오픈을 앞두고 있다. 그는 그런 딸 부부를 보면 흐믓하기만 하다.

 


그는 요즘 텃밭을 가꾸기 바쁘다. 나무 가지치기도 해야하고 정원도 꾸며야 한다. 고양이와 개에게 밥도 줘야한다. 그리고 틈틈히 아내에게 사진 기술도 알려주고 있다. 현업에서 은퇴, 늘그막히 살다보니 오히려 아내가 "사진 좀 가르쳐달라"고 졸라 돌연 사제지간이 됐다는 것. 

그러나 그의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들려있다. 제주에 와서 그는 ‘돌’과 사랑에 빠졌다. 하나의 돌이라도 날씨와 광선, 시간 때에 따라 다 다른 ‘돌’이 된다는 그다. 그는 돌을 테마로 한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다.

“제 꿈이요? 우선 10년간 집을 꾸밀 거에요. 집 구석구석, 마당 구석구석 제 손길을 스쳐 저만의 공간을 만들 거에요. 그리고 집 앞에 갤러리를 하나 열 겁니다. 그동안 숙성시켜 둔 사진들을 꺼내는 거죠. 그리곤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사진’으로 제주를 위해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돌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제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개발로 변해가는 제주를 더 잃기전에 사진으로 담아낼 거에요. 그리곤 먼 훗날, 그것들이 ‘제주’의 흔적이 되겠죠.”

50년 사진인생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은 그다. 일상을 이벤트로 만들고 현재를 역사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손 같은 그의 풍모. 그는 어느새 카메라를 넘어 사진이 돼 있었다.

“정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항상 성실하고 정직해야해요. '사진'처럼 말이죠.” 그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팁'이다. [제이누리=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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